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의 아침묵상 / 2017. 11. 1 (수)
■ 에베소서 1:1-6
[ 그가 사랑하는 자 안에서 ]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소개합니다(1).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종으로서의 고백이며, 자신의 사역과 삶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곧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소속과 신분은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고 어떻게 직무를 수행해야 되는지에 대한 분명한 방향성과 책임감을 부여합니다. 군대에서 계급장과 이름표가 군복에 부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등성명을 복창하도록 한 것은, 군인으로서의 자세와 본분과 책임을 잊지 말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처음 마음을 잃고 어느새 자신을 드러내며,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와 귀를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처음 마음을 잃지 않기란 쉽지않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항상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적권위로 세움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자신을 대중과 구별하여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자리와 책임을 잊지 않기 위한 겸손의 고백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부르는 성도들 또한, 그러한 사도바울의 동역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자들입니다(1).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비록 혈통적으로는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택함을 받은 동역자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2-13). 우리는 혈통이나 출신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택함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육체를 입은 우리 중 그 누구도 왕노릇 할수 없으며 주인이 될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왕이 되시며 주인이 되십니다. 권위는 사람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라 기름부어 맡기신 성직에 부여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잊으면 군림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교만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을 자처했던 바울은 외적으로는 은혜와 평강과는 전혀 관계없을 것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즉, 그가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삶 전체가 죽음같은 고난의 연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에베소교회에 기원한 은혜와 평강은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것과 편안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교회는 로마의 큰 도시 중의 하나로서 다이아나라고 불리는 아데미 신전이 있는 근거지였습니다. 에베소가 항구로서의 역할을 상실하면서도 무역의 쇠퇴하게 되자, 아데미 숭배와 관련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물질적으로는 부유해졌으나 우상숭배와 음행이 많연하게 되었습니다. 아데미 연신이 성의 후원자였던 만큼 아무런 여자들은 스스로 창기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남자들은 죄책감없이 자신의 몸을 창기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이는 에베소교회가 처한 사회적 상황을 말해주고 있으며, 감옥에 갇힌 바울로서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치열한 영적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갈 수 없었고, 애닮고 간절한 서신을 쓰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은 계시록에 잘 나타나있습니다(계2:2-3). 에베소교회에는 악한 사람들이 있었고, 거짓사도들이 성도를 미혹하고 있었으며, 니골라당과 같은 이단들의 미혹이 있었습니다. 이는 에베소교회 성도들 모두가 주님의 이름으로 참고 견디며 끝까지 싸워야할 영적전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기원한 은혜와 평강은 그러한 그들이 겪어야 할 영적인 전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부족함이 없고 편안한 상태가 지속될 것을 기원한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치열한 영적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인도하셔서 교회를 강건하게 세워가심을 경험하며, 결국에는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 속에 있을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2).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서 죄와 타협하며 사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이는 캄캄한 밤과 같은 상황입니다.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의 확신이 없는 두렵고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3). 이러한 사도바울의 증거는 성도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특권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는 구별된 신령한 복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복을 세상에서 누리는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므로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즉,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이 곤궁하지 않도록 공급해 주시는 열매입니다. 열매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는 곧 물질은 영원하지 않고 이 땅에서 삶의 필요에 따라 주시는 한정적이고 제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가 받은 복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썩지 아니할 신령한 복입니다. 또한, 성도로서 그러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성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집행된 구원사역을 통해 주신 놀라운 은혜의 선물입니다(4). 그러한 은혜는 "그가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입니다(6). 우리의 구원은 사람으로 인해 생산된 그 어떤 유형이나 무형의 부산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저 주신 것입니다. 구원을 얻을 만한 아무런 공로도 없는 자가 자격도 없는 자가 전적인 은혜로 거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나의 노력과 공로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그러므로 선한 행위는 구원받은 자의 증거이며 열매일뿐, 구원의 자격이 아닙니다. 이처럼 아무런 공로와 자격이 없는 자를 택하시고 전적인 은혜로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릴 수있는 이유가 됩니다. 자신의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향한 찬송도 없습니다. "우리를 택하사 그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시고"(5),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을 "거저 주시는 바"(6),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셨습니다(6). 즉, 택하시고 예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사역을 실행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심으로 영광과 찬송을 그 백성으로부터 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찬송이 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기도>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구원의 가치를 깨닫게 하옵소서. 썩어 없어질 물질의 잣대로 은혜로 거저주신 구원의 가치를 정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오늘 내게 주신 복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감사하며 모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