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마치면
물건을 팔러 돌아다니고
집에 돌아오면 양말이 발에 달라붙어있다.
뜨거운 햇빛은 내 갈색 피부를 더 그을리고 있다.
더 많이 돌아다녀야 천페소(Peso) 는 더 벌수 있다.
지난 달에는 수입이 꽤 좋았는데, 이번달에는 영 신통치 않다.
그녀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는 영어를 어느정도 했다.
내 마음을 잘게 찢어버린 사랑스러운 그녀는
몇년째 내 연락을 받지 않는다.
깊은 밤 일을 마치고
여유로운 금요일 밤
파티에 가자는 룸메이트의 제안을 거절하고
혼자 거실 창을 열어두고
달빛을 받으며 와인을 한잔 마셔본다.
낮에는 매퀘한 먼지로
가끔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다.
하지만 난 이 도시의 활기가 에너지가 좋다.
“여기에 머물면 안돼?”
“나는 이 도시가 싫어. 공기도 안 좋고... ”
그녀는 뭔가 할 말을 숨기는 듯 하다 말을 이어갔다.
“연고지도 없는데 너하나만 보고 이 낯선 도시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아. 너도 바쁘잖아.
그럼 나혼자 이 도시에서 살아가야하는데.
자신없어.”
그녀는 참 솔직하다. 나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이 다 맞으니까.
나 하나 가누기도 정신없는 삶을 2년째 살아오고 있고
부모님은 내가 그녀와 다시 만난 걸 알면
기절해서 까무라치실지도 모른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아래
달구어진 돌바닥을 밟으며
미어터지는 출퇴근 버스에서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툴툴거리며 불평을 하건 그녀의 가방이 결국 털렸다.
젠장할- 소매치기놈들.
그녀는 영혼이 나간 얼굴로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로 돌아가버렸다.
나도 손님과 만날 약속이 있어서
일단 그녀를 돌려보냈다.
2시간짜리던 미팅은 점점 늦어지고
오늘 그녀를 다시 보니는 힘들겠다 싶었다.
소매치기당한
지구반바퀴를 날아온
3년만에 만나는
나의 전 여자친구를
챙겨줄 여유가 내게 없다.
지금 중간고사 기간인데다가
이번달 월세를 내려면
지난달처럼 발바닥에 땀나게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아야 하고
그녀는 고작 1달밖에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랬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내게 다시 와준 것을
나는 당연하게 여겼다...
사실 상상도 안하던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면
감이 없기 마련이다.
왠지 내일도 한달뒤에도 그런 일이
훅 일어날 것만 같은데
그건 특별한 기회였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사랑하는 그녀와 한 하늘 아래
살아갈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여전히 살기는 퍽퍽하고
아침이면 분주하게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이 도시가 나는 좋다.
그 조용한 시골로 돌아가면
온통 그녀와 데이트했던 장소들이
여기 저기에서 그녀의 환영을 부른다.
꼭 다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녀에게.
돌아가는 공항에 마중을 나가지 못한 것도
그렇게 혼자 보낸 것도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라고 했던 말도
나중에 내가 더 나이가 들면 그녀가 어떤 기분이었을 지 알게 될거라는 말도
나 살기 바빠서 그녀를 돌보지 못햇던 것도
3년간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내가 했던 숱한 노력들도
뭐라 말해야 할까?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통통하던 볼이 싹 빠져서
앙상한 팔로 나를 포옹하던 그녀에게
지난 3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나와 떨어져서
잘 살아남으려고 이렇게나 왜소해져버린거다.
그녀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잘 지내는 지
미안했다고
그렇게 보내서.
말하고 싶다.
만약 그녀가 번호를 바꾸지 않고
올해 크리스마스에 내 전화를 받는다면...
그녀는 정말 누군가를 만나 결혼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하자고 말할 권리가 용기가 없다.
한번 돌아서면 다시는 뒤를 보지 않는다는 그녀는
이렇게 행동으로 그 말을 지켜주고 있다.
오랫동안 나를 바라봐주던 그녀는
완전히 떠났다.
그녀는 지금 뭐할까?
여전히 나는 궁금하고
그녀의 추억이 담긴 노트를 발견하면
그리움에 젖어버린다.
하지만 지금은 꽤 괜찮고, 일상생활에도 문제는 없다.
나는 여전히 멋지고
좋다고 달라붙는 여자들도 많고
일류대를 나왔고
그냥 그녀가 없다.
아무래도 나는 그녀를 기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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