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대도시 부산의 노선도를 살펴보다가,
낙동강 부근의 역 중에서 하나를 골라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재작년에 부산 여행을 갔다가 돼지국밥과 사랑에 빠지게 되어서....ㅎㅎ 내일로 여행으로 처음 갔는데, 처음 내리자마자 물떡부터 사먹었어요. 고등학생 때 학교 앞 분식점에서 물떡을 팔았는데 그게 너무 맛있었던 기억이 있어서...
아무튼 돼지국밥 한 번 먹어본 이후로 '부산'하면 '돼지국밥'이 제일 먼저 튀어나오네요. 물론, 감천문화마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도 너무 즐거웠어요.
그 당시 나온지 얼마 안된 바나나 초코파이를 너무 먹고싶어서 부산 편의점에서도 사먹었던 게 기억에 남아있네요. 어묵이라도 하나 더 먹고 올 걸.... 후회됩니다.... 다음에 부산을 가게 되면 다른 역사적 의미가 담긴 곳들에 가보고, 광안리 해수욕장도 한 번 방문해보고 싶어요! 의외로 서울 촌X이라서... 하하 이렇게 하나하나 역 이름에 담긴 의미들을 다시 되짚어보는 게 저에게는 너무 재미있네요.
서론이 너무 길었나요?ㅋㅋㅋ 아, 원래는 수도권 다른 노선을 먼저 소개시켜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가 아무래도 수도권 이외의 도시에 사시는 독자분들은 독자님이 살고 계시는 지역이나 여행을 가보셨던 곳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실 것 같아서♡
오늘은 부산 도시철도 2호선의 모라역의 일화에 대해서 소개시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출처는 최하단에 적어놓겠습니다. 혹시라도 제 글을 읽고 구체적인 내용을 보고싶으신 분들은 참고해주세요~^^
자 이제 진짜진짜 시작해보겠습니다.
먼저 모라역의 표기는 한자로 毛 터럭(모), 羅 벌일/그물(라) 로 표현하는데요,
직역하면 '얇은 비단'이라고 합니다. 먼저 이 언어적 의미에 얽힌 한 조선 왕의 일화를 소개시켜드리려 합니다.
#조선 성종 4년, 계사년(癸巳年), 1473년
3월 3일
풍속이 지나치게 사치하므로
서인(庶人)이 모라(毛羅) · 교초(膠草)로 만든 갓을 쓰는 것을 금하도록 함.
통일신라 이후로 왕의 시호에 成이룰 (성)자가 붙으면 대부분 전성기의 왕이에요.
네, 바로 조선의 성종은 조선의 태평성대를 구가한 왕이랍니다.
(개인적으로 세종대왕도 들고 싶은데... 아니! 실제로 신하들도 그렇게 높여주고 싶었는데
'아냐, 아직은 일러!'라는 의견이 있어서 성종이 아니라~세조가 아니라~ '세종'이 되었다고 합니다.ㅎㅎ
- 바로 다음 포스팅에서는 왕의 시호에 대해서 쉽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서인은 '반 양반'이라고 생각하시면 쉬울 것 같아요. 양반의 자식이긴 자식인데, 첫째 부인이 아닌 첩의 부인이 낳은 자식이랍니다. 조선은 남존여비로 대표되는 엄격한 '성리학' 질서에 의해 유지되었기 때문에 양반의 자식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차별받았던 존재입니다.
허균의 『홍길동전』에서도 이 상황을 보여주는 대사가 나오죠?
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호부호형'에 관한 대사입니다.
"왜!!!나는!!! 아빠를!!!아빠라 못하고!!!!! 형아를!!!! 형아라 못 불러요!!!!!!!땡깡땡깡!!!!!"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조선시대에는 아빠는 같지만 엄마가 다른 형제, 즉 이복형제들은 '남'과 같은 사이인 경우가 99% 정도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빠가 다르지만, 엄마가 같은 이부형제의 사이는 좋은 경우가 훨씬 많았다고 해요. 100%는 아니고, 그러한 경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는 홍길동 형이 "형아가 아니니까"라고 대답해 줄 수 있겠죠?
다시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저 3월 3일 기사를 쉽게 해석해보면
"서얼, 너네들은 진짜 양반도 아니면서 왜이렇게 사치스러워!
