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영화의 내러티브적 비조화가 드러내는 지식의 탈정당성
1990년대부터 2010년대에 내러티브 형식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탐색해왔다. 내러티브의 비선형적 시간성은 작고 미세한 사건들로 이루어지며 주류 영화의 고전적 내러티브의 거대서사와의 차별성을 드러낸다. 홍상수 영화 내러티브는 언뜻 보기에 연속성 원칙에서 벗어난 불연속적 시간성을 빈번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한 서사 구조가 나타내는 인지 비조화감은 기존 연구들에서 논의한 바를 참조하자면 허구성 강한 모호성을 나타내서 관객에게 다층적 해석을 하게 만든다. 이러한 서사 구조의 특성에 대해 혹자는 퍼즐 맞추기 게임에 비유하기도 했으며 내러티브가 이끌어 내는 상상적 풍성함에 찬사를 보냈다.
장병원은 홍상수 영화 속 이야기의 복잡한 구조는 관객 경험을 조직하고 인지적으로 새로움을 주는 내러티브 구조라고 했다. 강유정은 내러티브 구조의 모호함과 서사적 기법은 <자유의 언덕>에나레이터의 진술의 모호성을 통해서 중의성을 통해서 하나의 표상이 둘 이상으로 해석이 가능한 루빈의 술잔처럼 애매한 형태를 띠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사시간의 모호성으로 인한 비조화감은 관객이 세계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갖도록 하려는 의도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홍상수 영화 내러티브가 관객에게 진정 의도하는 바는 인지적 비조화감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한 오늘날 서사의 새로운 형식일 것이다. 새로운 서사 형식의 구성으로 그가 내러티브적 시간성에서 유기적 이야기를 빚어내기보다 비조화감을 드러내는 방식을 선호함은 사람들의 진리 인식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나타내고 있다.
각 시대마다 내러티브는 당대 사회적 체제의 변화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해왔다. 영화 내러티브는 영화의 시간적 속성과 관련해서 재현의 문제를 끌어들인다. 영화는 시간적 속성들이 시간적 속성들을 재현하기 위해 사용된다는 점에서 변별적으로 진리에 대해서 홍상수 영화 내러티브가 나타내는 비조화감은 오늘날 진리에 대한 판단 기준이 변화했음을 드러낸다. 네트워크화된 기술중심의 정보 산업화 사회에서 사람들의 서사에 대한 판단은 근대와 크게 달라졌다. 이는 시간에 대한 인지 구조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 François Lyotard)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 이러한 서사적 시간성의 변화에 대해 적절히 설명하는 바가 큰 것으로 보이는데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세계는 형이상학적 거대담론 대신 여러 작은 이야기들로 채워진 세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상수 내러티브의 비선형적 서사는 작은 이야기들이 배열되어서 서로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특성을 보이는데 이는 리오타르가 말한 오늘날의 서사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의 언덕>(2014)을 중심으로 홍상수 내러티브가 프랑스 누보 로망 누보 시네마와 공유하는 지점으로 내러티브적 인지의 비조화감을 만드는 기법을 살펴보고 이러한 내러티브적 비조화감을 디지털 시대 영화가 내러티브적으로 데이터베이스적 욕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간주하면서 이러한 측면들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검토하겠다.
홍상수 감독이 일련의 영화들에서 인과성 없이 에피소드들을 배열한 것은 주류 서사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내러티브 구조는 하나의 이야기하기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대신 이야기 하기 자체에서 나타나는 특성에 주목한다. 홍상수 내러티브는 미시적 내러티브 구조를 나타내면서 다층적 시간성을 탐사해왔다. 이러한 내러티브적 성향은 영화가 서사적으로 다층적 시간성을 탐험하면서 관객에게 선악 판단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 양상을 나타낸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밤의 해변에서혼자>(2018)에서 내러티브는 자막을 기준으로 전반부 후반부의 두 에피소드들 로 나뉜다. 에피소드들 간의 경계로 활용해서 이야기 속 세계를 구별하는 방식은 에피소드들간의 관계의 모호성을 강조하게 된다. 중간 자막의 사용은 이전과 이후라는 구별을 형성하므로 내러티브적으로 전체 이야기를 단일한 시간성 아래에 두지 않는 불연속성을 전제로 한다.
