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팀] 인간답게 살고 죽을 수 있을까? -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in #kr-book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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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그냥 우연히 내게로 오는 것이다.

서가에 꽂힌 책이 유난히 내 앞에서 빛을 발하면 나는 그 책을 안 읽고서는 못 배기는 것이다. ‘너에겐 내가 필요해’라고 소리 없이 책등의 제목이 나를 움켜쥐면 ‘오, 너는 여태 어디 있었니?’라고 흔쾌히 집어 들밖에.

한동안 심리학 책을 멀리했는데-내 심리를 알고 싶어 들여다보지만 때로 길을 잘못 들면 깊은 절망과 우울로 인도하는 학문이 심리학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도 내가 나를 버틸 수 있을 때 나를 지탱해 주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 그렇겠지만.

빅터 프랭클이라는 저자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험을 통해 확립한 심리학 책이라니까 아무튼 무조건 확 끌리는 데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자꾸 나를 건드리는 거지.

‘지식인의 골방에서 쓰인 어려운 심리학 이론은 아니겠군.’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 심리학자. 수용소의 경험을 심리학 이론으로 정립.

아무튼 내가 좋아할 만한 책이라는 건 확실해.

심리학 책치곤 두껍지도 않고, 이론이나 개념어 설명을 늘어놓은 책도 아닌데 한 챕터 읽을 때마다 ‘수용소의 상황이란 어땠을까’ 상상해보고, ‘이건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아.’ 내가 겪은 장면들을 떠올려 빗대어 보느라 책고개를 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쉰들러 리스트>를 생각해 보았다.

수용소 안에서 만나는 착한 적군과 나쁜 아군에 대하여.

내 일상에서 만나는 인간에 대한 배신감은 주로 그렇게 네 편 내 편을 내 맘대로 상정했을 때 만나곤 했다. 내편은 언제나 정당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일까? 이것은 나에게 꽤나 오래된 질문이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질문이다.

10-20대 언저리는 정말 유치하게도 절대선과 절대악을 상정하고 세상을 구분 짓고 싶어 했다. (그래야 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저열한 사회문화 풍토가 그걸 학습시켰다고 해야 할까?)

약소민족은 부당하게 고통받았으므로, 국가공동체나 민족공동체가 겪은 전쟁과 파시즘, 독재가 가져온 억압 기제는, 나를 무조건 고난 받은 민족편에 서는 것이 정의라고 믿게끔 만들었다.

경험의 때가 묻어가는 30-40대 사이에는 억압의 시스템과 부정의의 가면 따위들은 절대선이라고 믿었던 ‘우리들’ 안에서도 필연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건너편 절대악의 ‘그들’에게도 선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있음을 조금은 알게 되었으나 그래도, 약소국 또는 선한 공동체의 정당성을 위해 ‘우리들’ 속 작은 부정의는 눈감고, 우리들의 큰 ‘테두리’에 동의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데에 얼핏 동의하고 걸어온 듯하다.

이십 대쯤에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이해가 안 간 것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유태인이면서 주인공을 선한 독일인으로 내세운 것은 왜일까? 유태인을 선한 주인공으로 삼지 않은 이유는 뭘까? 유태인 중에 설마 ‘쉰들러’만 한 인물이 없어서 일라고?

전쟁을 일으킨 독일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기억이 있다. ‘쉰들러’라는 개인의 도덕적 성취를 일반화하거나 무리하게 이상화하는 것 같아서 내 (어린)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다. 맞다.

그런데 현실에서 부자보다 더 악독한 얼굴로 나와 마주하는 사람은 부자의 대리인이다.

얼굴이 안 보이는 부자보다 비열한 얼굴로 내 앞에서 침을 뱉고 갑질을 하는 대리인 놈이 더 때려죽이게 미운 것이 사람 마음이지 않은가?

지주 밑의 마름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밑에 카포들.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의 무리에서 내 편이었을 성싶은 ‘우리들’이 쉽게 저지르는 가해와 폭력은 건너편의 ‘그들’보다 뛰어난 악마성을 휘두르고도 뻔뻔하다. 그것이 전쟁을 살아내는 생존 방식임을 자랑하며 양심의 가책도 없는 모습으로, 참 태연하게도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전쟁상황에서만 그런가? 살펴보면 바로 내 주변의 가까운 이웃관계에서도 발견하는 ‘우리들’이 저지르는 교묘한 폭력성은 나를 심하게 좌절시켰었다. (우리들 안에는 물론 나도 포함이다.)

그러니 폭력과 전쟁의 시대 한복판에서, 강자의 편에 속한 자기 공동체의 정체성을 벗어나 - 그것이 곧 죽음임을 알면서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기를 선택한 ‘쉰들러’와 같은 사람들은 아주 극히 일부일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 이유로 더 숭고하고 위대한 것일 테지.

스필버그가 ‘유태인 학살 고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유태인의 인간승리라는 자축용 영화를 기록한 게 아니라 전범국가 독일의 부역자 ‘쉰들러’를 영화 소재로 선택한 이유가 역시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다.

인간의 속성을 무리나 공동체로 귀속하여 규정짓지 않고 ‘신 앞에 선 개인’으로 놓은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통찰력.

수용소라는 극한 장소에서 비루하고 동물스러운 본성을 서로에게 쏟아내는 인간군상들 사이에서도 참 고유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 그가 역설적으로 부럽다고 느껴지기까지 하다니, 나는 또 얼마나 부끄러운 인간인 건지. 흠.

인간의 품격이 동물로 떨어지는 맨 밑바닥 전쟁 수용소. 그러나 그곳에서도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을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바로 인간인 ‘나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인간은 몰랐던 걸까? 알고 있는데 잊은 걸까?)

