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대의 어른들

in #kr7 years ago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어린 왕자

기원전 1700년 경 수메르 시대에 쓰인 점토판 문자를 해독했더니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 라는 내용이 나왔다고 한다.

어른이라는 단어의 국어사전 정의.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단순히 내가 만나고 겪었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 시대의 어른들이라는 말로 시대상을 담을 수 있을까? 그러나 거기에 재미있는 사실은 세월이 지나면서도 어른들과 젊은이들에 관한 시대상은 크게 바뀌지 않은 듯 하다. 역사 책에서 보는 많은 문명국들이 흥하고 망하는 세월을 거치면서 특정 나라의 초기와 후기에 젊은이들을 비교한 어른들의 반복되는 목소리 일수도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은 누구였을까? 명절이면 한 집에 모여 TV를 보며 한 마디씩 하는 아재들, 할아버지들, 거기에 그나마 그 무리에서는 조금 젊은 축에 껴서 앉아 말을 주고 받진 못하며 돌아다니다가 내 또래와 같은 애들을 괴롭히는 어른들.
학교에 항상 만나는 선생님들, 방과 후 학원에서 만나는 선생님들, 그리고 부모님. 여기에 조금 더 보태면 각 학교 앞에 있었던 문구점 아저씨들, 오락실 PC방에 있는 아저씨들, 가끔 친구네 집에 놀러가게 되면 만나게 되는 친구의 부모님들.

당연하겠지만 이 중 선생님들과 부모님이 가장 큰 역할을 보통 하게 된다. 우선 선생님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초등학교에서 여섯 분의 담임 선생님들, 중학교 세 분의 담임 선생님들, 고등학교 세 분의 담임 선생님들이 있다. 단순히 어떤 기억들이 남아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생각해보았다. 그 중 몇몇 기억이 나지 않는 선생님들은 친구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벌써 서른이 된 친구들 역시 기억하기가 쉽지 않나보다. 되려 내게 이런걸 왜 물어보냐며 화를 내는 친구들도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정말 이것 하나 뿐이다. 수업이 시작하고 오늘까지 해야하는 숙제 혹은 시험지를 모두들 책상 위에 올려 놓는다. 선생님은 앞에서 차례차례 학생들의 시험지를 확인하면서 뒤로 오신다. 그리고 잘 한 학생에게는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 주시고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에겐 도장 뒷 편의 동그란 부분으로 꿀밤을 때리셨다. 어김없이 다가오는 차례에 도장으로 머리를 찧이고 나면 골이 흔들릴 정도로 그 충격이 어마어마 했다. 그것을 맞고 서러워 우는 아이는 잘 없었는데 다들 자신의 머리를 부여 잡으며 5초 정도는 고개를 숙였어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전형적인 아줌마 선생님이셨다. 한국의 많은 아주머니들을 비하하고자 하는건 아니지만, 당시 선생님은 정말 목소리가 쩌렁쩌렁하였고 말을 조곤조곤 잘 하시며 학생들의 잘못에는 그렇게 윽박지르며 구박을 하듯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왜 그렇게 많이 불렀는지 모르겠는데 ‘개똥 벌레’ 라는 노래를 알려주시면서 그렇게 율동을 누구보다도 앞에서 열심히 하셨다. 손동작이 정말 현란했다. 수업 중에 같은 또래의 아들이 있다며 빨래를 하기 전에 아들 녀석의 빤스를 보면 언제나 누런 자국
이 있다면서 더러워서 못봐주겠다며 남자들에게 그렇게 주의를 주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나이가 많으신 여선생님이셨다. 여기서도 딱 한 가지만 기억이 난다. 당시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선생님에게 반 친구들 앞에서 등짝을 몇 번이나 맞고 입은 옷이 까발려진 체로 팔꿈치와 몸을 가리키며 씻고 다녀라며 호되게 처벌을 하셨다. 그대로 화장실까지 끌려가서 강제로 몸을 씻기고 윗통이 다 젖은 채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다. 그 뒤론 학급을 졸업할 때까지 얼굴도 못들고 다녔었다. 여자 애들은 나를 더럽다며 피해다녔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 역시 어머니 나이뻘의 수학 여선생님이셨다. 기억엔 성격이 참 날카로운 신 분이었다. 반의 대표를 뽑을 때도 남학생 반장과 여학생 부반장이 나왔는데 부반장을 반장으로 바꿔버렸다. 야단을 치실 때 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턱을 좌우로 움직이던 학생에게 보기 싫다며 야단을 더 치던 것이 기억난다.
하루는 방학이 끝나고 내주신 방학 숙제를 풀이해주시는 시간이었다. 각자 풀이를 원하는 문제의 번호를 외치며 풀어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장난 삼아 18번을 고래고래 소리치며 반 친구들과 경쟁했다. 그러다 순간 선생님이 벌떡 일어나서는 나에게 와선 가져온 출석부로 정말 사정없이 약 30초간 때리셨다. 이렇게 혼나거나 맞은 기억만 있는 걸 보면 나도 참 좋은 학생은 아니었나 보다. 대개 많은 모범생들의 경우에는 당시 고민 상담을 해주신 선생님들이 생각이 날테지만, 어떻게 이렇게 맞은 것만 기억하는지 모를 일일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아주 젊으시고 학교에서도 소문난 미인의 국어 선생님이셨다. 그런 이유에서 기억에도 많이 남거니와 들리는 소문이나 이야기들이 많았다. 게다가 친한 친구 한 녀석은 대학교 졸업을 하고서도 이 선생님과 연락을 계속 주고 받으며 지냈다고 한다. 덕분에 대학교 졸업을 한 뒤 선생님을 한 번 만날 수도 있었다.
묘한 인연이 아닐 수가 없다. 평소 스승의 날이면 찾아가고 싶을 만큼 뵙고 싶은 선생님도 없을 뿐더러 졸업을 하고 만나는 선생님들은 결국 일반인처럼 만나는 것이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아무리 매정하고 나쁜 선생님들이라도 기억 속엔 그래도 항상 더 많이 알고 지식을 주는 존재로 남아 있길 바랬다. 한 때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내 마음속 작은 바램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당시 당차게 학생들에게 야단도 잘 치시고 내가 본 젊은 여선생님들 중에선 나름 체계적으로 반을 이끌어 가셨다. (어쩌면 아직 중학교 2학년이어서 선생님을 여전히 무서워하고 있어서 가능했을 수도 있다.) 대부분 고등학교에서 본 많은 여선생님들은 남학생들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도 그런 것이 남자고등학교에서 여선생님 혼자서 수업을 하는데 한 학생이 말도 듣지 않고 선생님을 때리지만 않을 뿐 반항을 넘어선 투쟁을 한다면 제대로 대처를 할 수 있는 여선생님들이 몇 분이나 있을까.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남자선생님을 부르셔서 박살을 내버리기 보단 두손 놓고 포기를 하시는 분들이 더 많았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여선생님에 대해서는 정말 추억같은 미담이 많았다고 해야겠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몇 장면들은 당시 동전을 이용해서 작은 도박을 즐기던 학생들을 혼쭐을 내주던 모습,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생전 처음듣는 역할까지 나눠주며 철저하게 역할분담을 시키던 모습, 내가 화장실 청소로를 하다가 변기를 박살내 버렸을 때 대처를 해주시던 모습 등 나름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중 친한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들 덕분에 좋은 추억으로 남은 기억이라고 해야될지 예쁜 여선생님 덕분이라고 해야될지는 조금 더 고민해 봐야겠다.

