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처음 접하는 것이 '어떻게 적응할까?'의 고민이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논리력도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미래를 보는 눈도 필요가 없었다. 단순히 다시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살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놓고 보면 그 논리적 사고, 국가의 권력의 이동, 트랜드의 변화, 시장의 흐름과 같은 무수한 뜬 구름과 같은 단어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게 된다. 그냥 하루를 살고, 하루를 버티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등이 굽은 노인의 리어카 끄는 모습이 무척이나 힘들고 고단하게 보였다. 그는 힘겨운 숨을 몰아쉬며 10m정도 리어카를 끌고 잠시 쉬고, 다시 억척같은 모습으로 리어카를 끌어 당기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 노인의 머리 속에 우리나라의 경제적 문제나 트랜드는 전혀 자리잡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냥 리어카에 실려있는 폐지는 많아지고 리어카의 무게는 조금 더 가벼웠으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 정도면 그의 생각은 더 이상 뻗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살아야 하는 그 사람, 새벽부터 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자정을 알리는 시계소리를 듣고 겨우 한켠의 방에서 홑이불을 덮고 밤을 지새워야 하는 그 노인과 같은 인생에 미래와 트랜드와 철학과 사고는 없다. 전혀 관심을 두고 싶지도 않는 먼 이웃나라나 먼 지구 밖의 외계인들의 소리들이다. 지성이라는 것, 사고라는 것은 편안하고 배부른 사람들의 세상일 뿐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런 가장 낮고 가장 작은 사람들의 편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그들의 삶에서 함께 울고 웃어 줄 수 있는 진짜 사랑의 종교여야 한다.
이 사랑의 종교가 세상의 스펙을 가져왔고, 세상의 바벨탑과 같은 엄청난 욕망의 화신을 만들어 가고 있다. 목사의 스펙은 어떤 직업의 스펙보다 좋아야 하고, 교회에서 하는 일들은 보여주고 내세우는 것들이 전부이다. 복음이 아니라 바벨탑을 구경시켜 주는 것이 교회가 되었다. 매 주일 관광 가이드처럼 멋진 모습을 나타나 바벨탑을 설명하고 그 바벨탑을 통해서 이익을 창출하는 목사가 재미있는 말로 상품을 사라고 부추기고 있는 모습같다. 지금은 더 넓은 바벨탑과 화려한 현장을 보여주고 투자나 관광을 조장하는 잘나가는 관광가이드가 바로 목사다. 교회의 조직은 꼭 바벨탑을 보여주고 관리하고 이익을 창출하는 거대 기업이 되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구경꾼이 되고, 자신들의 욕망을 분출하고, 자신들의 낸 돈에 대한 본전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교회가 되었다.
어느 선배 목사는 신앙의 집안도 아니고,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한 목사이다. 그는 복음에 대해서 열정적이고 성실하고 신실한 목사이다. 그런데 그를 뽑아주는 교회는 없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독학으로 신학을 하며 남들보다 2배의 노력을 했지만 그의 배경은 언제나 불신자의 가정이며, 그의 외모는 작고 초라했다. 그에게 담임목사의 자리는 없다. 그 성실함과 신실함을 보려고 요구하는 교회도 없다. 그의 설교를 들어 보려고 하는 교회도 없다. 바벨탑과 같은 교회들이 바라보기에 그 목사는 찌질이 목사이고, 스펙이 정말 초라한 목사이다. 그 목사를 보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이게 현실이다. 이게 오늘날 바벨탑 교회의 현주소이다.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보기 좋은 것도 하나님의 기준은 아닌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기준은 보기 좋고, 스펙 좋고, 배경 좋은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누가 이 한국교회의 타락을 막아줄 것인가?
신실함과 열정으로 목사가 될 수 없는 한국교회!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스펙이라는 찬란한 종이 몇 장에 밀려 버린 한국교회의 영성은 큰 균열이 생긴 것이다. 쓰레기 같은 종이 몇 장으로 신앙을 가늠하고, 보이는 모양과 소리로 평가되는 목사가 어떻게 제대로 양을 먹이겠는가? 자기 외모에 신경 쓰고, 보이는 것에 신경 쓰는 그 목사들도 바벨론 교회의 색깔에 맞추어 그냥 가이드 목사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한국교회에 진짜 예수님이 주신 복음이 무너지고 깨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며 나도 스스로 고민하기 시작했었다. 어떤 자리에 갈 수 있을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래서 미래를 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변화에 대해서 민감하고 싶어서 닥치는 대로 변화와 트랜드에 대한 서적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변화라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그 변화를 주도하는 트랜드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획기적이고 대단한 발상으로 쌓여 있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변화를 보고 접하면 접할수록 더 불안하고 더 힘이 들었다. 교회가 그것들을 원한다면 나는 그 교회에서 원하는 목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사역을 하기 힘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세상이 원하는 바벨탑과 같은 교회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원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작은 꿈을 꾸고 함께 복음을 끌어 안고 생각하고, 눈물 흘리고, 버티며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목회하기를 원했다. 미래의 책들과 오늘날의 많은 쏟아지는 서적에서는 그 꿈을 포기하고, 현실을 직시하여 나의 모습과 나의 관점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거대한 꿈을 꾸되, 세상의 맞추어 꾸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원한 것은 작은 꿈이다. 그냥 예수 안에서 행복하고 기쁘게 목회하는 것이다. 그냥 함께 예배하고 함께 사는 작은 꿈이었다. 그런데 그 꿈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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