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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서핑을 하다가 한국 힙합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물론 이건 조크다. 힙합은 주류 음악이 됐고 힙합을 즐겨 듣는 대중은 많다. 하지만 이건 신랄한 조크다. 아닌 게 아니라, 힙합을 흥미로워하는 대중만큼이나 힙합을 거북해하는 대중이 많다. 한국 래퍼들은 밑도 끝도 없이 센 척이나 하는 허세꾼이란 것이다. 까놓고 말해 ‘힙찔이’다. 이 땅에 힙합이 정착한 지 이십 년이 지났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힙합에 면역되지 못하고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걸까.
<쇼미더머니> 시대가 열린 후 방송 흥행을 위해 디스와 스웨거 같은 요소가 자극적으로 선별 노출됐다는 사실이 한 이유일 것 같다. 하지만 궁극적인 답을 알려주자면, 장르 문화를 이식하는 지역적 조건, 현지화(localizing)의 문제다. 한국 래퍼들이 유별난 게 아니라, 힙합 가사는 원래 마초적이고 공격적이다. 다만 미국 힙합은 이런 텍스트를 정당화할, 텍스트를 낳은 콘텍스트를 갖고 있다. 힙합의 발상지는 뉴욕의 사우스 브롱크스라는 슬럼가다. 미국 흑인들은 신대륙 시대에 노예 무역선에 실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건너간 후 줄곧 다인종 국가의 밑바닥 계층으로 살았다. 그들이 사는 슬럼가는 범죄와 가난, 마약이 어슬렁거리는 공동묘지 같은 도시다. 소위 말하는 블랙 뮤직, 래퍼 자신이 가사를 쓰며 사적 화자의 경험을 밝히는 힙합에는 특수한 지역 공동체의 현실이 장렬하게 들끓는다. 이런 장르적 정체성을 음악으로 서사화하는 아이콘이 바로 흑인 거주지를 표상하는 게토와 스트릿이다. 미국 래퍼들은 말로만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총에 맞아 사람이 죽는 걸 보며 자랐다. 내가 얼마나 불행했는지, 그곳에서 어떤 수난을 돌파하며 살아남았는지, 내가 얼마나 위험한 남자인지 노성을 토하고, 남근과 폭력을 찬미하는 장르적 관습은 이렇게 태동했다.
따라서 다른 국가 공동체, 지역 공동체에서 힙합이란 장르 음악을 창작하는 이들은 장르의 사운드적 재현과 서사적 재현이 일치하는가라는 곤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알다시피 한국은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좋은 국가 중 하나다. 이곳에는 마약도 총기도 없고 빈민가도 없다. 한국 래퍼들은 부모님에게 용돈을 타 쓰며 급식을 먹고 정규 교육을 이수한 샌님들이다. 그들이 힙합과 더불어 자란 고향은 사우스 브롱크스가 아니라 힙합 플레야 국힙게와 자녹게, 인터넷이다. 게토의 음악을 만들지만 게토라는 공간이 없는 나라에서, 하드코어한 가사가 수입되는 와중 가사의 기의는 거세당하고 기표만 살아남아 음악적 스타일과 클리셰로 쓰인다. 아무리 센 척을 해봐야 맥락이 없는 "아무도 뭐라 안 하는데 혼자서 화난"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여튼 '화를 내기' 위해 허수아비를 향해 종 주먹질하고, 별 두서도 없는 과시형 가사를 쓰고, 심지어 싸이월드 다이어리 험담이 비프로 비화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본토 힙합의 제왕 제이지가 "코카인을 팔아보니 CD를 파는 법도 알겠더군. 난 사업가가 아냐 사업 그 자체지(“I sold kilos of coke, I'm guessin' I can sell CD's. I'm not a businessman; I'm a business, man!")라고 뱉으면 범접할 수 없는 '스웨거'가 흘러넘치지만, 한국 MC들은 스웨거는 부리고 싶은데 근거가 될 배경 서사가 없으니 눈알만 부릅뜬다.
