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미더머니, 그리고 언더그라운드. 이 두 낱말을 짝 지우며 글을 시작해야하는 이유가 있다. 5월 13일 <쇼미더머니> 시즌 5가 개시된다. 2012년 첫 시즌을 시작한 후 <쇼미더머니>는 <슈퍼스타K>를 잇는 Mnet의 대표상품이 됐다. 힙합은 상업음악 차트를 종횡하는 인기 장르가 됐다. 이것을 <쇼미더머니>가 일으킨 바람이라고 해도 좋다. <쇼미더머니>는 20여 년에 걸쳐 이미 대중화된 힙합을 대세 트렌드로 만들었다. 하지만 멜론 차트와 대학 공연장에 초대받는 대가로 힙합 신도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이 길의 어디쯤 와있는지 알기 위해선 출발한 곳이 어딘지 돌아봐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언더그라운드로 돌아갈 것이다. 그곳의 정의와 역사, 의미와 방향을 정리해보자.
뮤지션과 장르 팬 사이에서 ‘언더’는 쉽고 흔하게 뱉어지는 단어다. 뿌리와 배고픔, 비장함과 고독함 같은 정서를 가리키고 싶을 때 뱉는 것 같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얘기되지 않는다.
언더그라운드라는 개념은 1950년대 미국에서 보수적 기성질서에 반발하며 저항적 문화를 구가한 비트 세대 Beat generation를 중심으로 태어났다. 문화연구자 새러 쏜튼 Sarah Thornton은 언더그라운드를 특별한 관중과 관련된 배타적 세계라고 정리한다. 문자 그대로 풀면, 오버그라운드는 지상의 세계이며 언더그라운드는 드러나지 않는 지하의 세계다. 쏜튼은 “언더그라운드는 매스미디어에 반대해서 스스로를 정의한다.”고 말한다. 오버그라운드가 매스미디어를 통해 스타 육성과 상업적 기획으로 대중의 감성을 단일화한다면, 언더그라운드는 취향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주체들을 잇는 네트워크다. 언더그라운드는 창작자와 리스너의 거리가 가깝고, 둘의 자리는 고정돼있지 않다. 대중에게 스스로를 전시하는 오버그라운드와 달리 언더그라운드의 주체는 자기 성찰적이다. 언더그라운드의 경계선은 기존 사회 권력과의 관계다. 거기엔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권력, 계급적 권력이 포함돼있는데 그런 권력 바깥의 ‘장소’가 언더그라운드다. 메이저 문화산업, 상업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개인과 소집단의 창작활동이 핵심인 인디라는 개념은 언더그라운드가 지니는 이런 속성의 특정한 표현이다(김민규, ‘한국 인디문화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에서 인용 및 재인용한 후 정리).
한국 언더그라운드는 이상의 정의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태동했다. 현진영과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를 기원으로 해서 김진표와 교포 1세대 래퍼 등이 개척한 오버 힙합 계보와 분리된 채 자생적으로 출범했고, 흑인음악 동호회 ‘소울 트레인’과 ‘블렉스’, ‘SNP'에서 활동하던 애호가들이 창작에 뛰어들어 신을 일궜다. 1997년 12월 개장한 클럽 마스터플랜은 누구나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공연장이 됐고, ‘언더 힙합의 성지’, 취향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이는 네트워크의 구심점으로 영위됐다.
하지만 한국 언더 역사를 이것만으로 정리할 순 없다. 한국 언더 신은 단순히 오버와 구조적 대조로 정의되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본토 힙합의 본질을 순도 높게 재현하기 위한 메카였다. 물리적 거리와 문화적 거리, 90년대 사전심의 제도로 인해 한국에서 미국 힙합에 목을 축일 기회는 바늘구멍이었다. 오버 힙합은 힙합의 겉치레만 따서 패션으로 걸치거나 본연의 요소를 불완전하게 혹은 연성화하여 재현했다. 비좁은 채널을 뚫고 갈증을 해소하던 이들은 자신이 아는 ‘진짜 힙합’을 재현하려 했다. 이 출발점은 이후의 언더 역사를 관류한다.
여기엔 난제가 있었다. 장르를 재현할 수 있는 미국과 한국의 지역적 조건의 차이다. 첫째, 라임의 부재다. 둘째, ‘스트릿’의 부재다. 셋째, 힙합이란 장르의 상업적 성격이다.
