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젠하워는 집권하자 마자 중국의 조속한 정전협상 참가를 강압하기 위해 다섯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측면공격, 2. 동북지역 폭격, 3. 연해의 교란작전, 4. 원자탄 사용, 5. 중국대륙 공격
다섯가지 모두 중국을 직접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조우언라이는 6월 5일 아이젠하워의 방안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자신이 다섯가지를 모두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앞의 세가지는 이미 중국이 대비하고 있었으며, 뒤의 두가지는 엄청난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미국과 동맹국들이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489, 주72, 주은래군사문집, 제4권, p.322)
션즈화는 6월 17일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이 중국에게 더 유리한 입장을 조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이 회담을 중지하고 군사행동을 재개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6월 19일 펑더화이는 정전협정 서명을 미루고 남조선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했으며, 6월 20일 남한군 1만 5천명 규모에 대한 공격작전을 마오쩌뚱에게 제안했다.
마오쩌뚱은 6월 21일 펑더화의의 남한군 공격작전을 승인했다.
6월 25일 떵화등은 일선 강부대에 명령을 내려 남한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20병단은 임무 완성후 2-3개 군으로 나눠 최전방에서 제한적인 확전을 시도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6월 29일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는 전쟁포로의 석방이 심각한 사안이지만 유엔군은 석방된 전쟁포로를 추격하고 있으며 정전협정의 발효시기를 확정하기 위한 쌍방대표단의 회담재개를 제안했다.
7월 6일 지원군 제20병단은 7월 13일 공격을 개시해 5-10일 동안 전투를 진행하는 방안을 결정했다.
중국은 7월 3일 외교부부부장 우시우첸을 통해 자신들의 마지막 공세 계획을 소련에 보고했다. 중국은 클라크의 서한과 자신들의 공격계획을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첫째, 7월 5일 클라크에게 회담 재개에 동의한다는 회신을 보내기 위해 준비한다.
둘째, 합의서에 서명하기전에 이승만 군대에 타격을 입히고 전선을 남하하기 위해 준비하고 그 결과를 근거로 휴전선을 정한다.
셋째, 7월 5일 이후 협상을 재개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정전협정 실시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한다
넷째, 회담 재개를 위한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참모들과 통역요원들은 정전협정 서명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이를 위한 장소를 준비한다.
다섯째, 정전협정 서명의식을 7월 15 일 쯤 진행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이런 보고를 하면서 중국은 자신들의 공격이 진행되고 있는 정전협정체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임을 설명했다. 이승만 군대가 특별히 중요한 대응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492, 주76, 소련 외교부 제17286호 비밀전보, 1953년 7월 3일, АПРФ, ф. 3, оп.65, д. 830, лл. 136-147, )
소공중앙주석단은 7월 4일 한반도의 정전협상에 대한 중국의 관점과 입안에 대한 조치에 동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492, 주77, 소공중앙주석단회의 제14호 기록 개요, 1953년 7월 4일. АПРФ, ф. 3, оп. 65, д. 830, л.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