돼지가 아니면 인간인 두 부류만 남는 수용소에서 이름 없이 고요히 인간임을 증명하며 죽어간 이들, 그들은 마름과 카포 유형의 돼지들이 내세우는 자기변명을 쓸어버리고도 남을 인간의 도덕적 성취와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보여 준다.

나는 아우슈비츠 같은 상황에 놓일 때, 내 자유의지를 내가 인간일 수 있는 선택을 하도록 쓰게 할 수 있을까?

인간을 인간답도록, 나를 나답도록 하는 선택. 나는 그런 선택의 결과로 살고 있나?

내편이 옳음을 증명하려고 사는 모습, 내가 옳음을 입증하려고 무리의 정당성을 쥐고 흔드는 최근 내 주위의 사람들, 내편이라고 여겼던 무리들에게 크게 지쳐있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네 편 내 편이 중요한 게 아니야. 너를 너답게 하도록 선택해. 네가 인간일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살아.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허망했던 인간관계에서 다시금 내 삶의 의미를 묻고 있던 이즈음, 책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게 나의 기존의 방식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이렇게 나에게 온 이 책이 필연적으로 느껴진다. (역시 이것도 나답다. 흠)

내 인생 세 번째의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 나를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오늘, 나에게 있는가?

수용소를 나가면 심리학 이론을 완성하려고 깨알같이 종이조각에 글을 쓴 빅터 프랭클.

그를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내게 한 그 의미를, 내일의 나는 찾을 수 있을까?

무너져가는 절망을 떨치려고 아내 또는 자식, 내가 이루고 싶었던 무엇을 머리와 가슴속에서 무한반복으로 끄집어내며 세상 또는 신이 나에게만 부여한 가치를 완성하려고 했던 수용소의 숭고한 사람들.

죽음을 이기고 자신만의 의미를 위해 살아낸 사람들.

인간은 크고 원대한 가치보다 이처럼 사소한 나만의 의미를 찾을 때 더더욱 살아갈 용기를 얻는 존재인 것이다. 정의와 공동체, 민족과 평화는 이 각각의 사람들의 생존과 존엄이 각각의 자리에서 꽃을 피울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우슈비츠의 실체와 직접 비교할 순 없지만 우리는 21세기에도 아우슈비츠의 본질이 드러나는 상징적 경험들을 각자가 서 있는 현장에서 한 두 가지씩은 대면하여 살아가고 있다.

나보다 약한 자들에 대한 무조건 혐오를 발산하는 한국사회의 흐름 속에서 아우슈비츠는 지금, 이곳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본다. 한국은 생존을 위한 매일의 삶이 공포영화인데다가 전쟁의 무시무시함이 가까운 미래이지 않은가.

진보와 정의, 노동과 사람의 진정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적군과 아군이 뒤섞이고, 미래가 불투명한 혼돈의 시대는, 먼 과거도 가까운 미래도 아닌 '바로 지금'이라고 느끼는 전쟁 같은 오늘, 또 오늘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야만 할 가치고 있고, 이루어야 할 나만의 의미가 있다면 여전히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말하고 있다.

그렇다. 이 지옥 같은 한국의 아우슈비츠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나만의 행동과 선택을 붙들 때에만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었던 공동체로부터 얼마 전 떨어져 나왔다.

한동안 내가 의미 없고 가치가 없는, 유용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기분에서 떨쳐 나지 못했다.

내가 끈질기지 못한 탓인가? 조직의 부당함과 관계의 무상함을 탓하지 말고 좀 더 강하고 끈질기게 사람과 공동체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지 않았나?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고 믿었으나 이제 나는 그곳에 속한 존재가 아니다. 나는 나의 쓸모를 어디서 찾고 있었던 걸까. 기능적이고 성과적인 조직의 부속품으로 나를 위치시켜 놓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만이 할 수 있고, 나만을 필요로 하고, 내가 해야만 하는 가장 가깝고 작은 영역에서부터 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의미를 차지 못하면 그 이상의 가치가 모두 허상인 것을 또 한 번의 실패로 가슴 아프게 깨달아 가는 중이다.

공동체 안에서든 밖에서든 나는 세상을 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택할 수 있는 나의 자유가 있다. 실패한 과거로만 느껴졌던 지나온 경험의 패턴과 씁쓸한 흔적들이 이제는 나에게, 온전히 나만의 의미로 다가왔다. 그것은 나만이 선택할 수 있었던 나만의 경험이자, 나의 존재방식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살아온 네 삶은 의미가 있어. 너의 과거와 현재는 오로지 너만의 것이야. 괜찮아. "

수용소 에세이처럼 느껴지는 책이지만 역시 심리서적이었던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오로지 나 자신만이 밝힐 수 있는 내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는다.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는 가장 가까운 곳, 내 안에 있었다. 잡히지 않는 뜬구름 속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내가 이루고 싶었던 열망들. 아주 작은 믿음들.

그것을 붙들고 이 암흑의 시대를 버텨야 한다는 것을 담담하게 증명해 준다.

내가 지나온 과거의 시련과 아픔들은 모두 나라는 '개인', 나만이 증명할 수 있는 존재 방식이기에, 아프지만 뜨겁게 품어 안아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살아내어 이 시대, 이 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것을.

과거와 현재의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이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아름다운 영혼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의 오늘 하루도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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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7일 후엔 삭제가 안되어 글쓰기 조심스러운 1인이에요^^
@pippi-mi님을 Seven Day Black and White Challenge로 지명해 봤습니다.
심심하실 때 한번씩 7일동안 흑백사진을 올려주시면 되는건데 부담없이 포스팅할 수 있는 방법이니 도전해보셔요^^

삭제가 안되다니... 새로 글을 꾸며서 제대로 올리고 난 후 처음 글을 지우려고 했더니 삭제가 안되는 거래... ㅜㅜ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