이건 미국 MC들이 모조리 갱스터란 말이 아니다. 마약왕을 자부하다 교도관 출신인 게 탄로 나 개망신당한 릭 로스의 경우처럼 갱스터는 자격 있는 자가 쓰는 왕관인 한편, 갱스터 가사는 연기자가 배역을 수행하듯 역할 유희로 소비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엔터테인먼트에 개연성과 몰입감을 받쳐 주는 콘텍스트를 지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고담 시도 배트맨도 없다. 하지만 서부 개척 시대와 연방 정부 수립 이래로 자경단이 활동한 역사적 ᆞ사회적 배경이 있다. 한국처럼 중앙 권력의 장악력이 촘촘하고 치안이 좋은 나라에선 <배트맨> 같은 자경단 서사가 성립하기 어렵다.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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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쩌자는 말일까, 이곳엔 게토가 없으니까 게토의 음악 같은 건 집어치우자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스타일과 클리셰를 재현하는 데도 의의가 있다. 현재 힙합의 수요가 확장된 건 껍데기의 요염한 감촉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만큼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 힙합은 스타일과 클리셰에 지나치게 편중된 상태다. 게다가 이런 양식적 매력도 콘텍스트의 차이 때문에 몰입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요령 있게 처리해야 제대로 연출할 수 있다. 논점의 핵심은 현재 많은 한국 래퍼들의 작업물에서 로컬라이징이란 의제를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로컬라이징은 하나의 제약 사항이다. 창작에 따른 제약은 창작의 전망과 행동반경을 좁히는 장애물이지만, 창작자에게 미션을 제시하며 영감과 도전의식을 북돋기도 한다. 형형색색으로 엉클어진 큐브를 맞추듯 좁은 조건을 뚫어내며 창작은 고차원의 작업으로 승화되고, 그 미션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클리어 해 보이는 묘미도 있다. 이건 랩 가사를 쓰는 데 라임이란 제약이 붙는 것과 그 뿌리에서 다를 것이 없다. 서로 다른 지역적 조건을 간파하여 장르적 변용을 이루거나 그 조건을 뛰어넘으며 매력과 설득력을 갖춘 음악을 만드는 것이 한국 힙합의 미션이다.
사실 이런 방식의 변용은 상이한 환경에서 창작을 하는 이상, 창작자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어느 정도 필연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게 꼭 난해한 숙제만은 아니다. 한국 힙합이 태동한 90년대부터 00년대 중반까지는 로컬라이징이 자연스럽게 이뤄진 시기다. 특히 00년 초반까지는 한국에 존재한 적 없던 이 미지의 음악을 어떻게 ‘한국적’으로 이해하고 다뤄 볼 것인지가 뜨거운 논제였다. 이후 소울컴퍼니 등의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은 동년배 10·20대들의 현실과 창작의 고뇌를 말하는 가사를 썼고, 무브먼트 소속 오버 래퍼들은 삶에 대한 자조와 격려, 사랑 이야기 같은 보편적 주제로 호소력을 얻었다. 이는 미국 힙합 신과의 음악적·산업적·문화적 격차로 미국적 관습이 도래하지 못한 저발전의 상태가 낳은 역설적 풍요였고, 한편으론 미국적 관습을 포기하며 별도의 의제로 창작 활동을 한 것이다. 가령 키비가 2003년 발표한 ‘소년을 위로해줘’는 남성성의 사회적 강요에 저항하는 소년의 우울함을 토로하는 노래다. 당시엔 미국 힙합에 접근할 수 있는 인프라가 빈약해 정작 창작자들이 미국적 관습에 어두웠을 것이란 추정도 해볼 수 있다.
반면 비교적 번역하기 용이한 관습들은 익히 로컬라이징 된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관습들은 예외 없이 한국적 콘텍스트에 따라 변형되었다. DOC가 2000년에 발표한 '포조리'는 N.W.A의 'Fuck Tha Police'로 상징되는 미국 힙합의 치안 기구에 대한 대결의식을 재현한 시도라고 평할 수 있다. 게토는 다인종 국가가 관리하는 국가 내부의 식민지이고, 경찰은 불심검문과 상습적 구타로 흑인들을 억압해왔다. 'Fuck Tha Police'는 흑인들에 대한 치안 기구의 폭력 속에 태어난 트랙이다. N.W.A가 투어 공연을 할 때 경찰은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고 현장을 감시했다. 한국의 치안 기구는 국민들과 이런 억압적 관계에 있지 않고 강제력의 행사도 제한적이다. 오히려 ‘짭새’라는 멸칭에서 알 수 있듯 무능하고 부패한 공권력으로 조롱당하고는 한다. '포조리'가 야유하는 건 이런 공권력의 악취다. 'Fuck Tha Police'가 경찰의 인종 차별과 일상적 억압에 도전하는 곡이라면, ‘포조리’는 사회면 뉴스에 떠도는 거시적이고 단편적인 이슈(신창원 사건, 총기 발포 사고, 조폭과 붙어먹기)로 비리를 야유하는 세태 풍자곡이 되었다.
