쉘터에서 보내는 처음 며칠간은 아주 지루했다. 좀처럼 시간이 가질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 적응이 되자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지나버린 시간이 대개 그런 법이지만 쉘터 안에서는 더 빠른 것 같았다. 테이블 위의 시계에서 표시되는 날짜가 정확하다면 777이 쉘터에 들어온 지 벌써 10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간 옆 자리의 776, 그리고 778과도 더욱 가까워졌다. 하지만 776과 778은 서로 마주치면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진 않았다. 777은 776과는 거의 매일같이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778은 시간이 흐르면 흐르면서 예의 믿음과 시험에 관한 고민 때문에 점점 더 불안해지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한 번은 잔뜩 흥분하여 이성을 잃고 사람들에게 마구 욕을 하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776은 여전히 친구들을 강간하고 죽였다는 842를 살해할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매일 같이 이어지는 777의 끈질긴 설득에 조금 망설이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오고가는 대화의 끝엔 "아직 뾰족한 수가 없지만 좋은 생각이 나면 바로 그를 죽일 거예요." 라고 말하곤 했다.
개인의 사생활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쉘터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777은 본의 아니게 776의 나신을 몇 번이나 보게 되었다. 샤워를 하는 모습을 볼 때도 있었고, 심지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모습을 봐버린 적도 있었다. 바로 옆자리에 있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776은 예쁘장한 얼굴만큼이나 싱그러운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갓 스무 살의, 매끄러운 하얀 피부와 적당히 살집이 오른 탄력 있는 몸이 눈에 들어올 때면 777은 이제 서른 후반에 접어드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고 크게 당황하며 얼른 시선을 돌리곤 했다.
777은 그런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하는 쉘터에서의 생활이 영 불편했다. 샤워를 하고 싶어도 사람들이 다들 잠들어 있는 시간을 이용해 씻고, 어지간히 급하지 않으면 큰 볼일은 참고 또 참았다. 반면 776은 적응이 빠른 것인지,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사람들이 보건 말건 거리낌 없이 볼일을 보고 샤워도 하곤 했다.
언젠가 쉘터의 열악한(?) 환경을 불평하면서 사람들 보기 창피하다는 777에게 776은 "부끄럽지만 빨리 적응할수록 편해져요. 어찌 보면 딱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도 아니잖아요." 라고 말했다. 그래도 창피한 건 창피한 거라고 맞받아치긴 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쨌든 776에게 그런 말을 들은 뒤론 777도 조금은 사람들의 눈을 덜 의식하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물론 양보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도저히 그건 남들 앞에서 할 수 없었다. 큰 볼일만은 끝까지 참았다. 정말 급하지 않고서야 서양배 변기로 곧장 가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776의 눈에 띄는 것이 싫었다. 큰 볼일은 꾹꾹 참다가 그녀가 잠든 시간을 노리곤 했다.
777이 점심을 먹고 난 뒤, 막 소변을 보고 돌아서는데 얼굴이 발개진 778이 777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777은 막 소변을 본 터라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778은 인사에 답도 안하고 다짜고짜 777의 손목을 끌어 의자에 앉히더니 말을 시작했다.
"이봐. 좀 앉아봐. 내가 뭘 좀 알아낸 것 같아."
778은 조금 친해진 뒤론 마치 원래 알던 동생이라도 된 듯 777을 대하고 있었다.
"뭔데 그러세요?"
778은 늘 그렇듯 주변의 눈치를 한참 살피더니 목소리를 잔뜩 내리깔고 말했다.
"사라지고 있어. 혹시 자네도 눈치 챘나?"
"뭐가요?"
"사람들 말이야. 또야! 또! 사라지고 있다니까!"
"그래요?"
777이 778의 말에 고개를 쭉 빼서 주위를 보았다. 여기저기 몰려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쉘터 안에는 거의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몰려 있는데다 어차피 종일 자기 자리에만 붙어 있는 사람도 없으니 이렇게 잠깐 둘러본다고 사람들이 몇 명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여기 말고 저기 저쪽에 말이야. 앞 번호들이 몰려 있는 구역에 사람들이 사라졌어. 한둘이 아니야! 이미 거기선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고 있다고!"
