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마지막 3일
1598년 11월 17일 이순신은 그 생애 마지막 일기를 쓴다. “어제 복병장 발포 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 배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하였다. 왜적은 한산도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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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만호는 보고하면서 계속 분통을 터뜨렸을 거야. 왜선도 튼튼했고 쌀도 가득 실려 있었는데 아 글쎄 저 되놈들이 말입니다...... 연신 육두문자를 섞어 가면서 되놈들 욕을 퍼붓는 발포 만호 소계남을 보면서 이순신은 명나라 군들이 마지막까지 심술을 부린다 싶었을 거야.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어. 그저 끝나가고 있었어. 침략자를 결정적으로 물리치지도 못했고 섬멸하지도 못했어. 그냥 그들이 알아서 물러가는 거였지. 조선 육군은 박박 긁어도 2만 단위를 넘지 못했고 명나라 군 중심의 연합군이 일본군의 남해안 거점들을 공격했지만 울산에서 사천에서 순천에서 다 무위로 돌아갔어.
일본군은 여전히 강했고 7년 전쟁으로 조선의 힘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명나라 군대는 구태여 남의 나라 전쟁에 피를 흘릴 일이 없었지. 명나라 장수 동일원은 그 부장의 아우를 일본군 장수 시마스 요시히로 (이 이름을 기억해 둬라)에게 인질로 바쳐가며 무사 귀환을 약속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고 봐야지. 순천에서도 이순신과 명나라 진린의 함대가 명나라 장수 유정이 지휘하는 육군과 연합작전을 폈지만 육군 장수 유정이 뇌물을 받아먹고 움직이지 않는 통에 수군만 기를 쓰다가 물러나고 말았어. 조명 연합군의 마지막 공격이 끝난 거야. 조선군은 그저 두 눈 멀뚱멀뚱 뜨고 일본군이 배 타고 고향에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어.
그러나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만은 그렇게 편안하지 못했지.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장성처럼 버티고 서 있었던 거야. 말이 통하는 명나라 장수 유정에게 하소연 반 협박 반 해 봤지만 유정도 수군은 어쩔 수 없다고 하니 일본군들은 명나라 수군 지휘관 진린에게 매달렸다. 난중일기 보면 이순신이 아주 담담하게 일본군들과 진린이 짝짜꿍하고 있는 걸 묘사하고 있어. “도독이 붉은 기와 환도 등 물건을 받았다...... 왜장이 와서 돼지 두 마리를 바치고 갔다. 도독이 조카 진문동을 왜군 진영에 들여보냈다..... 배들이 와서 말과 칼, 창을 바쳤다.”
이때 일본군들은 뇌물로 칼을 즐겨 바치는 게 보여. 일본도. 왜구들이 중국과 고려 연안을 휘저을 때부터, 일본인들의 주무기는 두 손으로 잡고 휘두르는 살상력 높은 일본도였어. 오랜 내전, 그리고 무사들의 선호에 의해 개발되고 개선되고 개량돼 왔던 일본도는 한 번 휘두르면 사람이 동강날 정도의 괴력을 보여 중국, 조선의 공포의 대상이 된다고. 그 칼들이 뇌물로 바쳐지고 우군으로 알았던 명나라 장수 진린의 조카가 일본군 진영으로 가는 등등을 보면서 이순신의 심경은 고요하지 않았을 거야. 저 칼에는 조선 백성들의 피가 얼마나 묻어 있을 것인가.
일본군은 명나라 장수를 구워삶아 봐야 별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이순신에게도 매달린다. 이왕 끝난 전쟁이노 피를 더 보지 말고 끝내는 게 어떻소까.” 웃으면서 또는 절절하게 피를 더 보지 말자고 호소하는 왜군 장수 앞에서 이순신은 뭐라고 했을까. 원래 말이 없는 편이었던 이순신이 열변을 토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1년 전의 일기를 끄집어내 읽었을지도 모르지. 아들 면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쓴 통곡의 일기.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리하기가 보통을 넘어섰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서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서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을 수 밖에 없구나! 마음은 죽고 껍데기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난중일기는 시종일관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도 ‘분했다. 통분했다, 괘씸하다 흉하다’ 뭐 이 정도지만 가끔 인간 이순신의 감정선이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 보인다. 위 대목도 그렇지. 그는 셋째 아들 면을 유달리 아낀 것 같아. ‘네 형과 네 누이와 네 어머니’보다 더 애틋해하는 모습이 보이잖아. 그 와중에도 하늘이 시기할 정도로 영리했음을 깨알같이 밝히고 있고 전쟁 중 장수로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일이 혹시나 아들에게 해가 된 게 아니었나 탄식하고 있잖아.