에피소드의 구조가 아닌 영화들(<클레어의 카메라>(2017),<강변호텔>(2018))의 경우에도 영화 내러티브는 일방향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성격을 띤다. 진술을 논리적으로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의 특성은 전후 경계를 구별하지 않아도 미세한 에피소드적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이야기하기 방식에서 나타나는 비인과성은 종종 관객으로 하여금 전체 이야기를 비선형적인 것이라고 인지하게 한다.
그러나 전체 이야기는 선형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모호성을 띠면서 내러티브적으로 모호성을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즉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내러티브적으로 모호성을 드러내는 것 자체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하겠다.
디지털 시대 영화 내러티브적 변화를 연구해 온 마샬 도텔바움(Marshall Deutelbaum)은 홍상수의 <오! 수정>(2000)에는 ‘속임수적 기획(deceptive design)’으로 설명되는 특징이 나타나고 있으며 눈에 뜨이지 않는 방식으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일별했다. “현재로 설정된 시퀀스들 사이에 샌드위치로 끼여서 평범하지 않게 구조화된 홍상수의 <오! 수정>은 영화의 현재의 시간에서 전날 시작부터 인물들의 관계성을 두 번씩 전개한다.” 한편 이 영화를 주의 깊게 분석해보면 두 번 말하기가 완벽하게 일관성을 띠고 있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평가들은 장면들이 다른 날에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쨌든 우리는 장면들이 다른 날들에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숫자 ‘5’가 두 번째 파트의 유사한 시퀀스와 중첩되는 반면 숫자 ‘4’는 네 번째 파트의 시퀀스와 오버랩 되어 있다. 내부의 증거는 더욱이 장면들이 분리된 사건들임을 대리한다. 숟가락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테이블 위에는 접시들이 놓여 있었지만 포크가 떨어졌을 때에는 물 컵들, 커피 잔들, 담배와 재떨이만 놓여 있다. 더욱이 행위들은 서로 다른 식사의 단계들에서 발생하는 것만이 아닌데 종업원은 커플이 그곳에 자주 드나든다고 언급한 점은 이후의 장면은 나중에 일어난 사건임을 말해준다.”
반복의 명백한 차이들을 설명하는 시간적 단서들은 관객이 쉽게 눈치 채지 못하도록 미세하게 구성되었으며 드러나지 않게 내러티브적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이를 단절시키는 듯 보이는 방식으로 궁극적으로 내러티브의 해석에 대해 관객이 가지고 있는 신념을 해체한다. 내러티브 시간의 인지에 대한 관념 체계를 무너뜨리려는 의도로서 홍상수는 두 인물들 각각의 시점이 동일한 사건을 보는 식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속임수적 기법을 선택했다.
이러한 방식에 대해서 혹자는 관객에게 현실을 과장해서 보여주고 내레이터를 스스로를 연민하는 주체로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작가가 일부분에 불과한 현실의 한 조각을 과장하는 것을 왜곡된 것으로 여기는 측면은 혹시 근대화의 부정적 결과가 아닐까? 어쨌든 관객 각자에 따라 독해는 다를 수 있겠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스스로를 연민하는 주체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홍상수 영화의 해체적 내러티브는 자기 연민을 드러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면서 전통적 이야기하기 구조의 억압적 체제를 해체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 내러티브는 리오타르가 말한 포스트모던 시대의 거대서사의 붕괴 이후 나타난 미시 서사의 특성을 나타내면서 디지털 시대 컴퓨터적 서사성을 나타낸다. 이는 내러티브적으로 전체적인 구조를 세우기 보다는 세부적 요소들, 부분들 간의 관계성에 초점을 두게 하는 것으로서 종종 에피소드들의 유사성과 차이를 비교 대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홍상수 영화에서 내러티브가 무엇과 무엇 사이에 나타내는 차이에 주목하는 관계성을 띠면서 반복과 변주로 나타나는 차이를 이야기하게 하는 것은 관객이 스토리를 자유롭게 해석하게 하면서 현실에 대한 분석적이고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장점은 참과 거짓에 대한 정당성 대신 모호성을 취하면서 가치 판단 체제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비판의 소지도 있겠지만 서사의 중립적 성향은 앞서 논의한 비판적 사고를 여는 장점을 고려할 때 문제시되지 않는다.
홍상수 내러티브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띠는 이중적 시간구조로써 내러티브적 미학을 추구해왔다. 내러티브 구조는 무엇인가를 의미하려 하기 보다는 에피소드들 상호간의 관계성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에피소드들 간의 차이를 나타내서 관객의 혼란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관습적인 시간 인식을 거부한다.