한국말 라임은 90년대부터 시행착오를 겪다가 2000년대 초반에 지금과 같은 얼개로 정립됐다. 이 과정은 거의 전적으로 언더 신 안에서 진행됐고 논란과 논쟁도 낳았다. SNP 출신 MC들은 영어 랩의 각운을 근사치로 재현하는 방법론에 천착하며 각각 음악적 결과물을 남겼다. 이는 언더 뮤지션 일부가 자의식을, 그리고 오버 신과의 대립항을, 언더라는 장소에 대한 자부심이나 정치적 대결의식보다 장르적 순도와 음악적 스킬의 우열관계로 전유했음을 암시한다. 아직도 회자되는 2000년 ‘4WD/버벌진트 vs 조PD/DJ 우지’는 오버와 언더 사이 대형 디스전이었는데 이런 행간을 단적으로 머금는다.
힙합은 1970년대 뉴욕의 게토 사우스 브롱크스에 탯줄을 댔다. 과거도 지금도, 많은 MC가 빈민가와 뒷골목에서 범죄·마약·가난과 함께 자랐다. 남자다움·강인함·위험함의 상징이자 고유명사로 가사에 등장하는 ‘스트릿’이란 공간은 이 문맥 위에 성립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좋은 나라 중 하나고 슬럼가 같은 게토도 없다. 한국 힙합이 태동한 곳은 사우스 브롱크스가 아니라 나우누리·천리안·하이텔이다. 1세대 언더 래퍼도 저학력 빈민계층이 아니라 고학력 인텔리가 다수였다. 이건 소위 하드코어 힙합의 정서를 설득력 있게 재현하는데 장애물이다. 때문에 한국 힙합에는 누구를 무엇 때문에 욕하는지 알 수 없는 뜬구름 잡는 과시형 디스 가사가 많다. 자신이 겪은 수난의 무대로 ‘스트릿’이 아니라 인터넷 힙합 커뮤니티를 지목하며 ‘방구석 헤이러’를 향해 네거티브 에너지를 발사하는 버벌진트/오버클래스 부류의 가사도 클리셰가 됐다. 언더 신의 양적 중흥기 2000년대 중반의 쌍두마차 언더 레이블, 소울 컴퍼니와 빅딜 레코즈는 이런 제약에 따라 각각 다른 경로를 탔다. 지역적 조건에 순응하며 스트릿을 거세한 감성적 무드의 힙합과 ‘2인조 강도’처럼 스트릿의 기의 없는 기표를 재현하는데 천착한 하드코어 힙합이다.
미국에서 힙합은 상업적인 장르이고 무수한 차트 스타를 배출했다. 한국 언더 힙합이 꿈틀대던 90년대에도 퍼프 대디가 ‘I'll Be Missing You'를 300만 장 팔아치웠다. 언더 신은 본토 힙합을 오버와 언더 구분 없이 흡수했다. 문화적 제3세계가 제1세계 음악 장르를 만나며 일어나는 현상일 텐데, 언더라는 장소에 상업적 자의식에 찬 음악을 이식하는 부정교합이 발생한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레이블 마스터플랜 시절에도 주석·영GM 같은 MC는 제이지의 락카펠라 레코드를 선망했으며 오버 신을 꾸준히 노크했다. 마스터플랜은 데프콘·수파사이즈·IF를 오버에 데뷔시키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며 언더에서 오버를 지향하는, 언더도 오버도 아닌 묘한 경계에 정주하는 레이블이 됐다. 마스터플랜의 마케팅 전략은 언더 출신이란 간판을 상징 자본으로 상업 문화계에 편입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언더그라운드란 장소에 생긴 균열이다.
2000년대 중·후반엔 균열이 심화했다. 2000년대 중반, 홍대를 중심으로 클럽문화가 급속히 퍼져 나갔다. Mnet ‘슈퍼 바이브 파티’란 프로그램은 이런 흐름에 올라타 클럽 파티란 콘셉트로 속칭 ‘부비부비’등 클럽 구애 문화와 힙합 가수들의 공연을 매칭해 보여줬다. 클럽 문화의 유행은 홍대 클럽을 물적 토대로 조직된 언더그라운드와 긴밀히 결부된다. 언더 MC들에게 홍대 클럽 신은 미국 스타 MC들의 향락적 삶을 대리 체험하는 해방구 노릇을 했다. 힙합은 하룻밤 젊음을 불태우는 데 쓰이는 최첨단 배경음악이면서 가난함과 진정성, raw함의 표상이었다. 이 양가적 표상은 대중적 인식을 넘어, 언더그라운드 신 안에 그대로 혼재돼 있었다.