아마 뇌물로 바쳐진 일본도를 보면서 그는 아들 생각을 했을지 모르지. 저 칼이 면의 목을 베었겠구나. 저 칼이 면의 가슴을 찔렀겠구나. 저 칼이 면의 배를 갈라 창자를 휘어 감았겠구나. 가지고 돌아가라.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고니시는 방법이 없었어. 진린에게 청할 수 있는 건 연락선이 통과하도록 눈감아 달라는 것 정도. 경상도 해역에 있던 일본군 장수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일본군 함대가 경상도로부터 진격해 와서 조선군을 격파해 주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지. 11월 18일 기록된 발포만호 소계남은 그 연락선들을 공격한 거였어. 한산도 앞까지 추격했다면 적의 연락선들이 경상도 해역을 무시로 드나들었다는 얘기고 일본군 함대는 이미 집결하고 있었어.
응원군의 좌장이 바로 시마스 요시히로. 후일 일본 근대화의 기수가 되는 사쓰마 번의 영주. 일본군 최고의 용장이라 할 그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 서부 경남 해안 일대의 일본군을 끌어 모은 500척의 대함대를 지휘해서 서진을 개시한다.
일본군을 실컷 공격하고 빼앗은 물건들을 명나라군에게 인터셉트당하고 돌아온 발포만호 소계남의 성난 얼굴을 보면서 이순신은 18년쯤 전, 자신의 발포 만호 시절을 떠올렸을 거야. 갑자기 자신의 근무지 발포에 전라 좌수사가 보낸 군관들이 들이닥쳐 오동나무를 베어 가려던 모습. 무엇에 쓰시려는 거냐고 묻자 거문고 만드신답디여 하고 돌아오던 대답. 기가 막혀 전라 좌수사의 명령이고 무엇이고 오동나무 또한 나라의 물건이다 썩 물럿거라 군졸들을 쫓아 보내던 자신의 모습 말이지.
거문고 뜯고 놀고 자빠진 좌수사, 또 거기에 밉보이자 발포에 결원 3명이 있다고 자신을 잡으려 들었던 그 다음 부임한 좌수사.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못된 상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구나 싶었겠지. 과연 명나라 군대는 끝까지 나를 이런 식으로 방해할 것인가. 그렇다면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까.
일단 순천의 고니시는 놔두고 응원하러 온다는 500척의 대함대부터 부숴야 했어. 조카 진문동이 고니시의 일본군 진영에 있는 이상 진린 역시 고니시보다는 응원군과 싸우자는 쪽에 호응할 것이었고 말이지. 일본군의 함대가 다가온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이순신은 하루 종일 함대를 시찰하고 튼튼한 배를 고른다. 진린에게도 판옥선을 주고 거기서 싸울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아마 어떤 예감이 있었을 거야. 마지막 대회전이 될 거라는.
이순신의 조카가 쓴 이충무공행록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이 출정 전 이순신이 이렇게 기원했다고. “"이 원수를 무찌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此讎若除 死即無憾)
물결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그 바다같이 흘렀던 조선인들의 피를 떠올리며, 그 피의 일부가 된 아들의 웃음을 애써 떨치며, 이순신은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간절함으로. 한없이 엄할 때는 엄했지만 의외로 잘 울기도 했던 사람이지. 남 보는 데선 아니어도 골방에 틀어막혀서 울고 토하고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던 사람이지.
마침내 음력 11월 18일 조선군과 명군의 연합함대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오는 길목인 노량을 향해 닻을 올린다. “가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이순신의 인간됨이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 이순신은 참.... 보기 드문 영웅입니다 우리 역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