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한 스티미언 : 게임] 내 인생 최고의 게임, 스타크래프트

in #kr-funfun7 years ago

 
컴퓨터 게임은 한동안 삼국지 시리즈 한 우물만 팠어요. 어렸을 때부터 삼국지 이야기를 워낙 좋아해서 게임 속에 삼국지의 인물과 역사적 사건들이 녹아있어서 좋았어요. 물론 게임도 충분히 재미있었고요.

잠깐씩 디아블로, 워크래프트,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등의 새로운 게임을 하기도 했지만, 삼국지 시리즈에 길들여진 나를 바꾸진 못했어요.

PC방이 전국을 휩쓸던 어느 날. 급하게 이메일을 보내야 해서 피시방에 처음으로 들어갔어요. 볼일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대부분의 모니터에 비슷한 화면이 보였기 때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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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게임 스타크래프트를 만나다.

 
헤드셋을 끼고, 왼손으로는 키보드를 타닥타닥, 오른손으론 마우스를 휘릭휘릭, 화면에 빠져들 듯이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중고딩들이었지만, 직장인 차림도 많이 보였어요.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도 신기했고, 게임 화면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어요. 그때까지 피시방에 한 번도 가지 않았던 나는 얼마 후... 피시방 죽돌이가 되어버렸어요.

1999년 12월.
연말이라서 마무리 지어야 할 업무로 바빴고, 송년회 등의 모임도 많았고, 세기말의 분위기로 어수선했던 와중에, 스타계에 입문했어요.

스타를 시작하고 3~4달 동안. 그야말로 식음을 전폐하고 게임만 했어요. 회사 근처 피시방에서 기숙을 하다시피 했어요. 잠깐씩 사무실에 가서 업무를 처리하고, 출장을 핑계로 도망 나와 피시방에서 살았어요.

집에도 2일에 1번 꼴로 들어갔어요. 예전부터 바쁠 땐 회사에서 밤새우는 게 흔해서 마눌님은 고생한다며 안쓰러워할 뿐 딴짓하는 걸 의심하지는 않았어요.

21세기의 첫 봄을 맞이한 어느 날.

 
드디어! 피시방에서 함께 게임을 하던 고딩들을 모두 물리쳤어요.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던 알바까지 꺾었어요. 그렇게 단골 피시방의 짱이 되었어요. 그동안 스타를 배운답시고 알바들 입으로 들어간 짜장면이 몇 그릇이며, 치킨에 소주는 또 얼마였던가... 지난겨울의 일들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군요. 이후 알바가 복수를 위해 데리고 온 친구들까지 꺾고, 회사 근처의 다른 피시방으로 도장깨기를 다녔어요.

이 피시방 스타 짱이 누구야! 나와!

그 당시 직장이 성동구민회관 근처에 있었어요. 결국, 여름이 오기 전에 왕십리역에서 구민회관 쪽 블록의 피시방을 모두 평정하게 되었어요. 피시방 사장들과도 친했고 고딩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며 스타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어요. 생각해 보세요. 30대 초반의 아저씨가 중고딩들에게 둘러싸여 게임을 하는 모습을...

철길 너머에 한양대가 있었어요. 사근동 먹자골목에서 회식을 하고 술에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로 피시방에 갔다가 게임 인생 최대의 패배를 맛보게 되었어요.

3대 빵. 아무리 음주 스타라고 변명하더라도 치욕스러운 패배였어요. (나중에 친해지긴 했는데, 그 친구는 한양대 짱으로 세미프로의 실력이었어요)

왕십리 짱이 한양대 짱에게 발렸단 소문이 돌아 창피하기도 했고, 그 당시 한창 기승을 부리던 맵핵 때문에 흥미를 잃기도 했고,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기도 해서... 파란만장했던 스타계를 떠났어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스타크래프트 온라인 동호회 활동을 하다.

 
2002년 봄.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로움과 익숙함이 주는 무기력을 털어내기 위하여, 다시 스타를 시작했어요.

30대 중반의 나이로 피시방에서 놀기는 좀 그래서, 주로 집에서 게임을 했어요. 그러다 온라인 동호회 하나를 알게 되었어요. 나와 같은 30대 직장인들로 구성된 스타크래프트 전국 길드였어요.

길드 안에 지역별로 수십 개의 소모임 클랜이 활동하고 있었어요. 전국 정모에는 1백여 명이 모일 정도로 활발한 동호회였어요. 대부분 직장인이었고 자영업자들도 많아서 스타크래프트의 성지인 코엑스 메가웹스테이션을 통째로 임대해서 자체 게임리그를 벌일 정도로 화끈한 동호회였어요. 또한, 부산에서 올라온 영웅토스 박정석과 전북에서 올라온 괴물 최연성을 비롯한 프로지망생을 후원하기도 하여 스타계와도 이래저래 인연을 맺고 있었어요.

동호회의 게임은 주로 팀플을 하였어요. 특히 2:2 팀플은 프로들에게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어요. 박정석의 물량토스는 우리 동호회에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팀플전의 초반 콘트롤과 중반 물량전은 정말이지 볼만 했어요.

나는 예전에 테란과 저그를 중심으로 개인전만 했기 때문에 플토 중심의 팀플에 적응하기는 힘들었어요. 하지만, 게시판에서는 나름 유명하긴 했어요. 소모임 활동을 열심히 하였고, 1주일에 두어 번씩 번개를 때리고, 다른 소모임의 번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거든요.

서울에서 야밤에 홈피 게시판 댓글이나 스타 채널방에서 노닥거리다가... 부산에서 아침을 먹고 광주에서 저녁을 먹을 정도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회원들과 만났어요. 직장 생활에 소홀하여 근평도 나빠지고 돈도 많이 쓰긴 했지만, 그때만큼은 정말 행복했어요.

그렇게, 온ㆍ오프라인에서 자주 만나다 보면... 마음이 통하는 이들도 생기게 되고, 그들과 좀 더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어요.

어느 날. 채널방에서 게임도 하지 않고 채팅을... 그것도 이성과의 야릇한 채팅에 몰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어요. 미몽에서 깨어나 듯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날로 6개월 정도 미쳐 지냈던 동호회에 발길을 끊었어요, 죽고 못 살던 회원들과도 연락을 끊었어요, 마침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번호도 바뀌었어요. 이후로 지금까지 스타를 한 번도 하지도 않고 보지도 않았어요.

20대에는 삼국지 시리즈에 미쳤고, 30대에는 스타크래프트에 미쳤어요. 왜 나란 놈은 앞뒤 재지도 않고 쉽게 미치는 걸까요? 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적당하게 즐기지 못하는 걸까요?

40대에는 어땠을까요? 철이 좀 들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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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동호회 활동까지 하셨을 정도면 열정 대단하셨네요.ㅎ
pc방 가면 다들 스타만 하던 시절이 있었죠.ㅎ
저는 스타말고도 디아블로 무지하게 했답니다.ㅎ

디아블로 1도 참 잘 만든 게임으로 기억합니다.

ㅎㅎ 초등학교 6학년때 친구들하고 피시방가서 스타했던 기억이있어요! 그때 1시간에 천원했는데 요새랑 요금은 비슷한거보면.. 신기하기도해요ㅋㄷㅋㄷ

피시방에 가본지도 10년이 넘은 거 같네요. 아직도 인가요? 그래도 운영을 하는 것을 보면 진짜 신기하네요.

동시대를 살면서 같은 주제를 향수 할 수 있는 좋은 글 이었습니다.

그립네요 그시절 ㅎ

추억은 아름다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