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와 도덕경 진리는 처음엔 조롱을 받는다와 비트코인의 현재 처지

in #arthur7 years ago

쇼펜하우어 진리는 처음엔 조롱을 받는다와 비트코인의 현재 처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독일어: Arthur Schopenhauer, 독일어 발음: [ˈaɐ̯tʊɐ̯ ˈʃoːpənˌhaʊ̯ɐ]) 1788년 2월 22일 ~ 1860년 9월 21일)는 독일의 철학자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칸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게 계승했다고 확신했다. 당대의 인기 학자였던 헤겔, 피히테, 셸링 등에 대해서는 칸트의 사상을 왜곡하여 사이비이론을 펼친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쇼펜하우어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철학(인식론)의 고전이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 때부터 수년 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쓰기 시작하여 1818년에 출간하였다. 대학강의에서 헤겔과 충돌한 후 대학교수들의 파벌을 경멸하여 아무런 단체에도 얽매이지 않고 대학교 밖에서 줄곧 독자적인 연구활동을 지속하였다. 이후 자신의 철학이 자연과학의 증명과도 맞닿아 있음을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주장했다. 그 뒤에 윤리학에 대한 두 논문을 묶어 출판하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출판된 지 26년이 지난 1844년에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이후 <여록과 보유>라는 인생 전반에 관한 수필이 담긴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쇼펜하우어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쇼펜하우어는 1820년 대에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 힌두교와 불교에 관해 알게 되었다. 이 종교들의 핵심교리 속에 자신과 칸트가 도달한 결론과 같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먼 과거의 동양 사상가들이 서양과는 전혀 다른 환경, 언어, 문화 속에서 근대적인 서양철학의 과제에 대해서 같은 결론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발견을 쇼펜하우어는 글로 써서 남겼고 서양에서 최초로 동양철학의 세련된 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쇼펜하우어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간의 유사성을 말한 철학자이자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독창적인 철학자로 손꼽힌다. 19세기 말에 유행하여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쇼펜하우어는 인식에서의 선천성에 대한 칸트의 발견을 형이상학에서의 위대한 역사적 업적이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대해서는 칸트의 철학에서 설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직관이 주어진다고 할 뿐 그것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않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칸트가 인과법칙을 직관과 무관한 오성의 원칙으로 간주했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외부사물이 인과법칙의 적용 이전에 이미 지각된다고 생각함으로써 결론적으로 경험적 직관의 성립을 전혀 설명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과법칙의 선천성에 대한 칸트의 증명도 객관적-경험적 직관 자체의 가능성으로부터 도출하는 유일한 증명방법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박사논문 23절에서 인과개념의 선천성에 대한 칸트의 증명을 다음 세 가지 논점을 통해 비판한다.
첫 번째, 쇼펜하우어의 주장에 따르면 지각의 계열은 모두 사건이며 인과법칙에 관련되지 않고도 객관적 계열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집에 대한 지각과 강을 따라 내려오는 배에 대한 지각에서 지각의 계열은 바뀔 수없는 객관적 사건인 반면에, 집에 대한 지각에서 그 계열은 자의적으로 규정되므로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두 경우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집에 대한 지각과 강을 따라 내려오는 배에 대한 지각은 모두 주관에 의해 그런 것으로서 인식된 실재적인 객관들의 변화에 대한 인식이므로 객관적 인식이라는 것이다. 유일한 차이는 배에 대한 지각에서 변화는 강과 배, 두 물체간에 일어난 것이지만 집에 대한 지각에서는 변화가 관찰자 자신의 신체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관찰자의 신체도 객관적 물체계의 법칙에 놓여있는 것이므로 배에 대한 지각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신체의 움직임도 경험적으로 지각된 한 사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두 인식 모두 객관적 물체계의 법칙에 놓여있는 두 물체의 서로에 대한 위치의 변화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사건이냐 아니냐는 점에서 내가 한 무리의 군인들 곁을 지나가든 그들이 내 곁을 지나가든 어떤 차이도 없듯이, 관찰자의 눈이 지붕에서 바닥으로 움직이는 것과 바닥에서 지붕으로 움직이는 것은 둘다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경험적 직관의 계열이 다른 객관들의 작용의 계열에 의존하므로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즉 경험적 직관의 계열은 모두 객관들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주관의 자의와 독립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주장이 결과적으로 표상들의 계열을 주관적 표상들의 변화로부터 