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슬픈 현장 황촌리(黃村里)

in #kr7 years ago

황촌리는 본래 태안군 북이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황곡리(黃谷里)와 항촌리(項村里)를 병합하여 황곡리의 황(黃)자와 항촌리 촌(村)자를 합하여 황촌리라 하고 서산군 원북면 黃村里가 되었다.-태안군지 원북면편에서 -

황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하여 황굴이라 불려진다전해진다. 황굴로 들어서 우당 굴로 가는 길은 요즘 보기 드물게 호젓하다. 개 짖는 소리 하나 없이 골바람만 살랑대는 조용한 산골마을이다. 구불구불한 논길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면 숲길 위에는 산속의 진한 향기가 머물러있다. 산새와 산짐승들만 살고 있는 아주 깊은 계곡도 아니면서 호젓한 길을 걸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가 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신두리해안사구(薪斗里 海岸沙丘)가 한폭의 풍경화로 다가온다. 파도가 밀려와 철석철석 부딪치던 소리가 잊혀진지 오래 되었다.
길 위로 엉겅퀴가 반가운 얼굴로 맞이한다. 소담스러운 얼굴 위에 살포시 앉는 하얀 나비, 제일 맛있게 생긴 꽃 술 속으로 긴 빨대를 밀어 넣고 쪽쪽 몇 번 빨더니 날개 짓으로 인사를 남기고 풀 섶으로 숨는다. 장마 비가 한줄기 쏟아지려나 산길은 후덥지근하니 눅눅하다. 소나무 가지 위에 청솔모 한마리가 바쁘게 뛰어 다니며 덜 영근 솔방울을 씹어 먹으면서 거친 껍질은 아래쪽으로 살짝 던져본다. 모르는척 능청을 떨었더니 관심을 끌어 보려고 나뭇가지를 발로 글그면서 나의 눈치를 살핀다. 천연덕스럽게 까치수염꽃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넌 왜 꼬리가 길어, 너도 향이 있니, 나비가 찾아오는 것으로 봐서는...” 능청을 떠는 것을 알았는지 작은 솔방울 하나를 내 발밑으로 던진다. 그래도 모르는척했더니 꼭대기로 올라가면서 짜증을 부린다. 청솔모의 장난기를 즐기면서 눅눅한 산길을 다시 걷는다.

남과 북의 분단국가로 모두 떠난 산골마을에는 자연은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산길을 따라 내려오면 양청이, 버둥이, 모재, 부엉배, 정자도로 갈라지는 삼거리다. 이마을과 아주 잘 어울리는 담장에 그려진 벽화에 반해 마당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정말 아늑한 마을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골이다. 앞 산 너머는 옛날에 띠밭이 있었다하여 부르게 된 모재다, 작은 포구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떠난 마을에 포구 역할을 못하고 있다. 양청이 마을 전체를 한눈으로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집이다, 딸들 둘이서 그린 벽화라고 조원분 아주머니(81세)씨 딸 자랑에 마당 끝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주위 풍광하고 너무 잘 어울리는 담장벽화는 딸 자랑할 만하게 잘 그렸다. 어머니와 잘 어울리는 고향집의 향수를 듬뿍 느낄 수 있는 예술작품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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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촌2구 양청이에서 60년을 살고계신 조원분 아주머니(81세)께 양청이 역사를 들었다.
“개시내에서 태어나 19살에 우당굴 최 씨네로 시집왔지, 시댁에서 3년 살고 양청이로 삶은 보리쌀 한 사발과 벼 한 가마니 가지고 제금을 났어, 이 아래 헌집으로 제금나서 남편은 군대 가고 시아버지가 남편 제대해서 올 때까지 같이 살았지. 그 헌집에는 뱀하고 벌들이 얼머나 많았던지 그냥 한 식구처럼 하고 살았지. 아들 하나 딸 6명을 키우느라 어떻게 그 세월을 살았는지도 모르겠구먼. 아침 밥 먹고 아이를 등에 업고 바다 나가서 굴 까서 팔고, 밤이면 호롱불 밑에서 삼을 삼아 베 짜서 팔아서 한푼 두푼 모아 이 아래 염전 논 5마지기 샀지, 낮에는 남의 집 일하러가고 밤에는 우리 집 일하면서 밤과 낮이 없이 일만 하고 살았으니... 아이들 7명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느라고 하루 한 시간도 쉬어 본 날이 없구먼. 뭐든지 하면 손이 빨라서 제일 많이 했지. 굴을 까러가도 황촌리에서 제일 많이 깠으니께. 아이들 학비 대느라 힘든 줄도 모르고 원제 이렇게 세월이 갔네, 굴장사가 사러오지 않으면 20kg을 머리에 이고 태안까지 가서 팔구. 모재, 버둥이, 정자도 갱변은 모두 나의 금고였지. 제일 굴 잘까는 황촌리 선수하면 조원분(81세)였쓰니께, 마을사람들이 지어준 내 별명이 뭔지 아나?”억컬레미여“,억척스럽게 산다고 지어준 이름여, 워떤가? 결혼해서 12년 동안 7명 아이들 낳고 14년 동안 시집장가 보내면서 인생의 큰 보람을 느끼며 지금까지 살고 있네,”라고 말씀하신다. 아저씨가 떠나신지 24년 동안 이 고랑을 지키며 살아오신 양청이 지킴이다.

