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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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다르지 아니하니라 - <고전의 시선>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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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론이라면 지론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지구상에 발을 디디고 살아온 이후 지금까지 문명의 높이와 지식의 범위는 천차만별로 달라졌을지언정, 호모 사피엔스의 기질과 감정, 욕심과 행동 방식은 50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믿는다. “인간은 다 똑같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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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의 비석에 쓰여진 글귀,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지.”에 피식 웃으며 공감하게 되는 건 우리도 우물쭈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피라밋에 적혀 있다는 기성 세대의 탄식, “요즘 젊은 애들 왜 이러냐.”에 웃음을 터뜨리는 건 그 심정 이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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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로 남기지 못해서 그렇지 아마 공주 석장리의 구석기인이나 네안데르탈인들도 비슷하게 웃고 울며 슬퍼하고 기뻐하다가 정해진 수명 다 끝내고 자연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거듭 말하되 인간 사는 거 대충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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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아주 흥미롭게 전해주는, 그래서 역사란 박물관의 박제나 교과서의 죽은 활자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처럼 살아 숨쉬며 왁자지껄 좌충우돌 유유자적 안빈낙도의 다양한 삶의 총합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는 책이 있다.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송혁기 교수의 책 <고전의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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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그가 풀어놓는 옛 사람의 글들을 읽다 보면, 또 그가 슬쩍 ‘링크를 거는’ 오늘에 비추어 보면 절로 이런 말이 튀어나오게 된다. “참 사람 사는 거 똑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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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미국인의 사부곡(思婦曲)과 관련한 동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아내를 잃은 남편은 여생 내내 나무를 심었다. 수천 그루를 심었다. 사람들은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어느날 열기구를 타고 그 주변을 날던 사람 하나가 깜짝 놀랄 것을 발견했다. 그 숲은 하트 모양을 둘러싼 형태로 심어져 있었다. 즉 하늘을 바라보며 하트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의 아내에게 보내는 사랑 고백. 그런데 비슷한 로맨티스트가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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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조선 선비 심노숭은 아내와 금슬이 무척 좋았다. 둘은 고향 파주에 집을 마련하여 오순도순 살게 됐는데 그만 아내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고향 집 근처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심노숭은 유언대로 아내의 묘를 퍄주 집 근처에 쓰는데 묘 근처의 잡목들을 제거하고 나니 나무들이 듬성듬성해졌다. 그는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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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봄 가을마다 규칙적으로 나무를 심을 것이다.” (始自今至余未死).... 살아서 파주의 집에서 함께 살지 못했지만 죽어서는 파주의 산에서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으리라. 이것이 내가 새 산소에 나무를 심고 집에 심으려던 것들까지 품등을 살펴서 모두 산으로 옮기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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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없는 아내를 위해 생고생을 하며 나무를 심고, 집에 있던 나무들까지 옮겨 심으며 후손들에게 훼손하지 말라고 당부까지 하는 이 선비에게 입바른 말하는 친구가 어찌 없을까. 그는 이런 식으로 공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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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은 살아야지 임마. 응? 죽은 뒤에 뭘 하겠다는 거야. 죽은 사람이 뭘 안다고. 죽은 다음에는 지각이 없는데. (死而無知) 무슨 계획을 세운다는 거냐 (何計之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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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데...... 