구분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칸트의 표상들의 어떤 계열도 현상의 변화로서 단순한 주관적 표상들의 변화로부터 구분되지 않고, 오직 인과법칙을 통해서만 변화의 객관성이 인식된다고 주장했으므로, 이 주장으로부터 우리가 시간 속에서 원인과 작용의 연속을 제외한 어떤 연속도 객관적인 것으로서 지각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각된 다른 모든 현상의 연속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우리의 자의에 의해 그렇게 규정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현상들은 서로로부터 결과로 발생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서로서로 뒤따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변화는 정확히 원인의 대열의 연속에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연속에서 지각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연속의 객관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환상의 연속과 같이 자의에 의존하는 주관적 연속과는 전혀 다르다고 쇼펜하우어는 강조한다. 예를 들어 내가 집 문 앞에 서자마자 지붕에서 벽돌이 떨어져 나에게 맞은 경우에 벽돌의 떨어짐과 내가 걸어나옴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결합도 없지만, 나의 각지에서 객관적으로 정해진 계열은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악소리의 계열이나 낮과 밤의 계열도 원인과 작용으로 파악되지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정해졌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인과론이 이와 같은 객관적 계열을 환상과 구분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를 통해 습관에 의해 인과관계가 형성된다는 흄의 가설도 논박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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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칸트에 따르면 모든 표상의 객관적 실재성은 시간관계의 어떤 특정한 질서에서 그 표상의 위치를 인식함으로써 가능하다. 칸트의 주장과 같이 계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모두 실제로 인과율에 대한 지식에 의존한다면, 인과법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불가능할 정도로 광대한 것이어야 할 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인과 작용의 대열에서 우리가 그 위치를 인식하는 표상들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객관적인 것을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실재적인 객관들을 환상으로부터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을 통해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주장을 반박한다. 원시사회에서 사람들은 천체운행의 법칙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낮이 밤을 따른다는 것을 알았듯이 시간계열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이 인과법칙에 대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우리 인식의 선천성에 대해 지나치게 몰두함으로써 인과법칙의 선천성과 필연성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칸트의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계열의 현실성을 오직 그것의 필연성으로부터 인식할 것이지만, 이와 같은 인식은 원인과 작용의 모든 대열을 동시에 포괄하는 전지적인 오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박사논문 34절에서 당대의 강단철학자(헤겔)이 주장하는 이성능력, 즉 '초감각적인 절대자를 인식하는 이성능력'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비판한다. 이성은 감각이 제공하는 재료를 개념화하고 추론하는 능력일 뿐이지, 결코 인식의 재료를 스스로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식에 있어서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선천적인 것은 인식의 형식에 제한될 뿐,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 형식이 외부의 재료에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 외부에 대한 객관적 직관의 형식으로서 우리 안에 있으며 인과법칙이 오성의 형식으로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의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는 인식의 내용을 근원적으로 자신으로부터 제공하는 이성이라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표현에 따르면 헤겔같은 하찮은 철학교수들이 지어낸 망상적인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무(無)로부터 세계를 산출한 인격적 신을 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교수들의 시도는 칸트의 이성비판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강조한다. 