황촌리는 1968년12월26일에 분단의 슬픔을 직접 겪었던 곳이다. 그 이후 마을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48년 동안 적막만이 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대문 옆 기둥에 붙혀진 문패는 아직도 돌아 올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 1968년12월26일 밤 11-12시 남북분단의 아품이 여기에도 있었다.
그 날은 월북한 친구 고은규네 제삿날이었다. 목말 한 동네 위 아랫집 살던 친한 친구 은규가 생각나 제삿날 밤에 친구 집에 갔다. 친구대신 제꾼도 되줄겸, 이게 웬일인가. 뜻밖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눈앞에 벌어졌다. 월북한 은규가 제사를 모시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말문이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리둥절하게 서 있었다. 날이 새고 월북한 은규가 왔다니.... 고민 끝에 이장님(고ㅡ최이장)과 상의하고 파출소에 신고를 하게 되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그 날도 한 동네 친척집 제삿날이었다. 친척들과 제사를 지내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자려고 누워는 데 문밖에서 듣던 목소리가“ 상학이! 상학이!”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늦은 밤 누가 찾아왔나. 옷을 갈아 입고 방을 나간 잠시 후 문밖에서 이상한 괭음소리가 들려 이상학씨 부인과 아버지가 쫒아나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지만 담 모퉁이 짚더미 옆에서 신음 소리에 달렸다. 등불을 비춰보니 보니 이미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있고 쓰러진 이상학씨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고 당시 예비군 중대장을 지낸 전,조항설예부군 중대장님이 전해주신 이야기이다. 그때 현장조사 결과 월북한 고은규가 신고한 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다시 내려와 친구를 살해하고 살해한 물증으로 한 쪽 귀를 잘라간 68년 황촌리 간첩사건 이야기이다.

그날 이후 황촌리는 사람이 못사는 동네가 되었다.
지켜야할 지침이 있었다. 바다에 갈 때는 혼자가지 말고 여럿이 같이 가야할 것. 저녁에는 일찍 불을 끄고 수상한 사람을 보면 꼭 신고할 것, ,,, 평온한 산골마을은 모두 무서워서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대대손손 의지하고 살던 마을 사람들은 한집 두 집 마을전체 15가구가 이주를 했다. 모두 떠났던 산골마을에 조원분 아주머니네만 이사를 안 갔다.
“무섭다고 한집 두 집 이사를 떠나갔지만 나는 아이들 키울 생각에 양청이를 떠나면 못산다고 생각했유, 객지 어디가서 7명 아이들 데리고 워찌게 산대유, 여기서는 바다가서 굴 까면 돈이고 남에 집 일하고 밤에는 베 짜고 해야되는데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태안만 가도 할 줄 아는게 없슈, 내 새끼 내 집 마을을 지키며 살거라 다짐하며 모두 떠난 양청이를 지키며 여태껏 살았슈” 조원분아주머니는 지난 세월을 야속해하며 저산너머가면 모재여, 저 산길로 바다 갔는디 지금은 내가 안가니께 길이 없어졌어. 하며 씁쓸한 얼굴로 산 능선을 바라보신다.
<2006년 6.15 공동선언 남북작가대회>을 기록 차 평양을 다녀왔었다. 한 민족의 아품의 현장에서 보고 느꼈던 일정들이 하나하나 생각이 난다. 동행한 작가들 중에는 이런 분단의 아품을 가슴에 안고 가신 분들도 계셨다. 부모를, 자식을, 아내와 생이별을 하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분단 가족들의 애타는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평양의 거리, 인민궁전, 백두산 천지에서 남북 작가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통일을 기원하면서 손의 손을 잡고 외치던 그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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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태안군청에서 발행한 이야기책 [바닷바람이 들려주는 찬란한 이야기 - 태안을 이야기하다]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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