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작년 여름, 절친의 결혼식을 계기로 가게 된 하와이에서 아주 짧게 만난 사람이다.
현지 친구가 데려가 준 맥주집 Village(강추!)에서 현지 친구가 자신의 여사친과 남사친을 소개해줬는데, 그의 첫 인상은 수학을 재미로 푸는 특이한 놈
이었다. 노트에 도형 두 개를 그려놓고 무엇인가 열심히 구하고 있길래 과제하냐고 물어보니 "Just for fun"이라고 하더라. 그의 노트에는 도형과 숫자가 가득했다. 수학과 벽 쌓은 나에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2차로 간 버블티카페 Mr.Tea(강추!)에서 젠가를 했는데 그의 플레이를 보며 함께 있던 내 고등학교 친구들과 쌍벽을 이루는 또라이
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참고로 내 남사친들은 고등학교에서 컴퓨터게임제작을 전공했고 남친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이다. 머리가 너무 좋아서 또라이인건지 그냥 우연히 또라이들만 모인건지 잘 모르겠다. 그들의 똘끼는 정말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나는 그들을 많이 애정한다. ^^
우리는 젠가를 충분히 즐긴 후 산 위로 드라이브를 했고 야경을 보며 수다를 떨었다. 그와의 만남은 그게 다였다. 수학이 저스트폴펀인 유쾌한 또라이.
하와이에서 돌아와서 한달 뒤에 SNS로 친구신청이 왔다. 그렇게 3개월간 메세지를 주고 받다가 그가 나를 만나러 왔고, 장거리 연애라는 것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다.
이 관계는 정말 특이하다.
그는 나를 돕기 위해 나와 사귀는 것이라고 했다. 나를 정말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사랑하지 않을 거면 왜 하와이에 있는 그 많은 여자들을 놔두고 나랑 사귀냐고 물었더니, 노멀한 사람들은 지루하단다. 나 같은 사람은 하와이에서는 찾기가 힘들다고 한다. 음… 살면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너같은 사람/년은 처음 본다”라는 말을 많이 듣긴 했다만… 이녀석도 정말 만만치않게 특이한 녀석이다.
그는 나를 돕고 그로인해 내가 나아지는 것을 보며 큰 만족감을 얻는다고 한다. 막상 연애 자체는 어른의 연애라기보다는 -19시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주로 페이스타임이나 사진&비디오 공유를 하며 서로의 생사확인을 하고 만나면 주로 같이 카페에서 컴퓨터로 각자 일을 하다가, 해질녘에 노을을 보러 나갔다가, 집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게임하거나 밥먹고 대화하다가 손 잡고 코 자는 중학생 레벨이다. 27,8살 성인 둘이 침대 위에서 하는 것 = 애니메이션 보거나 손 잡고 자기.. 실화입니다. ^^;
내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 관계에 대해 불안해할 때 그가 말하길,
“If you are looking for some serious thing, like getting married, then it's probably not the best use of time. If you are not in a rush, and have time to enjoy, learn, and experience, it is not a problem. I am not focused on making us stay together. It is more important to me to make both of our lives better, than it is to work to keep the relationship.'It’s better to find another guy'…If the relationship is not helping, or is too difficult.”
네가 만약 결혼과 같은 진지한 관계를 원한다면 나보다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더 낫지만 만약 네가 서두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함께 즐기고 배우고 경험할 수 있을거야. 나는 우리가 함께 사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아. 나에게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보다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 억지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중요해. 내가 '다른 남자를 찾는 게 더 낫다'는 말을 한 것은 만약 이 관계가 너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너무 어렵다면 그 편이 낫다는 뜻이야.
이 외에도 많은 대화를 했는데, 살아 생전 처음 접하는 연애관이라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일리가 있는 말을 한다. '사랑과 연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관계'… 쉬운 관계는 아니지만 이 녀석은 키키처럼 하늘이 붙여준 또 다른 천사가 아닐까 싶다. 이 시기를 포기하지 말고 잘 이겨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남자친구라고 하기보다는 뭐랄까, 조력자 같다.
그리고,
그가 며칠전에 교토에 왔다.
오늘 그가 물었다.
“너의 지금 삶은 사건 전보다 가치 있어 아니면 더 나빠?”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지금이 더 좋아.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잘 생각해보면, 나는 PTSD라는 진단을 받고나서 내심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다 포기하고 멈춰서 아무 생각 없이 쉬기에 아주 적절한 명분, 내가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하고, 나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마구마구 해볼 수 있는 명분,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을 상처내도 죄책감을 덜 느낄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고 말야. 정신줄 잡기가 매우 힘들었지만, 정신줄을 잡는다는 명목하에 마음대로 살았으니까 나쁘지만은 않아. 근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은데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 삶이 힘든 이유야.”
그가 물었다.
“네가 과거의 너와 현재의 너를 자꾸 비교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때?”