한편 2000년대 중반은 언더 신의 양적 중흥기였지만, 그때도 지적되었듯 언더그라운드가 ’작은 가요계‘로 재편된 시기다. 창작자와 리스너의 거리가 가까운 언더그라운드의 속성은 거대한 팬덤 속의 한 명으로 우상을 바라봐야 하는 상업 가요계와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했다. 무브먼트 크루가 주도한 힙합의 차트 선전과 어울려, 십대 팬 다수가 유입했고 MC들과 지척에서 내밀한 소통을 나눴다. 힙합 커뮤니티 여론도 이들이 주도해갔고 올드팬은 소수자가 됐다. 이들은 구매력이 약하고 트렌드에 민감한 계층이라 지속적 생태계를 꾸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2000년대 후반 언더 신은 급속한 불황에 처했다. 플레이어들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직업을 찾으며 신과 멀어졌다. 물론 모두가 그랬던 건 아니다. 상업 레이블과 계약하며 오버로 향한 이들이 있었고, 싸우스 힙합을 위시한 트렌디한 사운드를 적극 수입한 이들이 있었다. 전자는 수프림팀과 버벌진트고 후자는 일리네어 레코드다. 돈과 여자, 남근적 유능함의 과시. 언더라는 장소에 도래한 스웨거의 시대. 언더 신은 ‘연봉 1억 래퍼’ 소수와 수입난에 허덕이는 다수로 양극화됐다. 그리고 <쇼미더머니>가 도착했다.
<쇼미더머니> 시즌1은 어마어마한 구설수에 휩싸였다. 앨범까지 낸 기성 언더 MC 다수를 오디션 받는 참가자로 섭외했고, 음악적 역량이 한없이 부족한 래퍼가 심사위원에 섞여 있었다. 출연 MC들은 울음과 회한이 섞인 표정으로 인생역전을 이루어 달라 호소했다. 언더에서 보이콧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프로그램은 완주했다. 방송은 시즌 3에 이르러 공전의 성공을 거뒀다. #보이콧쇼미더머니, 라는 해시태그를 남겼던 팔로알토는 시즌 4에 합류했다. <쇼미더머니>는 서바이벌을 이겨낸 래퍼들에게 성공을 줬고, 언더에서 오버로 승천하는 금색 동아줄이 됐다.
이것은 피폐해진 언더그라운드와 미디어의 상업적 기획이 절묘한 시기에 만난 결과다. 인식적으로, 역사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언더의 개념이 문맥으로 깔려있다. 앞서 길게 서술한 것처럼 한국 언더는 특정한 지정학적 조건 아래 장르를 이식하는 최전방 기지였다. 이런 상황 속에 장르적인 것이 곧 언더적인 것으로 오인되기도 했으며, 언더를 구성하는 문제의식에 이질적 요소가 틈입하며 균열을 만들었다. 그것은 한국 언더 힙합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인이요, 장르적 발전을 이끈 동인이었지만 언더 신의 경계를 흐리는 원인이기도 했다. 가령 언더 뮤지션들은 ‘본토 힙합’ MV를 보면서 번쩍이는 금목걸이를 차고 멋진 몸매의 여성들과 하룻밤을 보내는 MC의 삶을 음악적 캐릭터나 롤모델로 긍정했을 것이다. 그런 욕망은 언더 신의 균열을 타고 꾸준하게 고개를 치켜들었고 묵과되었다. 하지만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었다. 한국 상업음악 차트 지형과 언더 신의 규모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쇼미더머니>는 마스터플랜이 꾸던 꿈을 대신 이뤄준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현상은 장르 팬들이 지닌 언더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와 어깨동무한다. <쇼미더머니>에 출연한 MC들에 대한 비판에 “부와 명예를 쟁취하는 스웨거가 힙합 본연의 멋이란 걸 잊었는가?”라는 투로 대꾸하는 것 역시 힙합과 언더를 완전히 등치한 인식이다. 이처럼 스웨거 같은 특정 요소가 힙합의 전부인 것처럼 유행하게 된 것도 <쇼미더머니>의 아쉬운 점일 텐데, 언더를 부식시키는 염산으로도 작용한다. 스윙스는 <쇼미더머니> 시즌2에 출연했을 때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의식한 듯 “많은 래퍼들은 화면 보면서 비웃겠지 (…) 자존심 때문에 여기 참가하기 싫대 / 그럼 서른 초반에 엄마 집에 얹혀사는 인생은 자랑스러운 거냐”는 가사의 랩을 연행했다. 이것은 상업적 성공을 척도로 언더에 남은 이들을 모욕하는 일이며 따라서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강조했지만, 언더그라운드는 배타적이며 독립적인 권력 바깥의 장소다. 매스미디어는 수익이라는 유일신의 권능을 좇아 움직인다. 화젯거리를 찾아 돈을 번다는 것 외에 관심사가 없으며, 돈을 번다는 결론 안에서만 새로움과 다양성과 예술에 대한 존중을 추구할 따름이다. 이런 수익 논리가 역설적으로 예술의 진보를 가져온 역사도 많지만 반대도 많다. 언더그라운드의 존재 가치도 수익 논리에 구애받지 않는 자결성과 다양성과 자존심이다. 카메라 앞에서 오열하고 참가자끼리 투견처럼 헐뜯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음악으로 내 음악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환대의 장소가 언더그라운드다. 한국 힙합도 태초에 그렇게 열정의 박동을 일으켰다.
