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中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오늘날 철학 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이 한때 보람 있는 일이었다면 지금은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 그렇단 말인가?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심오한 사색을 한다거나 어떤 학파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고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가 되는 것은 인생의 문제들을 그 일부분이나마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위대한 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성공은 군자답거나 남자다운 성공이 아니고 대개는 아첨하는 신하로서의 성공이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기 때문에 보다 고귀한 인간류의 원조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나서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몇몇 주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다. 그리고 소로우의 글을 또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몇년 전 대학교 교양수업 중 접한 후 한동안 책장에 자리 잡고 있던 '월든'을 꺼냈다.
작가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당연한'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홀로 월든 호수가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는 혼자 농사를 짓고 집을 짓고 살며 현대인들이 삶의 목적을 얼마나 무비판적으로 설정하는지 꼬집었다. 그 용기와 실행력, 그 속에 담긴 그의 논리와 철학이 너무나 대범하고 근사하기에 그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스승이 아닌가 싶다.
나 역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삶'은 무엇인가? 소로우가 제시한 "지혜를 사랑하고 소박하며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은 참 근사하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배운 삶을 살기보다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 옳다. 보다 논리정연하게 내 마음 속 근거를 세우고, 진심으로 우러나온 나의 철학을 반영하면서.
지금껏 많은 책을 읽으며 내가 지향할만한 멋지고 근사한 삶에 대해 배워왔다. 하지만 때때로 회의감이 들기도 하고 그 삶을 따라하기에 너무나 어렵다는 투정이 나올 때도 있었다. 아마도 '나의 삶'을 정립하지 못해 그렇게 어려웠던 것 같다.
나는 세상의 몇몇 것들에 별로 욕심이 없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치열하게 고민해볼 수록, 좋은 집과 맛있는 음식 또는 타인의 인정 등은 순위 밖으로 밀려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떳떳함이다.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고 누군가를 도우며 산다면 떳떳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 결론이다.
율곡 이이의 자경문 중 이러한 대목이 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실천에 옮기려 하는 것이니 만일 사물을 살피지 않고 똑바로 앉아 글만 읽는다면 쓸데없는 학문이 되느니라"
이전까지는 이 문장을 '책만 부여잡고 공부한다고 해서 절대 좋은 삶을 살 수는 없다. 배운 것을 실제의 삶에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정도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욱 그 생각을 확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정립해라" 월든에서 소로우가 말하고 싶은 내용 아닐까?
공부는 중요하다. 그러나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 끝내거나, 어떠한 책을 붙잡고 앉아만 있으면 이는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치열하게 자신을 움직이고 자신만의 삶이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삶을 그려냈을 때에, 망설임과 두려움 없이 그 삶을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