나는 대답했다.
“나는 사람들을 접할 때, 내가 과거의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과거의 나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줬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나는 자주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거든. 잘 알아. 나도 나 때문에 피곤해지니까. 그래서 과거의 나와 겹쳐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그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 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자꾸만 그 사람을 통해 과거의 나를 봐. 그리고 현재의 나를 부정하고 과거의 내가 되고 싶어져. 과거의 나였으면 보다 좋은 대화를 하고, 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텐데…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돼.”
그리고 이 대화를 통해 나는 나를 좀 더 알게되었다.
‘앗... 내가 현재의 내 모습을 숨기지 않고 전부 내보이기로 한 이유가 보다 분명해졌다. 과거의 내가 아니어도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구나. 여전히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을지, 과거에 비해 얼마나 좋아해줄지, 그 결과를 스스로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만약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백날 고민하고 걱정해봤자 시간만 흐르니까 맞든 틀리든 뭐라도 하면서 방향을 잡아가고 싶었던 것이었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건 그저 내 의견인데, 나는 네가 과거의 너와 현재의 너를 계속해서 비교하며 과거의 너를 되찾으려고 애를 쓰기보다는, 네가 이미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현재의 네가 자존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아하.. 욕심이었구나. 전처럼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욕심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구나. 욕심을 더 덜어내야겠구나.’
그가 물었다.
“너는 과거에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쉽게 잃지 않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너는 과거의 너를 되찾고 싶어하지. 그런데말야, 너는 쉽게 잃지 않는 사람이랑 낫 퐐 이지얼??한 사람 중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내 귀에는 낫 퐐 이지얼이라고 들렸다. 뭔 말인가 해서 되물었다.
"낫 퐐 이지얼??? 그게 무슨 말이야??"
"음... 쉽게 상처 받거나 부서지지 않는 사람?"
“그렇다면 나는 쉽게 부서지지 않는 사람이 더 좋아.”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현재의 너는, 더 이상 과거의 너와 비교할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과거의 너는 부서졌으니까. 쉽게 부서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과거의 네가 아니라 앞으로 되고 싶은 네가 되려고 하면 돼.”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을 메모장에 적어서 남기라고 했고, 몇가지를 더 물으려고 한 듯 하지만 내가 다 적기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코까지 고로롱고로롱 골면서 잔다.
난 아직도 지금, 현재의 내가 참기 힘들만큼 답답하고, 잘 웃다가도 쉽게 화가 나거나 슬퍼지는 등 감정기복이 심하고 이런 감정에 잘 휘둘리고 이거 저거 너무 잘 흔들리지만, 그래도 그가 말하듯이 나는 내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을 느낀다.
“You are already becoming a much more confident person, and starting to embrace who you are (your true personality) and what you can do (your abilities).”
넌 이미 훨씬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되었어. 그리고 네 자신이 누군지를 받아들이고 있어. 그리고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좋아. 오늘도 얼렁 책 읽고 자야겠다.
저는 어떤 종류의 글이던 스모모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힐링이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느끼기에는 스모모님은 좌절을 하시더라도 기저에는 항상 밝은 에너지가 있거든요. 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밝은 에너지를 애써 내실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어요. 어떤 면이 좋은게 아니라 분위기 뿜뿜하는 자체가 좋은 거니깐요:)
그리고 저도 not fall easier 한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조력자도 얻고 싶네요. 그러려면 일단 제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죠:D
뽀또시님...감사합니다😭
네 우리 nit fall easier한 사람이 되어요. 화이팅! 화이팅!
이런 연애 관점은 영화 속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현재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한다.
어찌보면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의 제도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요..
두분께서 앞으로도 계속 좋은 인연 (조력자?) 을 이어나가시길 멀리서나마 바라겠습니다^^
그러게말이에요. 예전에는 누군가를 사귀면 늘 결혼까지 생각해보곤 했는데, 결혼이 무조건 답은 아니라는 이 생각을 이해하니 관계가 편해졌어요.
응원 감사합니다~!
너무 보기좋습니다~^^
정말로 조력자시네요.. 나도 참 본받아야 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ㅎㅎ
ukk님도 한 명의 조력자이십니다~! 계속 옆에 있어주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는 분들은 다들 조력자이십니다 😁
ㅎㅎ 아닙니다..그냥 뭐..입만 살아가지고 있는....^^;;
학회발표로 일주일 머무른 하와이의 쨍한 날씨가 떠오르네요... 한달이나 머물렀다니 너무 좋았겠네요
네 헤헤 제가 간 건 한국이 제일 추울 때였어서 하와이도 은근 쌀쌀했어요. 낮에는 가끔 30도를 넘어갔지만 ㅎㅎ 한달이나 있었지만 특별히 관광을 한다거나 하진 않았어서 사진은 별로 없네요 ㅜㅠ
정말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커플이 바로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