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자유와 구속, 그리고 미래] 2-3. 흑사병, 죽음 속에서 태어난 희망

in #kr-history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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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우리는 평소에 자주 쓰곤 합니다. 코인판에서는 저점일 때 추매하는 자가 일류라는 합성 스크린샷도 어디에선가 본 것 같네요. 바로 그 위기가 14세기 유럽에 찾아왔습니다. 만약 그 시기 시장에 상장지수가 있다면 그야말로 대 폭락장(?)에 해당하는 비극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일 것입니다.

사실, 지나고 나서야 이렇게 농담처럼 말할 수 있지만 당시 유럽 인구의 30~50% 가량이 없어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흑사병이야말로 인류 최강 최흉의 질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셈입니다. 십자군 전쟁과 거기에서 시작된 무역의 융성으로 시작된 첫 번째 유럽의 융성은 14세기 급격하게 발현된 흑사병으로 인해 뚝 하고 꺾여나갔습니다.

당시 유럽의 쇠퇴와 부흥에는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로 변화한 경제적 배경 뿐 아니라, 지구의 기후 사이클이 간빙기에서 소빙기로 접어들면서 변화한 기후가 꼽히기도 합니다. 유럽 경제 생산의 뼈대를 담당하던 농업과 목축업이 직격타를 맞아버렸다는 가설입니다.


사실 본격적인 소빙기 피해는 경신대기근으로 대표되는 17세기에 나타납니다만...

이 가설이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도 14C의 위기는 나타났습니다. 유목민들은 그들의 역사상 처음으로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이를 효율적으로 통치할 만한 행정력은 매우 취약했습니다. 원 황실은 각각의 군벌들의 영지로 이루어진 장원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게다가 세금을 거둘수도, 징병을 할 수도, 행정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죠.

이 때 마침 기후가 변하면서 터진 기근과 역병은 원나라의 붕괴를 향해 거대한 눈덩이를 굴려나가는 시발점이 됩니다. 사방에 퍼진 지방 호족들로 인한 통치권 상실, 기근을 다스릴 세금조차 없었던 텅 빈 국고, 그리고 주원장을 필두로 한 농민 반군인 백련교도들의 반란을 막을 수 조차 없었던 취약한 원은 바로 붕괴하게 됩니다.

고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몽항쟁을 거친 이후 피폐해진 고려는 원의 착취와 더불어 공민왕의 개혁 실패로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고 이후 이성계의 역성 쿠데타를 허용하게 됩니다. 일본 역시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으로부터 시작한 남북조 시대가 열리며 15세기에 이르기까지 긴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


다시 한번 통계 자료를 찾아보도록 합시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분명히 이런 기근을 겪었으면 GDP는 박살나 있어야 정상인데, 표를 보면 그렇지가 않아요. 다른 사료를 찾아볼까요? E.Jones의 The European Miracle을 보면서 한번 비교를 해 봅시다. 청조 말엽 중국의 인구는 약 4억 가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부양하는 피생산자는 750만명으로 인구의 2%도 채 안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체 인구의 98%가 어떤 방식으로든 생산 활동에 종사해야 겨우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원나라도 명나라도 아닙니다. 청조 말엽입니다. 반면 14세기 초에 프랑스, 독일, 영국의 4천만 인구 중 거의 15%가 농부들에 의해 부양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인구가 농업에 매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방식의 숙련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상한 일이죠? 다른 사료를 하나 더 보도록 합시다.

"식품가격은 하락하고 실질 임금은 올랐다. 토지 임대료는 하락했다.
1320년 하루에 1.5수를 벌던 건설 노동자는 1380년에는 하루에 4수를 벌었다.
14세기 중반-15세기 초 사이에 영국에서의 실질 임금은 2-3배 이상 폭등했다.
사람들은 더 많은 고기를 먹었고, 더 많은 맥주와 와인을 마셨다.
개인 식단에서 빵의 상대적인 중요성은 줄었다. 더 질이 좋은 빵을 먹었다.
프랑스 역사가인 Roy에 따르면, 1338년에 영주의 영지에서 일하는 프로방스 소몰이꾼은 보리로 만들어진 빵을 먹었다.
흑사병 후에, 보리 빵은 개에게나 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노동자들은 하얀 빵을 먹었다. ”
War and Peace and War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40% 가량이 깎여나가면서, 오히려 노동력에 대한 품귀 현상이 발생해버린 것입니다. 11세기부터 점점 퍼져나간 기술 발전과 중국에서 전래된 항해술들은 다양하게 퍼져나가면서 이런 노동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현실 생활에 녹아들어갔습니다.

서유럽이 무언가 우월해서, 혹은 더 머리가 좋고 발전해서 이렇게 위기에서 반등한 후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 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들에겐 두 가지가 있었죠. 하나는 중앙집중적인 전제 군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럽에도 군주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나라 이후 철저한 법가 통치를 이어 온 중국의 강력한 중앙 통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슨했죠. 그리고 지방 귀족들은 서로의 영향력을 견제하지만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피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럽은 상대적으로 중앙에서 규제되는 압력이 적었습니다. 게다가 길드의 발전과 더불어 찾아온 자유도시의 발전은 영주의 권한까지 상당수 빼앗으면서 기술과 물자의 통상에 제약이 사라져 갔습니다. 이는 향후 빠른 기술의 보급을 가능케 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탈국가적 금융 체계의 발전이었습니다. 템플러로부터 시작하여 사실상 100년 전쟁의 판도를 결정지은 영국의 양모 길드와 프랑스의 자크 쾨르의 금융 대결에 이르기까지 이미 금융은 국가나 왕실로부터 벗어나 넓은 시장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전근대적인 방역사, 이탈리아의 흑사병 의사입니다.