여기에 대한 심노숭이 했다는 대답에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죽으면 지각이 없다는 말,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네.” (是余所不忍也) 자신의 애틋한 마음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 아내와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 사실 자체를 견딜 수 없노라는 젊은 청상홀아비의 말이 흐는하게 마음을 적시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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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무릎에 심한 통증이 와서 병원을 다녔는데 여러 생각이 들었다. 몇 년 뒤에는 아내랑 신나게 여기 저기 돌아다녀야 하는데 이러면 안되지 않는가 하는 공포와 함께 이전에는 별로 닿지 않았던 생각들이 뭉개뭉개 피어올랐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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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이 아픈 건 곧 체중의 문제니 먹을 것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 먹을 것 중에 가장 안 좋은 건 술이니 있는 대로 마시지 말고 절제를 하자는 다짐, 나에게 맞는 운동은 무엇일까 하는 궁리도 들고 약속을 잡지 않고 집에서 책을 읽거나 문화생활을 즐기기까지 하니 잠시의 무릎 통증도 나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더란 말이다. 김창흡이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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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나이 예순 여섯에 앞니가 빠진다.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얼굴 비춰 보니 딴 사람 같다 하면서 눈물바람을 한다. 어디 그뿐인가 발음도 새니 책을 읽는데 ‘깨진 종소리’ 같다 하여 탄식이 하늘을 찌른다. 그러다가 김창흡은 이 빠진 것이 안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는 자신을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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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망가져서 차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발음이 부정확하지 침묵을 지킬 수 있으며 기름진 음식을 먹지 못하니 식생활이 담백해지고, 글 읽는 소리가 유창하지 못하니 마음으로 깊이 볼 수 있다. 차분해지니 정신이 편안하고, 침묵을 지키니 잘못이 줄어들며 식생활이 담백해지니 복이 온전해지고, 마음으로 깊이 보니 도가 응집된다. 손익을 따져보니 더 좋아진 것이 오히려 많지 않은가.” 아아 이 위대한 정신 승리의 현장. 조선 시대 사람도 이렇게 혁명적 낙관주의를 수행하며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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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소개된 24편의 글은 대개 그렇게 과거와 오늘을 넘나들면서 옛 사람들과 나를 친밀하게 엮어 주는 것들이다. 책을 읽다 보면 어이 술 한 잔 할 텐가? 하면서 말을 걸어 보고 싶디고 하고 “맞어 맞어” 하고 맞장구를 치게 되기도 하고 하하 그 놈 참 거....“하면서 혀를 차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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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익운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어느날 자신의 하인이 큰 뱀은 놓아 주고 작은 뱀은 죽여 버리는 걸 본다. 이유를 물으니 하인 왈 “큰 뱀은 영물이라서 앙갚음을 당할 수 있지만 작은뱀은 그럴 염려가 없지 않겠습니까요.” 이 말을 들은 후 성익운이 크게 내뱉는 통탄은 21세기 한국인들 거의 모두가 옳소 옳소 하며 발을 구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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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크게 악한 자는 그 큼으로 인해 힘을 지니게 되니 작게 악한 자만 죽임을 당한다..... 도척은 천수를 누리고 좀도둑은 찢겨 죽는다. 도륙한 이는 내버려 두고 베 두 필 훔친 자는 죽인다. 높은 벼슬아치가 소리 지르며 협박하면 힘없는 백성은 쓰러져 나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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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런 신문 기사가 났다. 절도범 한 명이 금수저 판사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당신도 똑같아! 나도 금수저 판사였으면 안 그랬다..... 대법원장, 판사는 누구 하나 저거(처벌) 하는 것 없고, (검찰이) 영장 청구해서 판사 조사하려고 해도 영장전담 판사가 ‘빠꾸’(기각)시킨다, 죄 없는 나같이 늙은 사람들만 오갈 데 없이 밥값, 약값도 못내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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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판사는 당신 감치시켜야겠다고 노발대발하고 “부끄러운 줄 알라.”고 소리질렀다고 한다. 물론 어디 대갓집 물방울 다이아도 아니고 비슷한 형편의 서민들을 턴 절도범을 두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판사가 판사의 범죄 수사를 위한 영장을 봉쇄하고, 기껏 한다는 일이 증거를 파쇄해 버려도 그래도 문제가 없다며 고개를 쳐드는 판에 절도범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고 할 수 있을까. “크게 악한 자는 그 큼으로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 조선 시대만의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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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단숨에 읽을 책이 아닌데 단숨에 읽었다. 그 문장들이 유려하기도 하였으나 이 다음에는 또 무슨 이야기들이 있을까 손이 먼저 책장을 서둘러 넘긴 탓이 클 것이다. 그러다보니 꼭꼭 씹어 피와 살이 돼야 할 문장들을 서둘러 배속에 넣어 버린 느낌이다. 이제 배는 대충 채웠으니 다시 한 번 찬찬히 이 옛 문장의 그득한 상차림을 즐겨 봐야겠다. 필시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를 것이다.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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