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던 직장을 호기롭게 그만두고 ‘느리게’ 읽고 쓰고자 했던 게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닌데, 또 예전과 같은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새)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고 단기간에 몰아붙여야 하는 일이어서(내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꼼짝없이 컴퓨터 앞에 종일 앉아서 지낸다. 아르바이트 제안이 왔을 때, 그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어렴풋이 알면서도, “네. 할 수 있죠.”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래서 또 검은 머리가 흰 머리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예민한 상태로 지내고 있다.
돈 때문이다. 일을 한두 번 거절하다가 나중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닐까 막연한 두려움에, 나를 찾아오는 일을 내치지는 말자, 하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종일(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노라면, 왜 이러고 사나 하는 회의감이 몰려오는데,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일로 인정받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일이란 게 참 이상하다. 일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고, 나를 하는 일로 규정하고 싶지 않다. 일하는 나 말고도 무수히 많은 내가 존재하니까. 그런데 또 조금은 일로 인정받고 싶기도 하고. 그 중간 지대 어디쯤에 머물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오후에는 세차를 핑계로 나들이했다. 세차를 안 한 지가 어언 반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앞 유리 왼쪽 밑에 거미줄 몇 가닥이 눈에 띈 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세차장으로 향했다. 평소에 셀프 세차장에서 대충 세차를 하지만,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기에 2만 원짜리 손세차를 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지자체장 출마선언이 있었던 곳을 지나쳤다. 몇은 선거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곧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되면 유권자로서 내 존재가 도드라지게 드러날 것이다. 유권자로서의 나는 일하는 나만큼이나 강력하다. 내 이마에 쓰였을 ‘1표(1~N표)’ 같은 게 얼마나 큰 힘인지, 한 무리의 사람이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넬 거다, 참.
세차장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고 내 차는 아주 딱정벌레처럼 작기 때문에(그렇다고 비틀은 아니라는 점)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차를 기다리며 머리를 자르기로 했다. 이미 짧은 상태였던 머리를 다듬는 데 10분쯤이나 걸렸을까. 1만5천 원을 지출했다.
이번엔 근처 알라딘 중고서점으로 향했다. 유권자로서의 나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갖는 건 소비자로서의 내가 아닐까. 소비로 주장하며 소비로 나를 구성한다. 알라딘 중고서점은 소비자로서 나의 모순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공간이다. 평소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대형마트나 프랜차이즈는 가지 않고 동네 상점을 이용하려고 노력한다. 일회용품은 웬만해서는 사지 않고 동물실험을 하는 곳의 화장품은 쓰지 않는다. 그러면서 가죽점퍼는 갖고 있으니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알라딘 중고서점은 내게 가죽점퍼 같은 존재다. 근처에 중고서점 몇 곳이 더 있지만, 웬만해서는 알라딘 쪽으로 향한다. 다른 것들은 내 가치 지향에 따라 조금 비싸거나 질이 떨어져도 되지만, 책은 다르다. 왜 알라딘이 중고서점까지 하는 거냐며 볼멘소리를 하다가 그 실체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의 충격이란. 책이 어느 서가에 있는지 쉽게 찾을 수 있는 시스템과, 어떤 건 새 책이라 해도 될 정도의 상태. 역시 자본력이란 좋은 거였다. 살면서 모순되는 게 이거 하나뿐이겠나, 하면서 살짝 눈을 감고 알라딘 중고서점으로 가곤 했다. 어느 때엔 매일 갔다. 세상을 너무 빡빡하게만 살아도 좋지 않은 거라며. 책을 한참 구경하다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점심 먹었니?
응. 세차 맡긴 거 기다리면서 머리 자르고 했어.
짧게 좀 자르지.
그러고 싶었는데 그럼 파마한 부분이 다 잘려나가서.
그까짓 파마가 뭐라고 하고 싶은 대로 하지.
그러게. 근데 파마 값이 얼만데.
변명은 구질구질했다. 귀 바로 밑 정도 길이로 자르고 싶었는데 끝부분에 남은 파마의 흔적이 대체 뭐라고. 헛웃음이 피식 났다. 전화를 끊고 나니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 <미국의 송어낚시>다. 전에 누군가가 좋아한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나서, 한 번 읽어 볼까 하는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던 J.D.샐린저의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도 집었다. 재빠르게 책 두 권을 만 원에 내 것으로 만들었다.
책 두 권을 사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책을 좀 읽어 볼까 하다가 친구가 보내 준 스타벅스(!) 커피 기프티콘이 떠올라서 자리를 옮겼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어 내려갔다. 글은 빠르게 읽혔지만, 미국에 대한 배경지식이 영 부족해서 비유나 상징 같은 걸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종종 책 맨 뒤에 달린 각주 설명을 찾아 읽으며 흐름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비문과 오자 같은 것도 눈에 띄어, 여러모로 흐름이 끊겼다. 그래도 평일 오후의 커피와 독서는 그 자체로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한 시간을 이렇게 채웠다. 세차를 맡기고 머리를 자르고 책을 사고 커피를 마시면서 읽으니 한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얼른 차를 타고 돌아와, 조금의 호사를 더 누리기로 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서 아주 오랜만에 스팀잇에 흔적을 남기기로. 글의 제목은 ‘오늘의 소비’다. 소비가 한 시간의 콘텐츠를 만들었다. 소비는 이렇게나 위대하다.
