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eunhaesarang입니다.
오늘 이야기 할 인물은 유교 이상사회를 꿈꾼 조광조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의 제자였습니다.
무오사화 때 지방으로 유배되었던 김굉필은 조광조를 제자로 두었습니다.
김굉필 밑에서 성리학을 배우면서 김종직의 학풍은 대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중종 통치 시절 1510년 성균관에 들어간 그는 대학자 대접을 받으며, 5년 후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정통 사림 출신으로 반정 공신들에게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중종은 개혁가를 찾던 중이었는데 그를 적임자로 생각하고 바로 옆에 두며 개혁을 시작하게 됩니다
조광조는 인재 추천 제도인 현량과를 실시하였고, 도교에 입각해 제사를 지내는 소격서도 없앴습니다.
현량과를 실시하면서 지방 사림들을 중앙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는 이상적인 유학 정치인 도학정치를 꿈꾸었는데 관혼상제 예법을 담은 [주자가례]를 보급하며 백성들의 생활을 유교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지방 자치 규약인 향약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여씨향약]을 번역해서 4대 덕목도 보급하게 됩니다.
4대 덕목이란 덕업상권(좋은 일은 서로 권한다), 과실상규(잘못은 서로 꾸짖는다), 예속상규(예의를 서로 권장한다). 환난상률(어려울 때 서로 돕는다)입니다.
이 4대 덕목은 훗날 이황과 이이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된답니다.
사림파는 이런 개혁에 적극 지지를 했고, 훈구파는 좋지 않은 시선을 보냈습니다.
조광조의 개혁에 중종도 어느 정도 손을 들어준 셈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반정 공신을 구조조정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정 때 공을 세우지 않으면서 공신 행세를 하는 신하를 명단에서 제거하려고 하자 훈구파들이 반발을 한 것입니다.
중종도 적당히 훈구파와 타협하기를 바랐지만 구조조정을 단행해 버렸습니다.
이에 중종은 왕권 강화보다는 도학 정치에 더 관심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조광조를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 주초위왕 ]
마침 음모가 발생했습니다.
궁중에서 주초위왕(走肖爲王) 이라고 새겨진 나뭇잎이 발견되었는데, 주(走)와 초(肖)를 합치면 조(趙)가 되는데 이 뜻은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입니다.
훈구파는 조광조의 반역 음모라 생각했고, 결국 사약을 받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사림파가 탄압을 받았습니다.
1519년 기묘사화가 발생했고 이것이 세 번째 사화입니다.
조광조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외척들이 왕의 후계자 문제에 개입하며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네 번째 사화인 을사사화입니다.
중종에 이어 인종, 인종에 이어 명종이 1545년 왕위에 올랐는데, 명종의 외척 세력이 반대파와 사림파를 6~7년간 숙청했는데 200여 명의 사림파 대신들이 죽었습니다.
네번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사림파는 조선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방에는 서원과 향악을 중심으로 성리학이 뿌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유교 성현을 모시면서 성리학을 가르치는 서원이 1543년 처음으로 세워졌는데, 바로 백운동서원입니다.
이 서원을 세운 사람이 바로 주세붕이라는 인물입니다.
오늘은 유교 이상 사회 실현을 위해 힘쓴 조광조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SBS 드라마 여인천하의 장면이 아직도 선하네요! :)
지식스팀님 요즘 글이 안올라와 심심해요 ㅎㅎㅎ
지식업하게 자주 써주세요
오늘도 좋은 지식이 되는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해용
대학자 한명을 보내는게 참... 나뭇잎 하나에 가는군요. 이 장면이 극적인 요소가 있다보니 드라마에 단골 메뉴인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잘난것을 못보기 시기하는 것은 똑같은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하는가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역사 문화학을 부전공했는데, 이제 조선 역사가 가물가물하네요. 팔로우하겠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좋은 이야기 앞으로 많이 들려주세요
여씨향약 현판은 처음 보네요. 좋아요!
4대덕목은 참 좋았는데 뜻을 끝까지 이루지 못한것이 안타깝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