왕권의 통제를 벗어난 금융의 무서움은 100년 전쟁에서 더욱 소름끼칠정도로 무섭게 느껴집니다. 영-프 간에 벌어진 100년 전쟁, 특히 크레시 전투를 놓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국이 석궁병으로 프랑스의 기마 기사를 꺾었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외려 프랑스군에는 4천에서 6천 가량의 제노아 석궁병이 용병으로 참전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패배 원인을 열거하자면 매우 길어지지만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신용대부 체계의 발달 여부였습니다. 영국 왕실은 그 체계가 갖추어져 있어서 대규모의 장궁병을 고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템플러를 죄다 잡아족친 이후에도 프랑스의 재정은 구멍이 나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프랑스는 이런 경제적 책임을 모두 재무대신에게 돌려서 두 재무대신의 목을 잘라버렸죠.

프랑스 왕실은 울며 겨자먹기로 군자금을 일종의 국채 형식으로 일반 대중에게 수탈했고, 영국은 양모 무역권을 담보로 길드에서 돈을 마음껏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영국이 당시 인구수 4배를 자랑했던 프랑스를 잠시나마 압박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이런 금융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이후 2차 백년전쟁에서 영국의 패배와 프랑스의 부활은 겉으로는 성녀 잔 다르크로 미화되어 있지만, 사실은 프랑스 재무대신 자크 쾨르의 미칠듯한 자금 확보와, 영국 왕실이 담보로 한 양모 무역 독점권이 사실은 관세를 지급할 뿐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양국의 자금 동원력이 뒤바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템플러로 대표되고 이후 베네치아 공국으로 이어지는 레반트-지중해 일대의 무역로를 장악한 해상세력의 대두와, 이를 중심으로 한 화폐 플로린의 유통은 탈국가적 금융망을 만드는 뼈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뜩이나 취약하던 두 왕실이 100년 전쟁을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돈 앞에 무릎꿇고 권위를 바치면서, 유럽은 왕과 귀족의 국가에서 부르주아지의 국가로 탈바꿈하는 본격적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전쟁과 기근라는 엄청난 악몽이, 사회의 변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지중해를 벗어나면서 본격적인 대항해시대가 열립니다. 이는 시장이 더 커지고 더 넓어지며 규모가 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탈 지중해 시대의 경제와 금융의 발전은 단순히 경제 규모의 확대 뿐 아니라 이후 각국에서 보인 식민지 경영과 보호무역, 그리고 다양한 무역 장벽들을 이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을 줍니다.

다음 포스팅부터는 바다 내음이 풍기는 대항해시대의 금융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대의 슬픔인 4.3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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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금융과 함께 풀어주시는게 너무 좋네요^^
감사합니다ㅎㅎ

아픔없이는 성장불가능하죠. 역사를 보면 전쟁과 전염병을 통해서 인류가 계쏙 발전해나가는 모습이 보여서 역사공부를 꾸준히 하고있습니다.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다음편 대항해시대도 기대하겠습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무엇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지나고 나서 이해되는 것이겠죠
버블이 지나고 나야 버블인것처럼

저 흐름속에서 일말의 상황이해라도 할 수 있는 지혜가 있으신 분들의 솔직한 글을 본다는 행운이 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심한 시간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 기다릴게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ㅋ
다음편이 너무 기대되네요ㅎ

식견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래서 역사공부를 해야하는군요 ㅎㅎ
박식함에 감탄하고 갑니다^^ .

다양하 이야기를 너무 잘 풀어주시네요

다른 말로 풀이하자면 흑사병이라는 거대한 악재를 이겨낸 사람들에게 주어진 풍요로움이지요. 그 거대한 악재를 못 이겨낸 수많은 사람들의 몫을 나눠가진것 뿐입니다.

머릿속에 흩어져있던 역사의 파편을 선생님의 글과 함께 모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연계해서보니 정말 새롭습니다
언제 책한권 내주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금융으로 읽는 세계사를 이렇게 잘 풀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

긴 글이 이렇게 술술 읽히다니.... 흥미롭습니다 :)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흥미롭게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반적으로 동아시아 국가의 1인당 GDP가 낮게측정되는것은 이들이 유교중심의 농본주의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농부차이는 너무많이나는거 같네요. 그렇다고 동아시아가 먹는거만큼은 잘먹고살았냐면 그건 또 아닌거 같은데....농업생산력이 크게 차이 났던걸까요? 아니면 유통이 망해서 그렇다던지....

국경을 초월하는 금융산업, 그리고 지역단위의 길드의 번성, 이런것들로부터 유럽이 18세기 이후 동양사회를 앞서나갈수 있었다는걸 느낍니다. 글 잘보고 갑니다^^

금융의 관점으로 세계사를 되집어 보니.. 역시 인류의 역사는 돈의 역사군요. 뭘로 치장해도 말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