목련이 흐드러지게 폈다. 나는 비록 엊그제까지 내복을 챙겨 입었지만.
오랜만에 애플님 글 읽어서 무척 기뻤어요! 반가워요! 아직도 많이 추워서 봄 같지 않아서 4월은 되어야 진짜 봄 같을 것 같아요ㅎㅎㅎ
반가워요! 우티스님 청록색 일기장을 안 들여다본 지도 꽤 되었네요. 지금 살짝 들여다보니 안 읽은 글이 세 편 있는 것 같아서 먹을 걸 쟁여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에요ㅎㅎ 인사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스팀잇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뉴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안녕하세요^^ 들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팔로하고 놀러갈게요!
저도 요즘 캐나다 작가의 소설 읽는데 진도가 쬐끔 안나가서 애 먹는중요.시대배경이 달라서요... 목련에 내복은 쫌 안 어울리지만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었다니 좋군요! ㅋㅋㅋㅋ
진도가 안 나가면 고민하게 되지 않아요? 계속 읽을지 말지 말이에요. 그런데 어떤 책은 지루함(?)을 이기고 끈기 있게 읽어나가다가 보면 정말 큰 울림을 주기도 하더라고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
그냥 일상글인 듯 그냥 일상글만은 아닌듯
자꾸만 곱씹어 보게 되는 뭔가가 있네요^^
안녕하세요. 좋은 댓글 읽고 미소를 짓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우와 돌아오셨당! 자주 와주세요ㅎ
저도 회사다니면서 이것저것 일 해보니, 회사를 관뒀을때 과연 내가 일을 선택해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약해지지 말아야지 으휴!!ㅎㅎ
반겨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ㅎㅎ 저도 회사를 관두기 전에 이것저것 많은 생각이 들고 두렵기도 했었는데 그만두고 보니 더 넓은 세계가 펼쳐진 느낌이에요. 안정된 세계의 문은 비록 닫혔지만요. 행복한 퇴사, 새 시작 하시길 응원할게요. 약해지지 맙시다!!
일전에 돈은 물화(物化)된 자유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돈을 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무언가 할 수 있는 자유를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소비는 그러한 자유를 명징하게 나타내는 한 형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주가 책의 맨 뒤에 있어, 흐름이 끊기는 것을 저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두가지 버전의 책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는 각주가 맨 뒤에 있는 버전, 다른 하나는 각주가 페이지에 같이 들어 있는 버전. 이러면 각주의 위치에 대한 각자 취향에 따라서 골라 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많은 선택지를 갖고 싶은데, 그러려면 많은 선택지를 포기해야 하고... 아이러니합니다.
각주 맨 뒤에 있으면 곤란하죠~ 두 버전의 책이 있다면 정말 좋겠네요. 그러고 보면 한 권의 책을 막힘없이 읽을 수 있게 편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심지어 각주가 뒤에 달린 저 책은, 소설 시작 전에 작품 소개가 있어서 읽기도 전에 김이 빠져 버리기도 했어요. ㅎ
알라딘을 사랑하시다니 복받으실거예요 ^^ 돈주고도 못얻는 가치를 싸게 준다는데 그런 고마운 곳이 어디있나요 ㅎㅎ 반대로 중고서적을 갖고와도 돈으로 주는데 용돈도 되고말이죠 ㅋㅋㅋㅋ
그렇게 생각해 보면 고마운 곳이네요.ㅎ 사랑한다는 이유로 복까지 받고 말이에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applepost 님! 누구나 다 마음 속에 원칙 하나를 정해놓고 살지만 어쩌다 보면 그 원칙이 원칙에 원칙의 알을 낳다보면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되도록이면... 이라는 단서를 달고 산지 좀 됐습니다. 오늘의 소비로 제가 글을 쓴다면 아마 오늘 하루를 넘겨야 할 듯합니다. 생각해보니 정말 하루에 많은 곳에 지출을 하는군요. 주부이자 아내이고 엄마이다보니 각각의 역할에 필요한 소비의 형태가 존재합니다. 저 역시 커피 한잔에 책을 읽어 나가는 것이 하루 중의 가장 큰 호사입니다. 오랜만에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원칙이 원칙에 원칙의 알을 낳다 보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무슨 명언인가요~ 괜히 위안이 되네요.
북키퍼님, 주부, 아내, 엄마의 역할을 해 나가다 자주, 커피 한 잔에 책 읽는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applepost 님 글기다렸는데 이제서 봤네요
오랜만에 세차하러 나오셔서 많은 일을 한것 같네요
일상을 보는것같이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반가웠어요^^
옐로캣님, 또 오랜만이네요 ㅎㅎ 반갑게 맞이해 주셔서 감사해요. 옐로캣님 소식도 안 읽은 지 꽤 됐네요. 얼른 소식 확인하러 들르겠습니다! 이제 추위가 완전히 가셔서 한 시름 놓으셨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