"그래요?"
"자네 왜 이리 태연한가? 난 아주 불안하다고! 초조해서 미쳐버리겠어!!"
778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777이 진정하라는 듯 778의 어깨를 천천히 다독이며 말했다.
"흥분 가라앉히세요. 그나저나 뭘 알아내셨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사라지는 거요?"
778은 씩씩거리며 답했다.
"그것도 그렇고, 내가 요 며칠간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 알아봤거든. 내 생각엔 역시 그건 그거야. 정말 놀라운 일이지.“
777은 다시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알아듣게 말씀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니까 선택에 어떤 기준이 있다니까!"
"선택의 기준이요?"
"그렇다니까! 사라진 자들은 선택받은 거야! 모르겠나!"
"그게 아니고 쫓겨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싸우거나 해서? 버림받는 사람도 있다면서요. 일단 여기 있는 게 제일 안전.......“
778이 양손을 휘휘 내저으며 777의 말을 끊었다.
"아니 아니야! 내가 며칠간 저쪽 구역에서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 조사를 좀 했어! 그들은 분명 선택 받았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내가 전에도 말했지 않나! '그들'은 천사라고! 신의 계시에 따라 믿음이 깊은 자들을 선별해서 데려갈 거라고 말이야! 자네도 동의했잖아!"
"네네. 그렇죠........"
"내가 아직 선택받지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과 그들에 대해 알아봤어. 분명 천사들의 선택에는 신실한 믿음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선택받지 못하고 여태 남아있을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그렇습니다."
777은 이제 포기한 듯, 거의 기계적으로 잔뜩 흥분한 778의 물음에 답하고 있었다.
"우선 말이야. 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를 데려간다는 나의 첫째 조건은 맞는 것 같아. 지금 일단 내가 확인한 건 여섯 명이야. 물론 더 많은 숫자가 사라졌지. 아무튼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사라진 여섯 중 세 명은 종교인이었어. 물론 나와 같은 기독교인이었지."
"그럼 나머지 셋은요?"
"몰라. 하지만 아마 기독교인일 거야. 확실해.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마음속 깊은 곳엔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거야. 그건 자신조차 모르는 법이야. 오직 주님만이 알고 계셔. 그러니 선택을 받는 거지."
'그럼 난 죽어도 선택을 받지 못하겠군.' 777이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778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거야."
"뭐죠?"
“셋은 남자고 셋은 여자야. 사라진 사람을 전부 조사하진 못했지만 분명해. 한 쌍씩 데려가고 있어. 아 내가 여태 그걸 왜 몰랐을까? 젠장!”
778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 앉은 상태로 바닥에 몇 번이나 발을 굴렀다. 777은 그런 778에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모르겠네요.”
778이 그제야 물끄러미 777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말이야. 어디서 본 거 같지 않나? 응?”
"모르겠는데요?"
778이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내뱉듯 말했다.
"성경을 보지 못했나? 이건 노아의 방주야! 노아의 방주! 설마 그것도 모르나?"
"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래! 노아의 방주에서처럼 인간들을 남자, 여자 한 쌍씩 데려간다니까!"
"그래서 두 번째 조건이 뭐라는 말인가요?"
"아이고 답답한 사람아! 뭐겠어?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암수 한 쌍이어야 했지. 그 말인즉슨! 바로 짝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짝이라니요? 이곳엔 다들 혼자 온 사람들이던데요.“
778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아이참! 그러니까 만들어야한다고! 짝을!"
777은 778의 말에 저도 모르게 776을 떠올리는 자신에게 놀라 도리질을 쳤다. 사실 778의 말은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그저 그의 추측일 뿐이었다. 777이 말했다.
"확실한 건 아니잖아요. 그냥 아저씨 생각이잖아요. 성경에 나온 말일 뿐이고요. 그렇죠?"
778이 대뜸 화를 냈다. 잔뜩 흥분하여 마구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무슨 그런 말을! 성경에 나온 말일 뿐이라니! 이 사람이 정말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아 확실하다니까! 내가 전에 말했었잖아! 난 이게 두 번째 쉘터라고!”
