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영화

in #kr-newbie6 years ago (edited)

해의 끝자락에서 올해 내게 특별한 감흥을 준 영화를 꼽아 보았다.

보통 언론과 평단에서 (기사를 준비하고 내는 시점 때문에)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올해 12월 초순까지 개봉한 것을 기준으로 베스트 영화를 뽑는 것과 달리, 올해 1월부터 지금까지 개봉한 영화 중 본 것을 기준으로 했다. 그래서 지난해 말 개봉한 <1987>과 <패터슨>이 빠졌고, 아래 1위 영화가 들어갈 수 있었다. 재개봉작인 <하나 그리고 둘> <박하사탕> <브로크백 마운틴>도 제외됐다.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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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1위는 단연코, 고민 없이, 명확하게 <로마>다. 대학 2학년 때 '영화예술의 이해'란 수업을 들으며 처음으로 어렴풋하게나마 영화예술을 이해하게 됐으나, 그 뒤 영화예술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영화를 도통 만나기가 어려웠다. 5점 만점에 4점 이상을 줄 수 있는,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영화는 많았지만 그렇다고 영화예술이란 개념에 접합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영화가 <로마>. 최근의 영화로는 드물게 영화예술이 뭔지 보여주는 사례가 나왔다. 아주 특별한 경외감, 그리고 숭고의 감정을 안겨준 작품.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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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스레드> <버닝> (공동)

좋아하는 감독의 신작 두 편을 나란히 2위로 꼽게 됐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와 이창동의 <버닝>. 모아 놓고 보니 두 영화 모두 감독의 전작들과 다른 스타일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각 거장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 듯한. 그래서 좋았다는 건 아니고, <팬텀 스레드>는 관계의 변화를 다루고 관객에게 설득하는 방식이, <버닝>은 진실(결말)의 부재 속에서 서스펜스를 이어가는 방식이 놀랍고 신선해 좋았다. 아 그리고! 두 영화 모두 음악이 무지 좋다.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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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빌보드>

마틴 맥도나라는 영국 감독이 연출하고, 프란시스 맥도맨드, 우디 해럴슨, 샘 록웰 등 명배우들이 출연해 열연을 보여준 <쓰리 빌보드>. 난 선악과 시비에 대한 판단을 조심히 하는 영화가 좋다. 다른 부분이 별로더라도 그 부분이 성취된다면 영화에 대한 점수가 높아진다. 그 이유는 실제로 선악과 시비의 구분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기준으로 나눠진 선인과 악인이 다른 기준에선 위치가 바뀔 수 있다. 우리 모두 오류를 범하곤 하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쓰리 빌보드>는 얼핏 한 인물의 편에 서있는 듯하지만 판단의 갈림길에서 확정을 유보한다. 그러곤 다른 가능성들을 보여주며 관객 역시 판단을 유보하도록 만든다.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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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의 그해 여름> <린 온 피트> (공동)

여린 존재의 성장담에 족을 못 쓴다. 더 구체적으로, 아직 어떤 모습으로든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나이의, 그런데 어떤 결핍으로 인해 그 성장의 위기에 처해 있는 소년이 갈등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무사히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소년이 도랑으로 빠지지 않게끔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 올해 그런 영화 두 편을 만났고, 역시 나는 족을 못 쓰고 눈물을 흘렸다. 스페인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과 영국 영화 <린 온 피트>이다. <린 온 피트>를 통해 찰리 플러머라는 배우를 발견한 것도 다행이었다.

이외.

<레이디 버드> <플로리다 프로젝트> <퍼스트맨> <리틀 포레스트>도 좋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뭐랄까.. 다른 범주에 담아야 할 것 같은 느낌. <소공녀> <죄 많은 소녀> 등 신인 감독의 재기가 돋보이는 한국영화들도 있었다. 좋을 것으로 예상되는 <고스트 스토리> <델마> <살아남은 아이>는 아직 보지 못했다.

무척 아쉬운 점은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가 없다는 점... <독전>과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엔 도저히 공감할 수 없고, <안시성> 등 천만 타이틀을 노리며 나온 대작들은 스코어 면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해가 갈수록 좋은 오락영화를 만나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