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빨'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사진은 '장비빨'을 받는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카메라 장비빨을 받던 사진은 이제 스마트폰빨을 받는다. 폰을 만드는 제조사들은 서로서로 자신의 '빨'로 좋은 사진을 찍으라고 연신 광고 중이다. 한편 그렇게 찍혀지는 사진을 통해서 사람들은 사진빨을 받는다.
우리가 어릴적부터 배웠던 과목들도 생각해보자. 피아노도 바이올린도 기타도 모두 좋은 '악기빨'이 있기 마련이다. 운동을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축구를 하면 좋은 축구화나 좋은 축구공 빨을 받고 농구를 하면 농구화빨을 어느 정도 받는 법이다. 어릴적 나는 에어라는 개념이 처음 나온 운동화들을 통해서 '운동화빨'을 받고자 열심히 농구화를 사는 친구들을 보며 자랐다.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더라도 좋은 붓과 물감은 적당한 '도구빨'을 제공한다.
이런 모습은 꼭 일반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올림픽 수영종목에서 전신수영복이 등장하고 금지된 부분은 그런 '빨'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을를 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혹은 스테로이드 계열의 약물을 금지하는 것 역시 지나친 '약빨'로 인해 공정한 경쟁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이처럼 다양한 '빨'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과연 어느 곳에서 '빨'이 없는가를 생각보니 그것은 바로 '글'이었다.
글에는 '빨'이 없다. 글은 온전히 사람의 생각과 그걸 옮겨적는 과정만이 존재하는데 생각하는 과정은 순수한 나의 역량이고 옮겨적는 과정은 손으로 펜을 들고 옮겨적던지 키보드로 타이핑을 하던지 그 글 자체는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글이 떠오르고 나서 완성된 글로 마무리 될때까지 어떠한 '빨'도 없는 것이다.
그런 글에게 딱 하나 '빨'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앞서 이이야기 한 것처럼 그 글이 떠오르는 '사람'으로부터의 '빨'이다. 그 글을 누가 썼느냐에 따라서 좀 더 돋보이게 할 만한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글쓴이를 작가라는 관점으로 생각하여 본다면 그 글을 돋보이게 하는 그 사람조차도 애초 그 사람이 썼던 글로부터 '빨'을 받아서 그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해 보면 다시 한 번 글은 '빨'이 없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