확실히 <쇼미더머니>는 낙수효과를 가져왔을지 모른다. 힙합이 메인스트림이 되며 언더 팀이 출연할 수 있는 공연 숫자가 늘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문제는 <쇼미더머니>가 쥐어준 이문이 적다는 게 아니라 너무 크다는 점에 있을지 모른다. 하나의 거대 자본이 장르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대하고, 자본과 손잡지 않은 이들도 수익효과를 간접적 차원에서 의탁한다면, 달리 말해 오버와 언더를 막론하고 장르 자체가 그 자본에 종속되어 간다는 뜻이다. <쇼미더머니>는 새로운 출연자들을 끝없이 차출하고, 언더 활동 이력은 차출받기 위한 스펙이 된다. 언더그라운드는 ‘힙합의 대중화’를 위한 식민지가 되어간다. 언더에 대한 상업자본의 포섭 또한 다각화하고 본격화해 간다. 작년 10월에는 언더그라운드 레이블 하이라이트 레코즈가 CJ E&M 산하로 편입됐다. 버벌진트는 작년 12월 신보를 발표하며 브랜뉴 산하에 인디 레이블을 꾸리겠다는 보도 자료를 배포한 적이 있다. 이런 서브 레이블은 해외에도 존재하지만, 자본과의 연결고리가 뚜렷하다는 점에서 완전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다. 현재 상업자본의 한 전략은 언더그라운드에서 오버에 대한 대립항적 성격을 탈색시킨 채 혹은 대립항적 성격을 상품화한 채 제한적 독립성을 주어 ‘인디 레이블’로 순치하는 것이다.
현재 진행되는 힙합의 외연 확장이 나쁘기만 하다는 게 아니다. 언더 뮤지션이 미디어로 활동 반경을 이적하는 것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요점은 그와 별개로 언더의 배타적 독립성을 보전해야 한다는 거다. 떠날 사람은 떠나도 남을 사람은 남고 꾸준히 새 사람도 들어와야 하는데, 지금은 오버와 언더 사이 통로가 생긴 것을 넘어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을 오버로 낚아 올리는 구조적 강제력이 작용하는 상황이다. 10년 전 랍티미스트는 리드머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미국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 케이오틱스에게 들은 조언을 말했다.
“… 제일 가슴에 와 닿았던 조언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꾸준히 하려면 직업을 가지라는 말이었어요. (…) 미국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도 음악만으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거든요. 그러니 트렌드에 맞추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음악을 하고 싶으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죠.”
실업난이 만성화되고 노동 유연화가 심화되어 세계 최고 수준의 근로 시간에 이른 한국에서 음악과 병행할 직업을 얻으란 조언을 실행하는 건 쉽지 않다. 이 또한 한국의 인디 문화가 자라나기 힘든 구조적 요인이다. 그럼에도 이 말은 그간 일었던 논란의 상당 부분을 개념 정리해준다. 까놓고 말해 언더는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곳이다. 그 긍지와 자유를 누리는 데는 현실적 대가가 따른다. 현실적 욕망에 굴복해 자유를 버리는 건 쉽다. 쉽다는 이유로 타인의 선택을 비난할 순 없지만, 어려운 건 그 반대란 말이다.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커뮤니티 게시판은 <쇼미더머니>로 뒤덮인다. 팬들이 관심과 존중과 격려를 보내 마땅한 건 <쇼미더머니> 출연 래퍼가 아니라 아직도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다. 뮤지션과 레이블, 언더 팬, 그들 사이를 연결하는 힙합 커뮤니티까지, 언더 신에 연루된 당사자 모두가 <쇼미더머니>의 낙수효과에 의지하지 않고도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해 언더라는 장소를 재건하는 논의로 걸음을 옮겨야 한다. 프로그램에 대한 여론의 공방을 넘어, <쇼미더머니> 논란은 그럴 때 최종 종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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