서얼은 서얼답게 검소하게 하고 다녀^^"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이 사건 이후
수양대군으로 더 유명한 세조가 편찬하기 시작해 성종 대에 완성한 '경국대전'에서는
서얼은 문과에 응시하지 못하게 아예 법으로 땅땅!! 정해버립니다.
(조선시대에는 싸우는 武 무과보다, 공부하는 文 문과가 더 정치적으로 힘이 강했어요.)
(TMI: 서얼들이 말을 잘 안들었나보죠?ㅋㅋㅋ)
네, '얇은 비단'이라는 한자의 의미에서 이렇게 길게 얘기를 하게 되었네요.
자 이제 '모라'의 또 다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첫 번째는 우리나라 고대 국어에서는 '마을'을 '모라'로 표기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고요. 두 번째로는 모라역이 낙동강 근처에 위치해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낙동강의 모래가 쌓여서 만들어진 땅을 의미하는 '모래개' (줄여서 '몰개')에다가 넓은 땅을 의미하는 羅(라) 자가 합쳐져서 모라가 되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이 어원에 대해서 더 살펴보기 보다는 모라동에 있는 '운수사'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소개시켜드리려 합니다.
무려 가야 때!! 또는 신라 법흥왕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절입니다. 굉장히 오래됐죠? 법흥왕이 6세기의 왕이니까... 지금은 21세기니까....숫자로 다시 적으니 오래되었음을 더 느낄 수 있네요.
그런데, 그 건물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타서 17세기 중엽에 다시 지은 것이라 합니다.
오늘 들려드릴 내용은 이 운수사라는 절에 계셨던 한 스님의 이야기인데요, 믿거나 말거나~~~ 재미로 봐주세요.
총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여러분의 궁금증을 자극시켜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찾아보실 수 있도록 두 번째 이야기만 살짝 재밌게 각색해서 들려드리겠습니다. 아... 혹시 궁금한데 귀찮고 그러신 분이 많으면 다음에 게시물 수정을 해서 추가할게요!ㅋㅋㅋ
"불국사 그게 뭐임? 듣보잡임?" 할 정도로 운수사가 옛날에는 굉장히 핫플(Hot Place)이었대요.
그런데, 운수사 주지스님은 이게 처음부터 별로 탐탁치 않으셨대요.
(굉장히 귀차니즘이 심하셨던건지 수행에 방해되셨던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상황극
옛날에는 인터넷이 없으니까, 절에 한 소년이 찾아와서 "똑똑~~ 주지스님 계세요??? 템플스테이 하고싶어요!!!!!!" 하면서 3박 4일 정도??? 주지스님께 신청을 했어요.
그랬더니 주지스님이 다 들리게 "(궁시렁궁시렁) 귀차낭" 이렇게 투정을 부렸어요.
기분 상한 소년이 "주지 스님이 신도를 귀찮아하시면 어떡해요!!!!!!"하니까
주지스님이 "제발좀 오지마 다들!!발 디딜 틈이 없네 진짜!!!!!"하면서 화를 냈어요.
그러자 소년이 주지스님께 신도를 줄이는 꿀팁아닌 꿀팁을 주게 되는데...
"저어어기 두꺼비바위가 있는데 턱을 쳐버리세요. 그러면 사람들이 안 올거에요."
주지스님 여기서 한결같으신 게 그 두꺼비 바위 턱 치는 거 다른 스님 파견하셨대요.ㅋㅋㅋㅋ
어??? 그런데 정말 그게 효과가 있는거에요.
시끄러운게 싫으셨던 모양인 주지스님은 처음에 "아이고~ 조용하니 좋다~~"하면서 좋아하셨대요.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공포.) 사람들이 처음 하나도 안 왔을때는 좋았는데, 너어어어무 계속 안오니까 주지스님이 갑자기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서 그 소년을 찾기 시작했어요. 아마도 어떻게 다시 되돌릴지를 물어보고 싶으셨을 것 같은데... 행방이 묘연해진 소년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고, 운수사는 그 뒤에 망했다고 하는 설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끝.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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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두산백과를 토대로 하였습니다.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모라동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모라 뒷산 운수사와 두꺼비바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818886&cid=55781&categoryId=56357
(이야기 1을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클릭!) - 두산백과 - 모라동
탐탁치 > 탐탁지 로 바꿔서 읽어주세요.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