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들어가며
알아두면 쓸모있는 신선한 법률상식, 오늘은 정당방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얼마 전, 한 집주인이 집에 들어온 도둑을 빨래건조대로 내리치는 등 폭행하여 뇌사에 빠지게 한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지요. 사람들은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은 법원의 판단에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형법은 정당방위의 요건을 비교적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는 탓에 일반인들로서는 과연 어느 행위가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것인지 알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나면, 누군가가 나 또는 주변사람들을 해치려 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쉽게 감을 잡을 수 있을겁니다. 정당방위의 개념과 요건, 실제 적용사례들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02 정당방위란?
- 구성요건과 위법성조각사유
정당방위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구성요건과 위법성조각사유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성요건이란 형법상 금지되는 행위가 무엇인가를 형법전에 써놓은 것을 말합니다. 폭행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형법제260조 제1항 사람의 신체에 대하여 폭행을 가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
위 규정에서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사람의 신체에 대하여 폭행을 가한 자"입니다. 집에 숨어든 도둑이든,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든, 욕설하는 사람이든 그 대상이 누구인지, 어떤 상황인지를 고려하지 않고 일단 다른 사람의 몸에 힘을 썼다면 그 어떠한 이유를 불문하고 폭행죄에 해당하는 '위법'한 행위로 봅니다.
잠깐만, 구성요건에 해당한다고 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처벌하는 건 너무 하잖아! 그래서 마련한 것이 바로 '위법성조각사유'입니다. 위법성조각사유란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의 위법성을 상실시키는 예외적인 사유들을 말합니다. 현행법상 인정되는 위법성조각사유로는 정당행위(제20조), 긴급피난(제22조), 피해자의 승낙(제24조) 등이 있는데, 정당방위(제21조)는 형법에 규정된 여러 가지 위법성조각사유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위법성조각사유에 해당한다면 이를 적법한 것으로 취급하므로 행위자는 형벌 또는 기타 불이익한 처분을 받지 않게 됩니다.
- 정당방위?
형법 제21조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정당방위는 형법 제21조에 규정된 위법성조각사유 중 하나로, 자기 또는 타인에 대한 부당한 침해를 방어하기 위한 상당한 이유있는 행위를 말합니다. 정당방위는 인간의 자기방어본능을 법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법행위를 국가가 나서서 막을 수 없는 급박한 경우에 개인이 직접 나서서 이를 직접 해결하더라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너 착한 놈인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 <복수는 나의 것> 中)
그러나 정당방위를 폭넓게 인정한다면 우리가 이룩한 문명사회는 금방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에서 목격했던 잔혹한 피의 복수, 복수를 위한 복수가 온 사회를 멍들게 할 것이 자명하지요. 정당방위의 요건을 엄격하게 규정한 것, 법원이 정당방위를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당방위는 과연 어떤 요건을 충족해야 인정되는 것인지 하나씩 뜯어보도록 하겠습니다.
#03 정당방위의 요건
-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행위일 것
'법익'이라는 것은 법이 보호하려는 개인의 이익을 말합니다. 사람의 생명과 신체, 자유, 재산, 명예 등이 모두 법익에 해당합니다. '이익'이라는 말로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정당방위는 기본적으로 자기방어본능에 기초한 것이지만, 자기뿐만 아니라 '타인'의 법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 또한 인정됩니다. 따라서 나의 가족, 친구뿐만 아니라 오늘 밋업에서 처음 만난 사람의 법익이 침해되려는 상황에서도 직접 나서서 방어할 수 있습니다.
- '현재'의 침해에 대하여 이루어질 것
'현재'의 침해란 침해가 막 이루어지려고 하고 있거나, 방금 막 시작되었거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과거'나 '미래'의 침해에 대해서는 정당방위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래전 아버지를 죽인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가 살해하거나, 1주일 뒤에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사람을 찾아가 미리 살해하는 행위는 정당방위가 될 수 없습니다.
- '부당'한 침해에 대하여 이루어질 것
'부당'한 침해란 법이 인정할 수 없는 침해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A명의의 건물에 대하여 B가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민사소송을 제기하였고, 승소판결을 받아 적법하게 B가 그 건물에 입주하여 살고 있었는데, A가 그 건물이 자신의 소유임을 주장하며 무단으로 침입한 경우에는 자기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 방어한다는 '의사'가 있을 것
정당방위를 하는 사람은 침해 상황을 인식하고서 방어행위를 하려는 의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무심코 팔을 돌리다가 어떤 사람의 얼굴을 가격하여 쓰러뜨렸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묻지마 살인범이었던 경우 방어한다는 의사가 없는 것이지요(물론 이 경우에도 처벌되지는 않습니다). 예시에서 보듯, 이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는 현실적으로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
다소 뜬구름 잡는 말로 들릴 수 있지만, 판례와 학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기준을 정리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1. 방어에 알맞은 수단을 써라, 2. 침해자에게 가장 경미한 손실을 입히는 방어수단을 선택하라, 3. 내가 입을 수 있는 손실과 침해자를 제압함으로써 침해자가 입게 될 손실의 균형을 생각하라.
