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외에 인쇄된 사진 속 인물은 그도 아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먼 일이 났나보다 싶었다.
죽었나? 설마..
그에게 박대통령은 불사신과도 같았다.
태어날 때 부터 대통령이란 사람은 그 얼굴 밖에 없었으니 그럴만도 했겠다.
아침에 눈 뜨면 떠 있는 해처럼. 어두워지면 떠 있는 달 처럼..
그랬기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과 사진 속 얼굴은 잘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그 양반 성이 박이고 이름이 대통령인 줄 알았어."
그는 히죽 웃으며 내게 농담을 했더랬다.
아무튼 그는 호외를 손에 든 채 버스에 올라 탔는데 버스 안이 또 희안했다.
평소라면 앉을 자리는 고사하고 안내양이 온몸으로 밀어 넣어도
발 하나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버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운전기사도 안내양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아침 잠 속에 있나? 싶었다.
이거 꿈인가?
창 밖을 보니 운전기사는 차도에 내려서서 호외를 보고 있었고,
안내양은 '죽은 거에요? 죽은 거죠?' 운전기사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분명 꿈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지각하믄 누가 책임질 건데? 슬쩍 짜증이 일었는데,
마침 빈 운전석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앉아 보지 못한 자리였다. 아무나 앉을 수 없는 자리였다.
운전기사는 안내양을 상대로 정치비평을 늘어놓고 있었고
그는 운전석에 앉았다.
오오 그는 감격하며 핸들을 쓰으윽 손으로 훑어보았다. 한 아름은 되는 것 같았다.
코를 찔러 오는 경유냄새도 기분이 좋았다.
호외를 보며 서 있는 사람들이 눈 아래로 보이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좋은 기분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크락션을 세차게 누르기 시작했다.
빠앙-!! 빵빵빠아앙-!!!
학교 좀 갑시다아-!!
나는 거기까지 들으며 은근히 그가 버스를 몰고 달려 나가는 스케일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 때의 소동은 여기까지.
운전기사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는 맨 뒷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학교로 갔다고 했다.
그는 이런 사람인 것이다.
이 남자의 이름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문영길이다.
교련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조잡한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고 운동장에 나와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영길은 운동장에 주저 앉아 호외로 종이비행기를 접었다.
왼쪽 날개에 <朴대> 가 보였고 오른쪽 날개에 <逝去>가 보였다.
개밥통 자식이 플라스틱 모의총을 들고 찔러총 폼을 잡았다.
"어울리지 않냐? 육사나 가까?"
반에서 62등 하는 놈이 할 말은 아니었으므로 문영길은 들은 척 않고 비행기를 접었다.
한철규 놈이 교복차림으로 나와 스탠드에 걸터 앉는다.
문영길과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으며 바지단을 슬쩍 들어 보여준다.
발목에 붕대가 감겨 있다. 절뚝거리는 시늉까지 보여준다.
또 열외를 하겠다고 지랄인 거다.
문영길이 에라이- 철규를 향해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바람을 타고 잘 날아 오르던 종이 비행기는 그러나
마침 운동장으로 나오던 교련샘의 왼쪽 눈 아래를 향해 급강하했다.
하필이면 절묘하게 군모의 챙 아래로 파고 든 비행기는
교련샘의 두꺼운 얼굴 가죽을 들이받고는 장렬하게 추락했다.
교련샘의 워커가 우뚝 멈춰 섰고,
문영길의 마음 속엔 <좃됐다> 와 <가미가제 같다> 가 동시에 떠올랐다..
찔러 총! 막아 총!
총검술을 연마하는 학생들 때문에 마른 운동장의 흙먼지가 풀썩풀썩 피어올랐다.
꾀병을 들킨 한철규는 교련샘 옆에 바짝 붙어 원산폭격 중이었고..
문영길은 개밥통과 함께 오리걸음을 했는데..
개밥통이 왜 같이 기합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날들이었다. 문영길의 고2 시절.
오리처럼 걷느라 헉헉대는 입으로 흙먼지를 흡입해댔던..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아무리 시절이 잿빛이어도 청춘은 청춘인 것.
연탄재를 뒤집어 썼어도 빛이 나는 게 그것인 것.
며칠 후, 대망의 미팅이 잡혀 있었다.
(혹시 생소한 분들에게.. 교련이란 이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