이 대목은 힙합의 저항정신이란 관습과도 직결된다. 힙합의 저항정신이란 곧 미국 흑인들이 처한 인종적 소수자의 자의식이며, 억압적 백인 사회를 향한 분노다. 한국 래퍼들은 계층적 자의식이 없는 보편적 정체성의 자리에서 저항정신을 전용했다. 한국 힙합의 사회 비판은 본토와 다른 방식으로 변용됐다. 민주화 항쟁과 노동 운동에서 비롯한 저항적 민중문화의 코드와 결합하고(MC 스나이퍼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사로 지식인 이미지를 치장하고(타블로 'Lesson' 시리즈) 비민주적 정권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에 합류하고(이명박근혜를 비판한 트랙들, 제리케이의 ‘우민 정책’과 ‘하야해’) 보편적 이슈에 대한 사회 비평을 개진하였다(UMC UW 'Media Doll' 시리즈, 제리케이 ‘콜 센터’).
한편 한국에선 인터넷이 힙합의 본거지로서 유사 게토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런 기능은 00년대 후반 경 심화됐고, 이를 주도한 것은 당대의 핵심 인물 버벌진트였다. 그는 자신이 겪은 수난의 무대로 스트릿이 아닌 리드머, 디씨 트라이브, 힙합 플레이야 같은 힙합 커뮤니티를 지목하며 네가티브한 에너지를 발사했다. 불특정 다수 커뮤니티 유저를 날 음해하는 '방구석 헤이러'라 부르는 한국형 배틀 랩의 관용구가 입안되었고 지금은 클리셰로 쓰인다. 같은 시기, 돈과 여자가 아닌 음악적 실력을 소재로 자기 과시가 재현되었는데, 유교적 위계질서가 힙합 신에도 뿌리내린 상황에서 이 새로운 관습은 스캔들과 해프닝을 일으키며 내부적 반발에 휘말렸다. 얄궂게도 버벌진트는 "한국화된 해외 음식을 경멸한다"는 비유를 입에 물고 장르의 원형을 관철해야 한다 주장하는 '장르 사대주의자'였다. 그런 그도 현지화를 통해서야 본토의 관습을 몸소 누려보는 소망을 이룬 셈이다.
2010년대 <쇼미더머니> 시대가 열린 후 한국 힙합은 ‘전면적 미국화’라는 길로 진입했다. 허슬과 스웨거, 돈과 여자, 남근의 찬미 같은 개념이 무더기로 수입됐고, 이런 미국적 관습을 어떻게 로컬라이징 할 것이냐는 보다 까다로운 미션이 주어진 것이다. 동시대 래퍼 가운데 미국 힙합의 관습을 가장 열렬하게 신봉하는 음악가는 일리네어다. 그들은 스웨거 힙합이 한국에서 낯설던 2010년대 초반부터 초지일관 돈 자랑 가사, 으스대는 가사를 썼다. 그때만 해도 힙합은 비주류에 가까웠고 그들의 연 수익은 고작 1~2억이었다. 때문에 “지네가 지드래곤이야, 제이지야. 벌면 얼마나 번다고 돈타령을 해.”라는 리스너들의 불복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리네어는 부단한 창작과 자기 포장을 통해 몸값을 높여왔다. <쇼미더머니>의 도래에 의지해 이제 랩 머니는 수십억대로 치솟았고, 스웨거 힙합은 한국 힙합을 획일화했다. 이것은 도끼와 콰이엇이 본토의 관습을 선구적으로 퍼트린 결실이기도 하지만, 그들 스스로 본토의 관습을 설득력 있게 재현할 콘텍스트를 창출한 측면도 있다.