“그런데요? 그때도 그랬나요?”
“그때 이곳으로 옮겨오기 직전 나까지 포함해 총 일곱 명의 사람들과 남아 있었어. 넷은 남자 셋은 여자였단 말이야! 한마디로 짝이 맞질 않았던 거야! 거기다 그 일곱은 모두 그리 친하지 않았어! 서로 서먹한 사이였다고!”
“음.......”
777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노아의 방주니 성경이니 여호와니 하는 말은 얼토당토 없었지만 ‘그들’이 남녀 한 쌍을 기준으로 선택을 한다는 사실만은 꽤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어차피 어디로 떠나든 정착을 위한 배우자는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희생된 다른 가족들을 떠올리면 미안한 일이지만 어차피 끝까지 살아남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런 감상에 빠질 틈은 없었다.
777이 778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778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제야 내 말을 믿는군.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서도 제일은 사랑이지 결국 남녀 간의 사랑이야. 맞아 그럴 거야! 천사들은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거야! 물론 주님에 대한 믿음은 기본이겠지!”
따지고 보면 그리 황당무계한 소리도 아닌지라 777은 미소를 지으며 동조해주었다.
“그래요. 왠지 정말 그럴 것 같네요. 맞는 말씀 같아요.”
“그렇지?”
777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어쩌실 생각이세요?”
“어쩌긴 뭘?”
“목사님 혹시- 여기서 여자를 사귀어 보기라도 할 생각인 거예요?”
“비슷해.”
778은 작지만 확실하게 답했다. 777은 새삼 778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분명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얼굴이다. 아니 참 못생긴 얼굴이다. 눈은 툭 튀어나와있고 입술은 두툼한 것이 두꺼비 같이 생겼다. 앞머리를 길게 길러 옆으로 넘겨 대머리를 가린 것이 애달프다. 물론 겉모습만 가지고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것은 아니라지만 778은 그리 좋은 첫인상을 주는 얼굴은 절대 아니었다.
거기다 778에게 겉모습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늘 불안한 표정으로, 초조하게 주변의 눈치를 살피면서 툭하면 흥분을 하고 성질을 부리는 저런 성격이라면 여자를 사귀기는커녕 그냥 사람을 사귀는 것 자체가 힘들어보였다. 그도 그런 것이 777 외엔 778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아예 이야기를 하거나 말을 거는 사람 자체가 없었다.
과거 교회의 개척하고 이끌던 목사였던 사람이 어쩌다 저렇게까지 되었는지는 모르나 아마 그 역시 재앙으로 인한 끔찍하고 힘든 일을 겪었을 터였다.
777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778이 측은하단 생각도 들었다. 778은 어느새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어떻게 하면 쉘터에서 여자와 가까워질 수 있을지 고민 중인지도 몰랐다.
어찌됐건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에 777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요. 역시 목사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천사의 계획은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여기 모인 사람들도 다 혼자인데 좋은 인연이 있을지도 모르죠. 거기다 앞으로 계속 살아가려면 더욱 그런 짝이 절실해질 것 같아요."
778이 느끼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더니 말했다.
"그렇겠지? 역시 그래. 그것이 순리야. 남자는 여자를 사귀어야 해."
그때 778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777이 뒤를 돌아보았다. 776이었다.
“아저씨 뭐하세요? 바빠요?”
776은 778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777이 "아니 아니야."하고 일어서는데 778이 777과 776을 번갈아보며 쳐다보더니 "흥!"하고 콧김을 뿜었다.
778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 가버렸다. 776이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777에게 말했다.
“저 바코드헤드 왜 저래요?”
777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더니 말조심 하라는 듯 손가락에 입을 가져대며 말했다.
“몰라.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776은 테이블을 돌아 777이 앉아 있는 곁으로 다가와 풀썩 앉더니 말했다.
"그나저나 아저씨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
"선택에 뭔가 기준이 있다던데요?“
777은 왠지 그 소문이 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짐짓 정말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아....... 그래? 그런 소문이 돌아? 뭐라는데?"
776이 희죽 웃으며 답했다.
“음- 남녀 한 쌍씩 선택을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