예를 들어, 나의 뺨을 때린 사람에게 사시미 칼을 꺼내 휘두르는 것, 경찰관이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사람에게 총을 쏴서 제압하는 것은 상당한 이유가 없는 것이므로 정당방위로 인정될 수 없지요. 예시처럼 '상당성'을 잃은 방어행위를 '과잉방위'라고 합니다.
형법 제21조 제2항 방위행위가 그 정도를 초과한 때에는 정황에 의하여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
형법 제 21조 제3항 전항의 경우에 그 행위가 야간 기타 불안스러운 상태하에서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으로 인한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과잉방위는 기본적으로 처벌되는 것이지만, 법관이 그 정황을 살펴보아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과잉방위가 야간 기타 불안스러운 상태하에서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것이라면 무죄를 선고할 수도 있습니다.
#04 실제 사례
정당방위의 성립에 필요한 요건들을 알아보았으니, 이제 실제 사례에서 우리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실제 정당방위가 적용된 사례들을 살펴보면, 도입부에서 언급한 '도둑 뇌사 사건'에서 법원이 왜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았는지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당방위에 관한 수많은 판례 중 정당방위의 이해에 도움이 될 만한 판례를 간단하게 추려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욕하고 폭행하려는 자식을 아버지가 1회 구타했는데, 자식이 쓰러져 머리에 상처를 입고 사망한 경우, 아버지와 신체와 신분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 인정(73도2401)
의붓아버지의 강간행위로 인해 정조를 유린당하고 계속적으로 성관계를 강요받아온 피고인이 그의 남자친구와 사전에 범행을 준비하고 의붓아버지가 제대로 반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식칼로 심장을 찔러 살해한 경우, 상당성이 없다는 이유로 정당방위 부정(92도2540)
경찰관이 불법적으로 체포하려고 하자 반항하는 과정에서 경찰관에게 상해를 가한 경우, 정당방위 인정(99도 4341)
서로 치고받는 싸움의 경우 누가 먼저 폭행을 시작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가해행위는 방어행위인 동시에 공격행위의 성질을 가지므로 정당방위 부정(92도1329)
싸움 도중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나 살인의 흉기를 사용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정당방위 인정(68도370)
인적이 드문 심야에 혼자 귀가중인 여성에게 달려들어 양팔을 붙잡고 어두운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 담벽에 쓰러뜨린 후 옆구리를 무릎으로 차고 억지로 키스를 한 남성의 혀를 깨물어 설절단상을 입힌 경우, 정당방위 인정(89도358)
전투경찰대원이 상관의 심한 기합에 격분하여 상관을 사살한 경우, 정당방위 부정(84도683)
이혼소송중인 남편이 찾아와 가위로 폭행하고 변태적 성행위를 강요하는 데 격분하여 처가 칼로 남편의 복부를 찔러 사망케 한 경우, 정당방위 또는 과잉방위 부정(2001도1089)
피고인 소유의 밤나무 단지에서 피해자가 밤 18개를 푸대에 주워 담는 것을 보고 푸대를 빼앗으려다 반항하는 피해자의 뺨과 팔을 때려 상처를 입힌 경우, 상당성이 없다는 이유로 정당방위 부정(84도1611)
피고인이 야간에 처와 극장에 다녀오던 도중 술에 취한 한 남자가 피고인의 처를 땅에 넘어뜨려 깔고 앉아서 돌로 때리려는 순간 피고인이 농구화 신은 발로 그의 복부를 한차례 차서 외상성 십이지장 천공상을 입게 하여 사망케한 경우, 과잉방위에 해당하고 야간 기타 불안스러운 상태하에서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것이라는 이유로 무죄판결(73도2380)
#05 나가며
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끈기있게 읽고 이해하셨다면, 이제 당신도 '정당방위'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정당방위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불가피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이 포스팅이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면서도 법의 심판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 '정당방위', 미리 알아두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무기가 됩니다.
이건 정말 알아야할 정보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업봇하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dadol님^^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법은 어렵게 느껴지네요. 정당방위와 과잉방위를 어떻게 구분하느냐가 관건인거 같아요.
간단하게 '방어행위로 입게되는 침해자의 손실이 방어자의 이익보다 월등한 경우'에 과잉방위로 보시면 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쉽게 글을 쓰고 싶은데,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잘 보고 갑니다.
모른다고 안지키면 안되는 법
알아둬야 겠습니다. ^^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와 어려운 법률지식을 이렇게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보팅과 팔로우 하고 갑니다. ^^ 이렇게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제로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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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침입자는 다 죽여도 정당방위던데..-_- 흠냐
개인적인 견해로 미국에서 정당방위를 넓게 인정하고 있는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미국은 일반 국민들이 형사재판과정에 참가하는 '배심원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당방위인지 아닌지를 판단함에 있어서 아무래도 배심원들은 방어자를 심정적으로 더 지지하는 경향이 있을 겁니다. 우리의 여론이 그렇듯 말이지요.
둘째, 미국은 우리와 달리 일반인들도 총기를 소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봅니다. 침입자가 어떤 무기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방어자의 입장에서는 침입자가 갖고 있을지도 모를 총기에 총기로 대응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대응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도 총기소지가 허용되었더라면, 우리 법원 또한 미국과 마찬가지로 정당방위를 폭 넓게 인정했을겁니다.
역시 법조항 보다 함께 써주신 사례를 보니 훨씬더 빨리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