가장 최근의 기억은 한 4년 전 선생님과 연락을 간간히 주고 받던 친구에 의해서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젊고 이쁜 여선생님에서 두 아들의 엄마가 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사제간의 관계를 떠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웃고 떠들었지만 되려 내 마음속에서 선생님은 이제 3~40대 선생님 전형의 중앙으로 가고 있었다. 같은 동료 선생님과 결혼한 모습,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모습, 레고 장난감이 비싸다며 하소연을 하는 모습 등 이 만남을 통해서 내가 바란 것인지 무엇인진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정확한 것은 중학생 때는 특별해 보이던 선생님이 평범해 보였다. 만나면 또 새로운 것들을 알려주실까 혹은 삶의 모습과 행동에서 배울 점들을 찾고 싶었던 작은 우상을 하나 잃은 기분이었다. (물론 선생님께서 졸업한 학생들 앞에서도 이미지 관리를 위해 이상한 노력을 해야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무슨 자신감인지 선생님께 학교에 신규로 들어오신 여선생님들이 있으면 소개시켜달라고 물어봤던 것이 기억난다. 아주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고등학교로 들어가면서부터는 보다 많은 기억들이 있다. 솔직히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다. 남자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반 친구들과 싸운 적도 여러 번 있고 하루 2/3를 학교에서 보내면서 파릇파릇한 10대의 마지막 열정이 싸그리 졸업과 함께 사라진 기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등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다시 해 좋은 대학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이렇게 버러지 같은 대학을 나왔는데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당시 내 생각에 남자고등학교는 최악의 남자 소굴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30대 초반의 젊고 잘생긴 수학 선생님이었다. 남자 고등학교만의 특성인진 모르겠지만 미쳐날뛰는 남학생들을 다루기 위해서 선생님들이 각자 자신의 개성있는 매 (몽둥이)를 가지고 다니셨다. 이 선생님의 경우 당구채 보다 조금 짧은 나무 몽둥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 야단을 칠 때마다 당구대에서 쓰는 ‘맛세이’ 라고 하는 기술로 머리통을 쳤었다. 개인적으론 공부를 열심히 하라며 많이 다독여주신 선생님이셨다. 그래도 억울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한 번은 저녁시간 배식을 하다가 반 친구와 싸움이 벌어졌다. 배식을 하던 중 준 반찬이 적다는 이유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은 싸움이었다. 물론 싸움을 잘 못한다. 그대로 담임선생님께 불려가 둘이서 더 맞았다. 억울한건 둘 째치고 강제로 화해를 해야하는 그 상황이 어찌나 어색하고 짜증이 났다. (솔직히 싸운 녀석에게 엄청난 분노를 여전히 느끼고 있지만 다음에 기회에) 판사에게 공정하게 심판을 받는 것도 아니지만 이만한 나이에 싸웠는데 잘잘못도 따지지 않고 둘다 혼난다는 것에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지 그때서야 알았다.
그 뒤로도 그 녀석은 반 친구들을 하나하나씩 두들겨 패면서 욱하는대로 살았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재수가 없는 놈이었다.

