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아침이 밝았다.
그저께 늦게 내려와 어제 이른 아침부터 종일 일하고,
12시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
일찍 일어나 챙겨온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들었다. 퀸을 들었다가, 클래식도 들었다가, 결국 재즈를 틀었는데도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지금은 숙소 근처 스타벅스인데 캐롤이 나온다. 올해 처음 듣는 캐롤이다. 몸은 추워지는데, 마음은 따뜻하다.
어제는 촬영을 했다. 아름다운 곳에 가게 되니 따로 여행이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일은 일이라 정신이 없어 전혀 둘러보지 못했다. 잠깐잠깐 장비를 세팅할 때마다 사진 몇 장을 찍은 게 전부다. 감상하진 못하고, 기록에만 의미를 두었다.
날씨 때문에 원하는 영상을 찍지 못했다. 정작 촬영으로만 보자면 계획했던 것의 반 이상 장소를 옮겨야 했는데, 어느 하나 투덜대는 이가 없어 좋았다. 덕분에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마지막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이 무척 강해 아무것도 찍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드론 촬영을 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때 처음으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제주의 스타벅스에 앉아 있으니 플시님 생각이 난다. 플시님께 커피를 사드리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시월 한 달간 내게 닥쳤던 무언가... 그리고 공연들. 몇 개는 성황리에, 몇 개는 잔뜩 긴장한 몸으로 마쳤다. 인제 보니 잔뜩 투덜대기만 하고, 공연 후의 이야기를 전하지 못했다.
지난 일요일,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위에서 공연 섭외를 받았다. 급하게 연주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모든 게 끝나 가장 즐거워하는 그때에 그 연락을 받은 건 왜일까... 울 것 같은 마음으로 수락했고, 다음 날 아침 바로 합주를 했다.
독일에 계신 선생님이 다음 주 부산에 오신다. 짧게라도 보고 싶으니 악보를 챙겨 부산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다음 주야말로 간절히 원했던 휴식날이라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부르신 곳이 부산이라 가기로 했다. 다른 곳이었다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레슨을 핑계로 부산에 있는 그들을 보러 가는 것이다. 생각보다 이른 재회에 멋쩍은 마음이 든다.
선생님보다 그들에게 더 먼저 기쁜 소식을 전했고, 그날부터 오늘까지도 그들에게서 방문을 기대하는 연락을 받고 있다. 가을의 시작과 끝을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
휴식이 필요한 시기라 좋은 숙소를 빌려 하루 정도는 나가지 않고 숨어있을까 싶기도 하다.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마음을 갖다가도, 부산의 바람을 맞으면 그들과 함께 있고 싶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돌아가선 악보를 만들어야 한다. 독일에 계신 선생님은 클래식을 전공해 지금은 현대음악 작곡가로 활동하신다. 우연한 기회에 인연이 닿게 됐다. 수업을 들을 때마다 두세 명의 다른 이를 만나게 되는데, 빼곡한 콩나물 사이 텅 빈 내 곡을 들고 갈 때마다 부끄러움이 든다. 새로 곡을 쓸 시간은 없고, 이번엔 총보를 만들어 가사를 독일어로 번역해 가볼까 생각하고 있다.
제주는 내게 살가운 도시는 아닌데, 이곳에서의 인연이 덜컥 시작돼버렸다. 아름다운 곳에서 음악을 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까?
어제 만난 감독님은 "뭐든 다 작곡하신다면서요?"라고 물었다. 나는 당황해서 얼버무렸지만, 결과야 어찌 됐든 만들 수는 있으니 반 정도는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예술가, 혹은 작곡가, 가끔은 피아니스트라 불린다. 가끔은 누군가를 가르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겐 마냥 부족한 학생이기도 하다. 또 어떨 땐 아무것도 아닌 외로운 @ab7b13이기도 하다. 이제는 그 호칭 사이의 간극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적당히 유명하고 망해버린 오빠들을 만나러 가는 군요^^ 글에서 나루님의 즐거운 기대가 느껴집니다.
외로운 나루이기도 하다.... 문득 문득 혼자라고 느낄때가 있는것 같아요
오랜만이예요. 저도 내년에는 꼭 제주도에...
멋있는 분이시군요.@ab7b13님을 알 수 있는 글이네요.
일하러 가셨지만 그래도 제주도는 여유로운 느낌을 한아름 줄 것 같네요. 저도 저를 무어라고 정의해야할지 결정적인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냥 정의되지 않은 시간을 받아들이고 있는듯해요.
선생님을 만나시다니 약간의 설레임과 부담이 같이 느껴지네요.
11월 한 달도 화이팅입니다.
건강 챙기시고요...
에이플랫세븐플랫서틴님. 가사에 곡 붙이는 작업도 하시나요? ^^
마지막 문단이 넘 멋있네요..
아름다운 곳에서 음악을 하고 싶은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든 아름다운 곳에서 하면 조금이나마 일의 힘듦을 매울 수 있겠죠.ㅎ
부산 잘 다녀오세요~~~ 몸 꼭 챙기시구!!!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루쯤은 푹 쉬셔도 괜찮으시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