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소련의 정전협정 결정이후 중국의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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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는 스탈린 사후 모택동이 소련에게 과거와 같이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션즈화는 자신이 수집한 500여건의 한국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문서에 따르면, 마오쩌뚱은 스탈린이 생존해 있을 때 아주 자세한 분야까지 보고를 하고 지시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에는 소련지도자들의 의견을 그렇게 많이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오쩌뚱은 소련의 의견을 존중해 양보를 제안하기는 했으나 구체적인 담판과 종전의 실현과정에서 전투와 대화를 병행하는 전술을 구사했고, 소련 지도자들은 마오쩌뚱의 결정을 따랐다는 것이다.

4월 1일 몰로토프는 “부상당한 포로를 교환하고 쌍방이 회담을 재개해서 포로송환 문제를 전반적으로 해결하고, 정전협정도 체결해서 조선전쟁을 종결시켜야 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은 정전협상과 함께 유엔군과 전투를 계속하는 것을 최우선에 두고 있었다.
1953년 말까지 지원군은 반상륙작전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19개 군단에 135만명을 배치해서 진지가 강화되었고 작전에 필요한 물자도 충분했다. 공격과 방어 모든 선택이 가능했다.

1-4월 사이에 지원군과 인민군은 총 770여회의 전투 통해 5만명에게 피해를 주었다.
지원군 공군은 1/4분기에 399차례에 걸쳐 4,093대의 전투기를 출두시켜 미군전투기 50대를 격추하고 16대를 손상시켰다.

3월 31일 지원군 제9병단 사령관 왕지엔안은 지원군사령부와 중앙군사위원회에 전보를 보내 5월 상순에 한차례 전략적 반격을 실행할 것을 제안했다.

“충분한 조직적 준비와 주도면밀한 계획아래 우리 1개군단이 적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의 각 정규군이 일제히 반격을 가한다면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고 적들을 공포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483)

4월 20일 떵화는 전문을 보내 ‘반격예정 시간은 6월 초에 시작해 7월 상순에 종결할 예정이며, 모든 준비업무는 반드시 5월말까지 완성하고, 이후의 사태진행을 보면서 다시 결정한다’ 고 지시했다.

4월 25일 마오쩌뚱은 작전의 실시여부는 5월 중 적절한 시기에 다시 결정한다고 지시했다.

4월 30일 펑더화이는 만약 회담이 성과가 없으면 6월에 계획대로 작전을 수행한다고 지시했다,

5월 11일 떵화는 6월 1일부터 공격을 실시한다는 지시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판문점 회담이 여전히 일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서 6월 이전에 정전협정에 서명할 가능성이 크지 않기 때문에 전투중인 각 부대는 모든 준비를 반드시 5월 30일 전까지 완성해야 한다. 6월1일부터는 계획대로 예정된 목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그러나 지원군의 군사작전은 5월 13일 앞당겨 실시되었는데 이는 미측과 정전협상이 원할하지 않게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5월 16일 중앙군사위원회는 “현재 정전회담이 계속해서 지연되고 있지 때문에 언제 전투가 중단될지 판단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조선에서 우리의 작전 방침은 여전히 과거에 제안된 안정적으로 장기전을 지속하는 방침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지시했다’(485, 주66, 항미원조전쟁사, 제3권, pp.395, 399-401)

5월 25일 유엔군이 수정안을 제시했으나 지원군은 계속해서 공격했다

5월 27일에는 더 대규모로 하계 반격작전의 2단계 공세를 전개했다

6월 1일 지원군은 공격대상을 남한군에 지향한다. “현재 상황과 판문점 회담에 근거해 현 반격작전의 주요 타격대상이 이승만 괴뢰군임을 확전했으며, 따라서 단호화게 공격해서 적들을 대거 섬멸시키고, 영국 등 추종세력의 군대에 대한 공격은 잠시 중단하며, 미군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공격은 하지 않는다(중대급 이하의 부대만 공격), 그러나 원래 계획했던 전투준비는 그대로 계속진행하여 전투가 필요할 때를 대비하면 어떤 적이라도 우리를 공격하면 반드시 철저하게 분쇄한다”는 것이었다.(487)

6월 16일 중단된 이 공격은 58만 평방미터의 진지를 확대했으며, 적군 41,000여명이 사살되거나 부상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