두 번째로 기억나는 것은 영어 듣기 시간이었다. 그날 따라 너무 지루하여 영어 듣기를 하면서 시험지에 낙서를 하였다. 솔직히 영어 듣기라는 것이 한 번 듣고 답안을 선택하는 시간에 빨리 선택하면 아주 여유롭게 치를 수 있는 시험이었다. 한 문제를 듣고 풀고는 낙서를 하고 다시 한 문제를 풀고 낙서를 하는데 선생님이 그걸 보고는 시험을 치르지 않는줄 알고 그대로 귀를 잡아다 밖으로 끌고 가셨다. 그대로 엎드려서 맞고 나서는 억울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맞고 운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파서라기 보다는 정말 설명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에 억울함에 울컥하고 말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결혼하신 30대 중반의 젊은 국어 선생님이셨다. 어쩌다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내가 쓴 시를 선택해주신 선생님이셨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누가 신경을 쓰며 시를 쓰겠는가. 거기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글을 쓰라며 주어진 한 시간의 여유를 더 공부를 하는데 쓸 뿐이었다. 그 틈에 껴서 공부가 갑자기 하기 싫던 내가 갑자기 시상이 떠올라 마음대로 지껄인 하나의 시가 작은 상은 타게 되었다. 이걸 가지고 나 스스로도 큰 의미를 부여한 것도 아직 참 믿기지 않는다. 당연히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걱정하게 되는 대학 학과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소설가가 왜 그렇게 하고 싶었나 떠 올려보니 관련된 기억은 이 것 뿐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아버지 뻘 중년 남성의 수학 선생님이셨다. 덩치도 엄청 크셨고 지금 떠올려 보면 만화 슬램덩크에 나오는 ‘고릴라’ 캐릭터처럼 험상굿게 생긴 얼굴이었다. 대부분의 반 학생들이 정말 선생님이 무서워 많이 조심을 했었다. 여름 방학 때 수업에서 몇몇 학생들이 수업에 출석하지 않고 학교 밖을 나갔었는데 그 일이 발각되고 난 뒤에 아이들을 엎드려 놓은 상태에서 발로 차고 귀싸대기를 때리는 모습을 봤었다. 정말 때리는 모습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진로상담 시간에도 제대로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계집애 처럼 혓바닥 차면서 수줍어 하지 말라’ 고 말하시며 꾸지람을 들었었다.
3학년에 들어와서 내 성적이 바닥을 치는 것을 보신 선생님이셨다. 거기다 수능이 끝난 뒤 진로상담이란 것도 필요없이 혼자서 모든 지원군에 같은 과를 넣어버렸고 다 실패한 뒤에는 씁쓸하게 전문대로 진학을 했다며 소식을 전해야 했다.

이외에도 중학교에 들어가고 부터는 각 과목에 담당선생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들은 한 순간 선생님들이 폭발하여 학생들을 처벌하는 모습들이 아니었다. 그 1년이라는 시간 안에 변해가는 그들의 여러 모습들의 의외로 충격적이었다. 새학기가 시작되면 과목들도 바뀌면서 많은 새로운 선생님들을 만나기 마련이었다. 처음엔 조용하고 나긋하게 수업하시던 선생님도 금새 학생들의 시건방에 날뛰어 폭력적이고 과격해지기 마련이었고 처음부터 세게 나오던 여선생님들은 끝내 두손두발을 들고 포기한 채 수업 시간에 공부와 관련없는 이야기를 하며 학생들을 달래야만 했다.

당시 장래희망이 선생님이었던 내게 이런 선생님들의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었고 스스로 저런 직업은 못하겠다며 선을 그었었다. 지금도 서른이라는 나이에 누군가 나에게 오빠나 형이라면서 무언가를 알려달라며 만날 때면 불안감과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그렇다고 타고난 고질병에 의해 누군가에게 설명을 못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항상 나는 누군가에게 알고 있다며 알려주기 이전에 스스로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선생님들이라고 모든 걸 다 알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특정 시험에 나오는 문제에 대한 접근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역사 선생님이 과연 일개 역사학자들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을까, 직업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삼국사기’ 만을 연구하는 역사학자가 근현대사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에 비해 근현대사를 잘 알고 있을까? 본의아니게 선생님들은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자신도 모르게 감추어야할 때가 생긴다.

나는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어 누군가에게 알려줄 때에는 정확히 말하고 싶었다.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이고 세상엔 이게 전부가 아니고 무수히 많은 모르는 것들이 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떤 학생은 이런 선생님에게 참 아는 것이 없다며 싫어할 수도 있고 어떤 학생은 솔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