리오타르가 말하듯이 오늘날 기술의 변화가 지식에 대해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컴퓨터는 인간 지각체계를 바꾸고 있다. 컴퓨터가 하나의 특정 논리 및 그 논리에 맞춰 어느 진술이 지식 진술인지를 결정하는 규범체계가 나타났다 .<오! 수정>에서 사건의 반복은 참 거짓과 거리가 먼 인지적 규범 체계를 나타낸다. 이를테면 수정의 입장에서 상기한 기억들과 재훈의 입장에서 본 좋은 날의 기억들 간에는 모종의 괴리감이 나타난다. 어쩌면 의도, 어쩌면 우연적인 사건들이 수정에게는 어쩌면 의도적인 사건들로 자연스럽게 전환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관련 없는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들을 관습적으로 연결해서 정해진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영화는 퍼즐의 비어있음을 드러내면 보이면서 고착된 심리적 습관으로서 구축된 이미 세워진 것들의 모순성을 드러낸다. 플롯을 구성하는 대신 관객의 심리를 교란시키는 방식으로 무엇인가 정해진 것이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다.
홍상수 영화의 내러티브에서는 컴퓨터가 여러 부분들을 비교, 대조하듯이 관계성의 눈에 보이지 않는 힘들을 잡아내는 방식이 중요시된다. 자신이 본 정보의 조각들을 매뉴얼대로 조립하고 추측하는 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비교를 통해 관계를 사유하게 한다.
홍상수 영화 내러티브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거대서사의 담론구조로 다루지 못했던 세부적인 부분들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3장에서는 이러한 내러티브적 스타일이 1960년대 프랑스 누보로망 작가들의 누보시네마의 어법과 일맥상통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음에 대해서 논의하겠다.
일종의 실험 소설인 누보로망은 언어의 모험으로서 의식의 흐름의 서술이나 2인칭 소설, 객관적 사물 묘사의 철저함과 같은 특징을 나타냈다. 독자는 주어진 텍스트를 자신이 조합해서 추리하면서 이야기와 주제를 구축해 나간다.
알렝 로브-그리예, 마그리트 뒤라스, 알렝 레네는 누보로망과 누보시네마의 주축을 이루는 소설가이자 영화감독들이었는데 이들의 내러티브는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누보 시네마 작가들이 주류 영화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설과 영화의 서사의 어법을 혁신했던 시도와 같은 특질을 나타낸다.
뮈르시아에 의하면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학적 허구의 잠재성은 자명성이기도 한 반면, 영화적 허구의 잠재성은 그처럼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데 이것은 움직이는 이미지의 프레그넌스( pregnance, 기억, 지각에 대한 강한 호소력)가 환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영화 이미지의 가장된 물질성은 어떤 현실을 제공하는데, 누보 시네마는 이같은 현실을 벗어나거나 변형시킴으로써 사실주의적 관례를 파괴하게 된다..
홍상수 영화는 현실을 벗어나거나 변형시킴으로써 사실주의적 관례를 파괴하는 누보 시네마와 공유하는 지점이다.
소설에서 초점화의 부재를 나타내는 것은 발자크 소설의 전지전능에 해당하는 화자에게 무한한 투사력을 선사하는 경우와 같이 완전히 비현실적이면서 결국 관례에 의해 길들여진 이 초인적 시점을 나타낸다. 아는 화자가 허구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나 혹은 몇몇 인물로 시야를 제한함을 원칙으로 하는 내적 초점화에 의해 화자는 인물의 의식과 감정, 감수성, 숙고, 환상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직접적인 내적 독백이나 1인칭 서술은 내면의 화법의 탁월한 형태들이다. 이러한 시점은 영화에서 장치의 본질 자체에 속한, 로브 그리예가 명시한 바 있는 이유들 때문에 다른 식으로 제기된다.
한편 홍상수 내러티브는 전통적 영화 서사가 잠가놓은 시간의 빗장을 푸는 방식들, 예컨대 진술에 대한 불인정이나 반복의 기법을 사용해서 누보 시네마처럼 이야기의 선형적 시간성을 해체하는 환영적 시간성을 나타낸다. 누보 시네마의 진술 번복의 예로 알렝 레네가 <지난 해 마리 앵바드에서>(알렝 레네, 알렝 로브-그리예 공동 연출, 1961)에서 비인과적 사건들의 반복과 유사한 시간의 층들을 구성하는 방식은 홍상수의 영화들에 자주 등장하는 시간의 반복과 유사성을 띠고 있다. 이는 레네의 영화가 들뢰즈가 말한 ‘뇌의 영화(cinéma de cerveau)’로서 기억에 대한 인간의 회상 능력을 드러내는 측면이다.
