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0년대에 전개된 케임브리지-케임브리지 자본논쟁이란 간단히 말해 신고전파 경제학이 경제 전체에 주어진 자본을 집계(aggregate)하는 방식(이질적인 자본재들에 각각의 자본재의 가격을 곱한 것을 더해서 경제 전체에 주어진 자본량을 구하는 방식)대로라면 '신고전파의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고전파의 논리'란 결국 주어진 자본량에 대해 1:1의 단조증가형의 생산함수(콥 더글라스 생산함수와 그것의 variation)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고, 점차 증가하는 자본량에 대해 체감하는 한계 자본생산물을 도출할 수 있다(한계생산 체감의 법칙)는 것이며, 생산요소 시장에서 주어진 자본량에 대해 1:1의 단조감소형의 자본수요(주어진 생산요소에 대해 점차 감소하는 생산요소 가격)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고전파의 논리가 틀렸다는 것은, 다시 말해 주어진 자본량에 대해 1:1의 단조증가형의 생산함수를 도출할 수 없고(콥 더글라스 생산함수와 그것의 variation은 틀렸고), 점차 증가하는 자본량에 대해 체감하는 한계자본생산물을 도출할 수 없으며(한계주의 이론은 틀렸으며), 요소시장에서 주어진 자본량에 대해 1:1의 단조감소형의 자본수요곡선을 도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요소시장에서의 수요공급 곡선은 틀렸다).
따라서 경제학 교과서에 기술된 대부분의 신고전파 경제학의 방법론은 논리적으로 심각한 결함을 지니고 있으며 당연히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미 논리적으로 틀렸다는 것이 입증된 신고전파 경제학 이론은 지금도 버젓이 학부와 대학원 교과서에서 마치 경전인 것처럼 교육되고 있다.
앞서의 논의를 더 쉽게 요약하자면, 자본논쟁이란 이런 것이다. 자본재들의 '가격(p)'이라는 것이 결국 '이윤율(r)'의 함수(p=p(r))이기 때문에, 이질적인 자본재(k 벡터)의 양에 대해 각각의 자본재의 가격(p 벡터)을 곱해서 경제전체의 주어진 자본량(p*k=K(스칼라 K값))을 일관되게 측정하려면 먼저 이윤율(스칼라 r값)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교과서적인 신고전파 이론에 따르면 이 이윤율(r)은 경제 전체에 주어진 자본량(K)의 함수(=자본의 한계생산물(=r=Marginal Product of Capital))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고전파 이론은 순환논리에 빠지고 만다.
다시 말해서, 신고전파 이론에서 이미 생산영역 혹은 공급측면에서 외생적으로 '주어졌다'고 가정하는 자본량(=부존 자본량(capital endowment)=p(r)*k=K)을 측정하려면 우선 분배변수(ex이윤율=r)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배변수 r(=이윤율)를 알기 위해서는 사전에 주어진 K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신고전파 이론의 논리적 모순(=순환논리)이다.
- 한편으로 내가 학부시절부터 느낀 고민은 '자본논쟁'에 대해 결국 '신고전파가 틀렸다' 그 이상으로 어떤 경제학적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본논쟁이 진짜로 의미 있으려면 단순히 이론적으로 파괴적인 의의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 생산적인 의의가 있어야 한다.
사실 자본논쟁을 주도해서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을 이론적으로 박살낸 것은 스라파 경제학자들이었다. 한편 이들이 신고전파 이론을 부정하고 그 대안으로 '진짜 경제학 이론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내세운 것은 내가 볼 때 경제학적 이론이 아니라 순수한 공학적인 이론이다.
이때 스라파주의 이론이란 신고전파 이론처럼 자본재를 사전에 주어진 양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전체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자본재들 사이의 수량적인 투입-산출 관계(ex 철을 생산하는 데 얼마만큼의 석탄이 들고, 반대로 석탄을 생산하는데 얼마만큼의 철이 드는가, 등등)를 통해 사후적으로 결정되는 양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즉, 자본재는 외생변수가 아닌 내생변수이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깨 너머로 본 이러한 스라파주의 경제학의 이론이란 여전히 '경제학적 이론'이라기보다는 '공학적 이론'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스라파 경제학이란 경제학 이론 자체를 부정하고 순수공학으로 돌아가자는 이론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그런 파괴적인 결론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스라파주의자들이 주도한 '자본논쟁'의 함의가 경제학에서 충분히 수용되지 못한 것은 이상하지 않다. 스라파주의자들이 내세운 결론이란 결국 '경제학을 그만두고 공학을 하자'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라파주의 경제학 역시도 신고전파와 동일한 이론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우선 신고전파 경제학을 보자. 신고전파 경제학이란 '공급측면에서 경제 전체에 생산요소가 주어진다면 그 결과 경제 전체의 생산량과 그 생산량의 분배가 결정된다'는 이론구조를 지닌다.
한편 내가 볼 때 스라파주의 경제학도 이와 대동소이한 논리구조를 지닌다. 스라파주의 경제학에서 비록 생산요소(ex 자본량)가 사전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질적 자본재 간의 투입-산출 관계에 의해 내생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간주되지만 어찌 되었든 '공급측면에서 경제 전체에 주어진 (이질적인) 생산요소들의 양이 경제 전체의 생산량과 그 분배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스라파주의 경제학 이론조차도 신고전파의 이론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말해 생산영역에서 주어진 어떤 '수량적 양'(신고전파)이나 '수량적 관계'(스라파주의 경제학)가 분배영역의 변수(이윤율과 임금률)를 결정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하지만 사전적으로 주어진 수량적 관계나 양이 분배변수를 결정한다는 논리 자체가 틀렸다면 어쩔 것인가?
- 그래서 최근 든 생각은 이렇다. 자본논쟁이 밝혀낸 것은 신고전파 경제학 자체의 이론적 모순이 아니라 사실은 현실에 존재하는 모순은 아닐까?
다시 말해, 신고전파 이론구조에서 이윤율(r)이나 임금률(r과 역관계에 있는 w) 같은 분배변수가 생산영역 혹은 공급측면에서 주어진 생산요소(자본량(K)이나 노동량(L)의 부존량(endowment))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단지 이론적 모순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모순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다시 말해 이윤율과 임금률의 결정이 경제 전체의 생산요소의 양과 그것에 의해 결정되는 경제 전체의 생산량을 결정한다는 것이 단순한 이론적 모순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의 반영이라면 어쩔 텐가?
게다가 이러한 쟁점은 순수한 이론적 쟁점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최근 논란이 되는 이른바 '소득주도 성장론'과 같은 정책적인 쟁점으로 이어진다.
'소득주도 성장론'이란 쉽게 말해서 분배영역의 변수(이자율과 이윤율)가 생산영역의 변수(자본량과 노동량 그리고 그것에 의해 규정된 생산함수)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소득주도 성장론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산영역의 변수가 진짜 원인이고 분배영역의 변수가 사후적인 결과라는 이론적 질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틀린 거라면 어떨까?
좌우를 떠나서 '소득주도 성장론'이 틀렸다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떠들어대는 인간들의 기본적인 심리적 동기는 결국 자신들이 금과옥조처럼 지키고 싶은 공리 즉 '분배영역의 변수는 생산영역의 변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경제학적 편견'을 보존하고 싶은 충동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만일 당신들이 견지하고 있는 경제학적 편견 자체가 틀렸다면 어찌할 텐가???
올리신 포스팅 다른데서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즐겁게 읽었습니다. 정치경제학 전공이신가봅니다. 팔로우 하고 보팅합니다. 멋진 스티미언 친구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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