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을 생략하고 집으로 향해야 했다. 이유는 통장을 두고 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현관 선반에. 건망증이 심해진 탓이다.
슬리퍼에 코 박고 낮잠 삼매경인 황구님의 기지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을 쾅 닫고 농협으로 뛰어갔다. 점심 교대 중인지 두 명의 캐셔 누님들 뿐이다. 내가 용무를 말했다. 뱅킹 신청하러 왔는데요. 그랬다. 실명제 실시후 미뤘던 작업. 돌이켜보면 내 일생일대 이보다 더 발빠른 움직임이 또 있었던가. 비트코인을 하면서 주변사람들은 가끔 이렇게 물어본다.
너 부쩍 기민하다?
좋게 말하면 날렵함, 나쁘게 말하면 예민함. 24시간 돌아가는 차트판에 그러지 않는 게 이상할테지. 학창시절 누구보다도 난 느린 아이였다. 체육복 갈아 입을때도, 중간고사 준비도, 군입대 시기도, 대학입학도, 그리고 여친의 기분을 알아채는 것까지 늘 한 두 템포는 느렸던 것 같다.
게으름이란 태그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정오의 그림자는 짧아지기라도 하지 내 게으름은 노을속 그림자만큼이나 항상 길었다. 그래도 뭐 싫지만은 않았다. 그러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내 직업이 있고, 가족도 있는 법이니까. 늘 이렇게 위안삼아본다.
이제 농협 앞에서 내게 주어진 점심시간은 이제 30여분! 둘러봐도 마땅한 식당이 보이질 않는다. 평생을 살아온 동네이건만. 십년 전부터 심시티 저리가라 재개발 바람이 불더니 이젠 부담될 정도다. 낯설고 땅 값 비싼 도시. 유공이 있던 자리엔 이자카야 몇 개가 들어와 있다.
결국 나는 붕어빵을 입에 물고 근처 모교로 방향을 돌렸다. 갑자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옛 생각이 나기도 했고.
몇 분 뒤담벼락에 차를 세웠다. 역시나 학교는 낯설게 변한 모습이다. 개학을 했는지 조금 소란스럽다. 그러다 학교옆 낯익은 골목으로 홀린듯 걸어들어가다 담벼락 하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빵공장.
담벼락에 대한 내 머릿속 태그다. 29년 전, 지름길로 학교를 갈때면 늘 거쳐가야 했던 담벼락. 오전, 오후반이 있던 시절, 골목엔 구수한 빵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메운 시멘트자리는 늘 구멍이 나 있었는데, 많은 아이들이 손을 넣어 막 구운 빵을 꺼내먹기도 했다.
그 태그 덕분에 담벼락 앞에서 멈칫하면서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정말 아이들의 빵서리질(?)을 몰랐던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채 했던 걸까...
알았다면 지금 정말 감사하고 고마운 분들이고, 몰랐다면 우린 정말 나쁘고 철없는 철부지일테지. 배고픈 시절이라고 좋게 포장할 생각은 아니다. 그저 옛 생각에 발을 떼기가 힘이 들었다.
가입인사는 kr-join으로 다시 해주시면 열렬히 환영받으실 겁니다.
처음 시작하는거라 좀 헤매고 있네요.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