<자유의 언덕>에서 작은 이야기들이 흩어진 편지의 낱장처럼 파편적으로 보여지는 방식은 들뢰즈가 말한 ‘현재의 첨점들(les pointes du présent)’을 나타나는 동시적 현재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시-공간적 좌표들이 자신들의 현실성을 유지하면서, 상상적인 것과 갈등관계를 이루는 방식으로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현실태적인 것과 잠재태적인 것 사이의 구별을 통해서 하나의 이미지 내에서 항상 행하면서, 그와 동시에 이 구별을 역전 가능하며 식별 불가능한 것이 되도록 한다. 구별할 수는 있지만 식별 불가능한 이미지들이 행동-이미지의 화해로 나타나는 것이다. 행동-이미지의 와해 결과 “때로는 ‘시간의 건축’에 유용하고, 때로는 시간성으로부터 단절된 영원한 현재, 즉 시간으로부터 소외된 구조에 유용해진다. 여기에서, 영원한 현재들의 회상-이미지들을 환기하게 된다.
<지난해 마리 앵바드에서>에서 인물의 진술을 통해서 기억이 일직선상의 점으로 위치지어지지 않는 측면이 드러난다면 <자유의 언덕>에서는 몽타주와 이미지들 간의 비조화감을 형성하는 간격의 구성이 인간 기억의 한계점을 드러낸다.
<자유의 언덕>의 내러티브와 일견 유사한 듯 보이는 <지난 해 마리 앵바드에서>의 어법은 인지적으로 관객이 이야기의 일관성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들면서 의도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간성을 구성하고 있다. 이때 중심에서 부상하는 것은 이야기의 중심이 부재하는 주변적 사건들로서 이들이 중요한 사건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미시 서사가 추구하는 것은 참도 거짓도 아닌 불확정한 시간성이다.
홍상수의 작가적 스타일을 구축하는 미시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결국 어떤 해석도 할 수 없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지난 해 마리앵바드에서>에서 X의 진술이 여자(델핀 세리그 분)의 부인을 끌어당기는 과정은 결국 진실과 거짓에 대한 판단을 모호하게 하면서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X는 작년 마리앵바드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여자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남자는 계속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요구한다. 그는 사진과 익명의 휴양지 호텔의 일을 이야기하지만 그녀의 기억은 그러한 곳에 간적조차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X의 강박적인 태도는 일견 그의 진정성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하지만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관객은 다만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여자를 유혹하려고 있지도 않은 일을 기억하라고 강요한 것이라는 책망감과 여자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는 의혹이 상충하면서 일련의 생각들이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이 영화의 서사는 결코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지 밝히지 않은 채 끝맺는다.
한편 <자유의 언덕>에서 감독은 내러티브적으로 고유한 방법으로 간격을 구성해서 이러한 모호성을 형성한다. 예컨대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 사이의 비조화감을 형성하는 간격 혹은 숏의 임의적 배열로 관객의 내러티브 인지의 비조화감을 형성하는 간격이 그러하다. 청각적 정보와 시각 이미지의 불일치로 인간 기억의 모호성을 드러낸 사례는 이 영화의 시작에서 어학원에서 편지를 받아 읽는 권과 모리의 보이스 오버가 겹쳐서 나오다가 모리가 화면에 보일 때 모리의 보이스 오프가 편지에 적힌 내용을 연결하는 두 장면의 연결 방식에서라고 하겠다. 보이스 오버가 보이스 인으로 이행한 후부터 내러티브적 시간성에는 비조화감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이야기를 진술하는 편지의 서술자이자 영화의 나레이터로서 모리의 목소리는 화면에 보여지는 사건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시각적 이미지가 앞서 전제된 청각적 이미지와 불일치하면서 기만적으로 혼란을 효과를 유발하는 것으로 관객은 이러한 인지 방식으로 인해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외부 액자의 전지적 서술자로서 권의 시점과 내부 액자의 서술자로서 모리의 시점 사이의 균열이 일어나는 것은 이 두 세계가 일관성 있게 연결되지 않음을 나타낸다. <지난 해 마리앵바드에서>가 말의 이미지로 비조화감을 형성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영화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대신 관객에게 복잡한 시간성 자체를 지각하게 한다.