그 누구도 칸트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으므로 학자들이 내세운 신의 현존에 대한 증거들이 완전히 힘을 잃게 되었으며, 철학교수들도 사변신학의 증명들을 경시했으나, 야코비가 발명한 "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하고 신이 세계를 창조한 방법을 선천적으로 구성하는 이성능력"에 의해 칸트의 이성비판의 본래적 의미가 왜곡되고 말았다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헤겔같은 철학교수들이 일치단결하여 내세우는 엉터리 이론을 공부하는 대학교의 젊은이들이 인생을 낭비하는 것과 헤겔같은 철학교수들에 의해서 칸트의 철학이 엉뚱한 내용으로 변질된 것을 쇼펜하우어는 매우 한탄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정언명령이 "이념(Idea 철학용어로서의 이념을 말함)을 직관하는 이성"이라는 허망한 개념의 탄생 계기를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언명령은 이율배반 및 도덕신학과 함께 칸트철학의 본래적인 깊이를 알지 못하고, 그 표피만을 아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서 칸트 자신은 그것들을 결코 사실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칸트의 이성비판이 유신론에 대해서 지금까지 감행된 것 중에 가장 강력한 공격인 반면에, 칸트의 이성비판이 불교국가에서 나타났더라면 그 국가의 종교적 입장과 그것이 조화로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불교는 유럽 그리스도교와는 다르게 명백히 무신론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파악한 불교에 따르면 가시적 천체의 시작은 누군가의 창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빈 공간으로부터 일관성있고 불변하는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났다. 따라서 불교의 체계에서는 어떤 원초의 신적인 창조의 이념이 발생할 수 없고, "세계와 모든 사물을 창조했고 유일하게 숭배될 만큼 존엄한 초월적 존재가 있다"는 학설이 가장 심각한 이단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창조에 대해서도 별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세계는 준엄하며 불변성을 지닌 자연법칙에 따라 발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운명과 같은 것이 불교도들에게 신적인 원리로 숭상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불교의 체계에서는 어떤 원초의 신적인 창조의 이념도 발생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저절로 생겨났으며, 자연의 이치가 그것을 퍼트리고 다시 거두어들인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는 독일 학자들의 책에서 일반적으로 종교와 유신론이 동의어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비판한다. 유대교와 유신론만이 동일할 뿐이므로, 유신론은 종교의 한 종류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계 창조자로서의 신에 대한 인식은 유일하게 유대교에서만 주장될 뿐, 고대의 종교나, 최근의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 정확히 말하려면, 무신론 대신에 비유대교라고, 무신론자 대신에 비유대교도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도교와 유교도 무신론적이라는 점을 쇼펜하우어는 지적한다. 유신론의 유일한 토대는 어떤 인간적 승인도 필요로 하지 않는 '계시'지만, 철학에서 시도되어야 할 것은 자신의 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진리를 찾아가는 것임을 쇼펜하우어는 강조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비합리성과 직관을 강조한 근대의 독창적인 철학자로서 한 시대에 유행하는 철학을 완전히 거부하고 파벌에서 탈피하여 고독한 학자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진정한 철학자가 할 일이란 그 어떤 결과에 도달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오로지 침착하게 이성의 빛만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필자가 보기에 볼테르는 공자, 장 자크 루소는 노장 사상을 베꼈듯이 쇼펜하우어도 피카소의 “훌륭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도용한다”는 말처럼 불교를 서양에 소개하고 베껴온 것이라고 본다.

쇼펜하우어의 가장 유명한 명언이 있다.“Every truth passes through three stages before it is recognized In the first it is ridiculed, in the second it is opposed, in the third it is regarded as self-evident” “모든 진리는 그것이 인식되기 전에 3단계를 거친다. 처음엔 조롱을 받고 다음엔 반대에 부딪치다가 결국은 自明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필자는 쇼펜하우어가 불교의 사상을 받아들여 염세주의자로 오해받는다고 여겨졌는데 노자 도덕경을 읽어봤음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도 에밀에서 노자 도덕경 사상을 몰래 차용해서 썼음을 알수 있다.
노자(老子) 도덕경 제41장 上士楣 勤而行之(상사미근이행지) 최상의 사람은 도를 들으면 힘써 이를 행한다. 楣(문미 미; ⽊-총13획; méi)
中士楣 若存若亡 (중사미 약존약망)중간의 사람은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下士楣 大笑之 하급의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不笑不足以爲道(불소부족이위도) 남들에게 비웃음을 당하지 않으면 도라고 하지 못한다.

필자는 블록체인 기술이 많은 비트코인이 道도이며 바로 진리라고 생각한다. 비트코인이 처음 나왔을때만 해도 소꿉놀이에서 아이들이 장난하는 것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다. 즉 소꿉놀이에서 아빠 엄마 놀이를 하고 가짜 음식물을 먹듯이 그냥 자기네들끼리 노는 것으로 여겨졌다.
비트코인은 사기니 피라미드이니, 튤립 버블이니, 누가 비트코인을 믿고 거래하는가? 사는 사람이 바보다, 폭탄 돌리기다 이런 우습다는 평가를 받았다. 심지어 예전에 사이월드 도토리 취급을 받고 조삼모사하는 사기꾼 스멜을 풍긴다고 여겼다.
하지만 현재 비트코인은 달러와 금을 뛰어넘는 세계에서 가장 유망한 시장이 되었다. 심지어 한국의 빗썸이란 회사 하나 거래량이 이미 코스닥 시장의 거래량을 뛰어넘었으니 코찔찔이 어린 아이가 정말 위대한 성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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