재미있는 건 이런 집념에도 불구하고 일리네어조차 본토의 관습을 백 퍼센트 재현하진 않았다(혹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일리네어식 돈자랑 가사는 겸손을 강요하고 물질을 향한 탐욕의 드러냄을 배격하는 한국에서 사회적 거부감을 피하기 힘들다. 데프콘이 ‘프랑켄슈타인’으로 도끼의 졸부 근성을 디스한 건 그런 잠재적 여론이 개별 음악가의 창작을 통해 불거진 사건이다. 도끼가 이런 무형의 압박에 대답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의외로 바른생활 이미지다. 나는 남에게 피해도 안 주고 흥청망청 대지도 않으며 성실하게 산다고 웅변하는 것이다(“난 술 담배 안 해. 쌍스러운 욕도 입으로 안 뱉어. 난 싸우지도 않아. (...) 열심히 일하며 살뿐 낭비 않네.”, ‘111%’ 중에서) 본토의 래퍼들은 서슴없이 낭비를 자랑하고, 마약과 범법, 향락을 가사에 절여낸다. 하지만 도끼는 “마약 조사와도 검찰들은 날 못 잡네. 생긴 거완 다르게 바르게 살아왔네.”라고 자신이 사회 질서와 도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 점에서 일리네어의 돈벌이 캐릭터는 게토의 허슬러보다 근면한 젊은 사업가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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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거 힙합의 득세와 함께 한국 힙합의 미국 힙합 되기는 전면화했다. 스웨거 같은 주제의식에 머물지 않고 소재와 표현의 클리셰를 따라가고, 때론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을 따라 읊는 경우도 보인다. 이건 '힙합 LE 뮤비 자막' 인프라가 보급되어 본토의 동향에 용이하게 접근하게 된 세대가 주축을 이루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 중 하나는 자신의 출신지를 외치는 한국 래퍼들이 예전에 비해 늘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미국 힙합 신은 동부와 서부, 남부, 브루클린과 컴튼, 왓츠, 애틀랜타 같은 출신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그것을 비트 위에서 외친다. 저 도시들은 힙합의 발상지이거나 생활환경과 음악 활동이 연계된 토대가 단단하다. 하지만 로컬 신이 없다시피 한 한국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가사는 메아리 잃은 외침에 그친다.
리듬파워가 방사능으로 활동하던 2010년에 발표한 앨범 ‘리듬파워’는 래퍼의 출신지를 본격적으로 외친 선구자격이다. 앨범에 수록된 ‘인천 상륙작전’은 월미도 바이킹과 오이도 같은 구체적 기호를 통해 지역색을 어필하는 데 성공한 편이다. 하지만 멤버 보이비는 힙합 LE, 힙합 플레이야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래퍼들이 출신지를 외치는 걸 따라 해 보고 싶었다’ ‘사실 인천에 그렇게 큰 의미는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로컬 신의 부재는 그 후 데뷔한 '힙합 LE 세대'에게서 적나라하다. 씨잼이 제주도에서 왔다고 말할 때, 제주도가 힙합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제주도에서 음악을 한 적도 없고, 자신이 만드는 음악에 아무런 지역색이 들어 있지도 않다. 심지어 창모는 자신의 동네 경기도 덕소리의 주변부적 성격을 강조하며 서울에서 귀하게 자란 알 수 없는 누군가를 "니 삶이 무슨 할렘이노?"라고 비난한다. 그렇게 치면 덕소리는 무슨 할렘인가? 그냥 수도권 변두리 중 하나지. 창모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 교습을 받을 만큼 곱게 자란 몸 아닌가? 한반도에서 물리적 악조건을 할렘에 비견할 수 있는 곳은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 밖에 없다. 다들 학교랑 학원을 오가다 홈레코딩 마이크 구입하며 랩 시작한 거 뻔히 아는데 저런 말을 하다니.
한국 힙합 신에 로컬적 특색을 더하려 한 시도는 예전부터 드물게 있었다. 서울 홍대를 제외하고 로컬 신이라 할 만한 곳은 DMS 크루가 활동한 부산과 클럽 힙합 트레인이 있는 대구다. 이 두 지역 출신 뮤지션 다수가 언더 신과 상업 신에서 활동하고 있다. MC 메타와 이센스, 마이노스, 사이먼 도미닉, 킵루츠가 대표적이다. 이센스와 마이노스는 'U Never Know'에서 조인트 하며 'Represent 대구, Represent 힙합 트레인'을 외쳤고, 제이통은 자신이 South Side 남쪽(부산)에서 왔다며 구체적 캐릭터를 형상화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대구 사투리로 라이밍을 한 MC 메타의 '무까끼하이'다. 하지만 이런 간헐적 움직임이 일관된 흐름으로 지속되진 않았다. 로컬 신의 기반을 강화하기보다 중심부의 음악에 곁 반찬으로 차려졌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최근 나타나는 '출신지 Represent'가 주는 교훈은 이렇다. 어떤 장르적 요소를 재현할 때 자신이 음악을 하는 '장소'의 조건을 고려하여 음악적 내용과 맞물리도록 설계하지 않으면 재현을 위한 재현, 알맹이 없는 클리셰에 머문다. 더 나쁘게는 '본토 힙합'의 스웨거를 흉내 내보는 자기만족에 빠진다. 알다시피 이런 음악은 감흥이 아니라 실소를 준다. 다만 한국 힙합이 급격히 상업화·미국화하는 절정에 이른 지금 상황은 흥미롭고 말할 거리가 넘친다. 창작자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 수행하는 창작의 패턴과 자신이 처한 창작의 조건을 일깨워 주고, 짜임새 있는 음악을 만들도록 화두를 제시하는 것이 장르 비평의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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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처한 지역적 현실을 의식하고 장르적 로컬라이징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흔치 않은 사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블랙넛이고 하나는 <쇼미더머니>의 신성 우원재다.