한편 <자유의 언덕>의 내러티브가 액자 구조를 근간으로 해서 두 번째 에피소드가 첫 번째 에피소드를 변주, 반복하는 것은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뒤라스적 글쓰기의 묘미라 할 미정 아빔의 구조가 반복의 문제와 연결되는 방식과도 유사성을 공유한다.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에 나오는 여러 반사기호들은 영화를 반사적 비전 혹은 반사 구조로 분명하게 특징짓고 있는데 프랑스 여인과 일본 남자의 사랑 이야기는 회상씬에서 여인이 느베르에서 독일 병사와의 옛사랑을 기억하는 것과 연결이 되면서 과거 느베르의 인물들과 두 사람을 동일시한다. 반면 홍상수 영화의 경우 미정 아빔 구조의 구조는 단순히 반사가 아니라 비조화감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처럼 비조화감을 나타내는 이야기 구조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홍상수 영화가 누보 시네마와 유사성을 띠면서도 차이를 나타내는 부분이다. 홍상수 영화는 외부 세계, 즉 모리의 편지를 읽는 권과 내부 세계 이야기들 즉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면서 권을 기다리는 동시에 영선과 만나는 모리의 이야기 사이의 비조화감으로 누보시네마의 모더니티의 자기 반영성과 다른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자유의 언덕>이 내러티브적으로 인지적 부조화를
창출하는 것은 관객의 논리적 해석을 차단하는 것이며 영화의 이중 액자 형식의 모순됨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내부 액자 속 모리가 아니라 외부 액자 속 권이 서사의 중심에 위치하는 구조지만 실은 권은 아무런 의미도 나타내지 못하며 다만 영화의 허구성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등장한다. 권은 시작에서 영화 전체를 관장하는 중심 서술자로 설정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권은 탈중심화 되면서 전체 서사의 중심에서 사라져 버리면서 내부 액자에 대해서 아무 연관성이 없는 외부 액자의 허구적 인물로 전락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인지적으로 영화의 내러티브가 비조화감을 생성해내는 어법은 관객이 더 이상 어떤 진리 체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공고히 할 수 없도록 하고 해석이나 인과적 추측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게 한다. 이 영화의 비조화적 내러티브 기법이 궁극적으로 겨누는 것은 이야기하기로서가 아니라 일관성 있게 이야기하기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구조라 할 수 있다. 이야기를 하는 방식 자체에 대해서 다루는 것을 의도로 삼고 있는 내러티브는 포스트모던 서사의 특성을 드러내면서 이러한 체계화된 형식의 부조리함 자체를 비조화를 통해서 드러내 보인다.
이는 모더니즘 서사와 구별되는 포스트모던적 서사의 특성으로서 리오타르는 컴퓨터가 지배하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대서사는 어떤 통합 양식을 사용하든, 관계없이 그리고 사변적 서사인가 해방서사인가 하는 문제와 무관하게 그 신뢰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서사의 쇠퇴는 이차 대전 이후 꽃피운 기술의 효과로서 기술은 행위의 목적에서 수단으로 그 강조점을 이동시켜 버렸다. 홍상수는 영화가 일관성 있는 진술하기 자체를 거부하는 한편 여러 잠재적 가능성들로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리오타르의 탈정당화론을 상기한다. 즉 홍상수는 내러티브를 통해서 실제 상황을 묘사하는 진술이 진리라고 해서 그 진술에 기초한 규범적 진술 역시 정당할 것임을 증명할 수는 없음을 말하고 있다.
홍상수는 영화에서 내러티브적으로 소설과 영화의 어법을 실험한 프랑스 누보시네마처럼 진술을 번복하는 경향을 나타내서 실제를 진술하는 것이 규범적으로도 정당하다라는 고정된 관념에 도전한다. 리오타르가 권력에 의한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과학적 논증을 통해서 고찰하였듯이 홍상수 영화는 내러티브의 비조화적 시간성을 통해서 이를 모색해왔다.
오늘날 거대서사의 붕괴 이후 포스트 모던 시대의 영화들이 탈중심적 재현으로 복잡한 세계를 미시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은 이야기하기 자체에 대한 고민을 반영한다. 홍상수 영화의 내러티브는 오늘날 보편타당한 논리나 교훈보다 파편적 이야기하기 방식이 선호됨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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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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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원,「홍상수 내러티브 영화의 비조화 패턴 연구」,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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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shall Deutelbaum, ‘The Deceptive Design of Hongsangsoo’s virgin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New review of film and television studies, 2006.
자유의 언덕
홍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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