명문감상 [003] "행복과 깨달음"


한 비구니 스님의 깨달음의 노래 - '오도송悟道頌'으로 2, 3종의 버젼이 전해진다. 작자는 당唐나라 시대의 비구니 무진장無盡藏스님과 원元나라시대 비구니 묘잠妙湛스님의 두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중 한사람은 작가를 기록하지 않고 기존의 시를 그냥 썼을 수도 있다. 중국이나 인도는 오늘날도 그런 습관이 남아있지만 지적재산권이라는 어떤 개념자체가 없어서 요새로 치면 좀 무분별한 복제도 이루어졌던 것 같다. 반대로 자신이 쓰고 다른 유명한 이가 썼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걸 '가탁'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은 '아이디어도 중요한 재산'임을 아니까 그런면에서는 훨씬 좀 더 성숙한 자세를 가진 셈이다.
‘오도송’이란 옛 성인들이 깨달음을 얻으면 어떤 감흥에서 절로 나오는 노래이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요새로 치면 일종의 문학장르인데, 사실 인도 불교의 전통에서도 없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을 얻은 이의 날아갈 듯한 가벼움이랄까. 거기서 나오는 노래로 부처님도 가끔 그런 장면을 연출하셨다는데 우리는 그것을 ‘깨달음의 노래 우다나udana’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이동네에서는 제법 오래된 전통이다.
사실 이게 똑같으면 아주 곤란한건데, 저 두 스님 중 누가 진짜 작가인지는 모른다. 물론 우리한테 작자가 누구인가 하는 역사적인 진실은 두번째 문제이고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인데, 봄이란 시적 언어를 깨달음에 비유했으니 아주 멋있는 표현이다. 가끔 어려운 오도송들은 사실 당사자들에겐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는 몰라도 속세에 사는 우리들에게 그 시가 주는 감흥이란 깨닫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셈이다.
당신들이야 뭐 “너도 물 마셔봐라 얼마나 시원한지”라고 속편하게 말하지만 결국 물맛의 시원함을 아는 당신들끼리 놀겠다는 이야기라, 중생의 입장에서 가끔은 조금 부러운 눈초리로 그들을 동경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우리한테도 역시 그들은 역시 딴동네 사람들일 뿐이다.
근데 깨달음을 노래 하면서도 시적 감각을 잘 살린 오도송은 일단 협상테이 블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깨달음의 세계를 몰라도 시의 내용이 뭔가 알만 한 내용인 것 같지 않은가.
요새 쓰기는 좀 고리타분한 비유지만 옛말에 ‘남의 밥 콩이 더 굵어보인다’고. 대개 우리 삶이란 늘 외향적이다. 항상 내가 보고 듣는 것으로부터 찾을 뿐 내 스스로에게 행복을 결정하는 권한이 있음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어슬렁거리다 보면 행복쪼가리라도 하나 건질 수 있을까 찾아다니는 격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뭔가 다들 그러고 있으니까 나도 막연히 따라한다. 그리고 너도 나도 하는데 나만 안하면 이상하니까 또 한다. 그러 다 보니 여지껏 그렇게 해 왔는데 이유가 없다고 그만 두기도 사실 애매하고, 또 이제 그거 별로니까 다르게 해보자라고 할라니까 다들 해오던건데 왜 바 꾸려고 하냐고 손가락질 하니 그 사람들 하나씩 설득하기도 힘들고, 그냥 하던대로 하면 편한데 굳이 욕먹어 가면서 설득할 재간도 없고 그래서 또 하던데로 그렇게 한다. 허나 사실 물어보면 그냥 해보니까 그렇게 하는게 편하더라 말고는 딱히 이유가 없다. 모든 일에 다 딱 부러지는 이유가 있겠냐만, 그래도 행복찾는 일이면 인생을 걸 만한 일인데 분명하게 댈 수 있는 이유조차 없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이유를 대지 못하는 건, 이유가 필요없기 때문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아무리 활발한들, 그게 이유가 없어서야 기계가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자. 이제 이렇게 정합시다. 행복은 밖에 있는게 아니니까, 스스로에게서 찾는걸로. 딱 정한 겁니다?
어느날 누군가가 이런 시를 읆었다.
“소를 키우고 자식을 키우는데, 생각해보니 소와 자식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구나”
라고하니까 그 때. 옆에 있던 부처님이 살짝 비꼬아서 이런 시를 따라 읆으셨다.
“소를 키우고 자식을 키우는데, 생각해보면 소와 자식에 대한 집착 때문에 불행해 지는구나”
좀 간단하게 줄이긴 했는데 ⟪숫따니파타Sutta-Nipata⟫란 책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아마도 왜 행복한지, 또 왜 불행한지 독자들은 잘 알것이다. 한참 동안 “소는 누가 키우나”는 유행어가 개콘을 통해 알려졌는데 2,500년 전에도 소키우는 이야기가 나온다니 은근히 흥미롭다. 물론 당시 인도사회가 농경사회니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아무튼 가진 것 때문에 행복해지기도 불행해지기도 하는 것은 분명한데 좀 더 스마트하게, 그것과 상관없이 행복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가진것 때문에 느끼는 기쁨은 사실 행복이 아니다. 행복이라면 좀 있으나 없으나 행복해야지 갖고 있던 것 없어지면 금새 두 배 세 배로 불행해지니까. 왜, 안주는 것 보다 줬다 뺏는게 더 나쁘다잖은가.
에리히 프롬Erich Fromm도 ⟪소유냐 존재냐 To hava or To be⟫에서 그렇게 말했다.
“갖고 있는 게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갖고 있던게 사라지면 불행해진다.”
“소유에서 오는 기쁨은 행복이 아니다.”
그럼 혹시 부처님이 주지 않을까. 그건 정말 아니다. 행복이란게 부처님이 줄 수 있는 거였으면 2500년 전에 다 나눠주고 떨어졌거나, 남아 있으면 지금도 우리에게 주셨겠지. “이 자식 너는 하는 짓을 보니까 아직 주면 안되겠어. 나중에 하는 거 봐서 생각해 보겠어”설마 이러시면서 쥐고 안내어놓겠는가.
이 시가 말해준다.
Cheer Up!
ㅎㅎㅎ재미있게 풀어쓴
이야기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종종 들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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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재미있는 글입니다. 오도송하면 경허스님도 한가락 하시지 않았나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