힙합에는 스트릿 크레드(street credibility)라는 관습이 있다. 직역하면 거리에서의 명성이다. 범죄와 마약, 가난의 소굴 게토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누가 더 위험하고 준법을 거역하는 삶을 살았는지 채점하며 남근의 크기를 겨루는 척도다. 말했듯이 게토 같은 빈민가-범법 지대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스트릿 크레드라는 개념도 성립할 수 없다. 거론할 수 있는 전과 이력이 없다 보니 스윙스처럼 ‘센 캐릭터’의 진정성을 증명하려고 학창 시절 일진이었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진다. 혹은 마약 전과를 가진 미국 래퍼는 스트릿 크레드를 가산받지만, 이센스는 울면서 참회의 기자회견을 했다. ‘모솔’에 ‘아싸’를 자처하며 남근의 강력함이 아니라 남근의 비루함을 고백하는 블랙넛은 이런 로컬라이징의 난관을 손쉽게 우회한다. 사우스 브롱크스가 아닌 인터넷 동호회가 장르적 발상지이며, 믹스테이프 배포와 MC들의 교류가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지역적 실정 또한, 자녹게 출신에 인터넷 하위문화를 재현하는 블랙넛의 캐릭터와 맞아떨어진다.
블랙넛은 자신을 에미넴에 비견하고는 하는데, 사실 적절한 비유다. 인종적 정체성이 배타적이며 인종적 권력관계가 물구나무서는 블랙뮤직 커뮤니티에서, 백인은 음악적·남근적 자격을 인준받지 못하는 '소수 인종'이다. 라킴의 말처럼 나스가 거리에서 자라나 거리의 이야기를 한다면 에미넴은 그와 다른 성장배경을 갖고 있다. 거리에서의 삶을 회고할 수도 거리의 형제들을 호명할 수도 없다. 에미넴은 이혼한 부인과 자신의 어머니, 유명 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저격하고 백인 쓰레기라 자칭한다. 스트릿 크레드를 획득할 수 없는 태생적 조건을 미치광이 광대 캐릭터로 대신하며 승부를 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현실에 밀착된 방식으로 남성성이란 화두를 추구하면 갱스터와 마약상이 아니라 열등감에 사로잡혀 인정투쟁을 벌이는 ‘아다’가 탄생한다.
뿐만 아니라 블랙넛은 로컬라이징이란 의제를 명확히 자각하고 그 자체를 창작의 서브 테마로 가지고 노는 래퍼이다. 그가 부른 ‘배치기’는 싸구려 토종 힙합의 대명사 그룹 배치기의 이름을 가져온 곡인데, 그는 역시 한국적 사이비 힙합 ‘발라드 랩’을 부르며 “힙합은 원래 그런 게 아닌데 막 총 쏘고 대마초 빨고 해야 개간지인데 너를 위해서라면 나 막귀가 될게 너를 위해 나 신토불이 할게, 꺼져 eminem”이라고 풍자한다. 미국과 한국의 콘텍스트 차이와 그에 따른 텍스트의 간극에 대한 장르 비평을 음악을 통해 개진한 것이며, 자기 음악의 폭력성이 실은 미국적 관습의 본질일 뿐이라고 비꼬는 것이다. 블랙넛은 간악하지만 굉장히 영리한 래퍼다.
하지만 보다 성숙한 방식으로 로컬라이징을 수행하는 건 우원재 '시차'다. 그가 이 노래에서 미국 힙합의 관습 ‘허슬’을 재현하는 모습을 보라. 우원재가 작사에 접근하는 방향이 다른 래퍼들과 어떻게 다른지, 대중이 왜 우원재의 가사에 새롭다며 호감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 '허슬'의 용례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며 돈벌이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힙합이란 음악이 할렘가를 벗어나는 동아줄이며, 개인의 수완 외에 가난을 극복할 방도가 없는 미국 흑인들의 현실이 낳은 관습이다. 때문에 허슬은 마약 판매 같은 불법적 행위를 지칭하기도 한다. 미국 지향적 경향이 심화된 쇼미더머니 시대에 허슬은 스웨거만큼 자주 들먹여지는 클리셰로 수입됐다. 하지만 게토가 없는 한국에서 허슬은 음악적 다작을 칭하는 의미로 한정됐고 지역적 현실과 융합되지 않고 있다. "돈 벌어 돈 벌어" "나 죽고 나서 쉴게" “커져가는 돈벌이 돈 돈 돈벌이 워!”처럼 서사적 설득력이 아닌 동어반복의 상투성을 전시한다. "한국 힙합은 다 똑같다, 허세다"라는 대중의 피로감은 이해가 간다.
우원재 '시차'는 작업에 몰두한다는 허슬의 요점만 취하고 가사의 배경과 내용을 자신의 현실에 맞게 조율한다. 그는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거리를 활보하는 게토의 마약상이 아니라, 교수님의 꾸중 때문에 문신을 감추고 강의실에 가는 힙합동아리 대학생이다. 밤을 새워 모니터 앞에서 랩 하고 뜬 눈으로 다시 강의실에 가는 게 그의 일과다. 그가 허슬을 통해 저항하는 것은 게토의 가난과 경찰이 아니라 모든 이의 일과를 한 가지 패턴의 초침에 맞추는 한국의 평생 입시제도다. "일찍 일어나야 성공한다"는 사회에서, 밤과 낮을 바꾸며 자신 만의 꿈을 뜬 눈으로 꾸고 있다. 이건 홍대 힙합 동아리라는 우원재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지만 보편적 공감대가 강력하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라면 무언가를 떠안으며 혹은 무언가로 탈출하며 낮과 밤의 시차를 바꾼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과제 수행이건 시험공부이건 공모전 준비이건 편의점 알바이건 취미 활동이건 간에 말이다. 이곳은 불면의 상태를 인위적으로 끌어내는 에너지 드링크의 과용이 이슈가 되는 사회 아닌가. "난 쟤들이 돈 주고 가는 파리의 시간을 사는 중이라 전해"라는 가사는 듣는 이들의 고되고 하찮은 일상을 낭만적 여행지로 초대하고 그들의 어깨를 두들겨 준다.
창모가 ‘난 비닐하우스 출신 허슬러 돈 훔쳐’라고 하면 “니가?”란 말이 튀어나오고, 오케이션이 "돈 못 벌면 뒈지기로"라고 하면 "어쩌라고?" 싶고, 스윙스가 ‘게으른 래퍼’들 욕하며 잘 먹고 잘 산다고 뻐기면 “너 잘 났다”는 생각만 든다. 하지만 우원재와 로꼬가 '사호선 첫차를 타고 집에 간다'라고 말할 때, 듣는 이들은 티브이 속 랩스타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이렇듯 창작자의 개별성과 듣는 이의 개별성이 접속되며 보편성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래퍼가 직접 가사를 쓰는 작사 양식을 지닌 힙합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많은 래퍼들은 이미 돈더미에 오른 '과거완료형'의 가사로 허슬을 과시하고 이유도 없이 "혼자 화나"있다. 하지만 우원재는 세상의 비웃음을 올려다보는 ‘현재 진행형’의 가사로 자신의 왜소함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에 불복한다. 그는 게토의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자살률과 감정노동의 나라에서 정신적 폭력에 쫓기며 '알약'을 복용한다. 이런 진솔한 스탠스가 서정적 표현력과 어울려 “모두 비웃었던 동방의 소음이 어느새 전국을 울려대”라는 단 한 줄의 자기과시에 울림을 불어넣는 것이다.
블랙넛이 열등감에 찬 캐릭터를 방패 삼아 나 보다 약한 자를 괴롭힌다면, 우원재는 항상 악과 분노에 받혀있지만 누구도 모욕하지 않는다. 오직 세상의 지배적 질서라는 나 보다 거대한 대상을 노려보고 삿대질하며 듣는 이에게 통렬함을 준다. '시차'는 근래 상업 차트에 오른 힙합 트랙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독창적이며 떳떳한 가사적 성취를 이뤘다. 한국 래퍼들은 이 신참 래퍼에게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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