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수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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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8일 수요일의 기록 │ by @chaelinjane
요 며칠째 잠이 너무 고팠다. 매일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오랜 시간 서 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지만 스물 여섯 명(그새 사람이 늘었다!)이 부엌과 거실, 화장실, 샤워실을 나눠쓰며 복작복작 살아가고 있었다. 절망스러운 생각의 첫 문장이 저절로 움트기 시작했다면 단번에 그 여린 줄기를 잘라내야 한다. 생각이 많아지면 곤란해진다. 향긋한 커피 한 잔, 맛있는 초코 과자, 나른해지는 맥주, 영화 한 편, 포근한 잠, 어떤 것으로든 기분 전환을 해내고 현재에 발을 푹 담궈야 한다. 지난 일요일에는 애석하게 새벽 여섯 시에 눈이 떠져 홀로 거실에 앉아 새벽 공부를 했다.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고 싶을 때 잠을 잘 수 있었던 나날들이 까마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예전에 학교에 근무할 때처럼은 힘들지 않다. 그때는 정말이지 아침에 일어나는 것 조차 싫었으니까. 그럼에도 육체 노동의 어쩔 수 없는 고됨은 저릿한 피곤함을 찌꺼기로 남기고 있었다.
어제는 노을이 예뻤다. 이곳은 요즘 밤 여덟 시를 훌쩍 넘어서야 해가 지기 시작한다. 해 뜨는 시간은 한국에 있을 때와 비슷한데 낮이 기이하게 길어진 셈이다. 문득 이 나라에 노예 제도가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지지 않는 해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싶다. 어제는 작정하고 일찍 잠을 청했지만, 하늘을 본 두두가 뱉은 감탄사에 일어나 기어이 창문 밖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었다. 그러데이션도 없이 온통 다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카메라를 가지고 밖으로 나갈까 하는 생각이 5초간 머물다 사라졌다. 지금의 잠 기운을 몰아내면 고통스러운 후회가 찾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달콤하다, 는 생각과 함께 나는 꿈으로 사라졌다.
꿈에 지혜로운 노인이 다녀가셨나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는 것. 그것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불이 꺼지고 눈 앞의 스크린이 영상의 비율로 줄어드는 순간과 비슷하다. 눈을 감은 지 몇 시간이 지나서 꿈이 시작되어도 관객은 화를 내지 않는다. 꿈이 상영되기까지 얼마나 흘렀는지 알 길이 없으므로. 오랜 시간이 지나고 꿈의 윤곽이 흐릿해지며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깨어난 직후 마음 속에 떠오른 단어는 깊은 믿음과 따뜻한 감정이었다.
꿈에서 우리는 대리석 바닥에 황금빛 조명이 번지는 호텔 로비 같은 곳에 있었다. 우리의 즐거운 대화가 돌연 중단된 것은 이름 모를 여인이 등장하고 나서부터였다. 그녀는 두두의 전 여자친구였다. 횡설수설하며 약간은 정신이 없는 듯한 모습으로 두두와 할 얘기가 있다고 찾아온 것이었다. 꿈에서 나는 그 여인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우리보다 나이가 많다고 느껴졌다.
그래, 얘기 나눠요.
순간적으로 수만 가지 감정에 휩싸였지만 꽤 마음을 굳게 먹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꿈에서 나는 관객이 되어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감정과 생각들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두두와 여인에게 시간을 내어주고 나는 밖을 나왔다. 내가 머물고 싶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거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떤 장면들이 건너뛰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내가 2x세 때 만났던 그 사람이 취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그와 헤어졌을 때 우리는 마지막으로 맥주를 마시며 함께 한 시간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는 멀쩡했지만 꿈에서는 어쩐 일인지 진탕 취해있었다. 두두에게 찾아온 여인이나 지금 이 사람이나 무척 외로워보였다. 우리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상대방은 어떤 감정을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이 상황을 바르게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까 나왔던 거리를 다시 걷고 있었다. 가로등이 켜진 고요한 길이었다. 어떤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때 길의 끝에 똑같은 걸음으로 오고 있는 두두와 눈이 마주쳤다. 두두도 그 여인을 똑같이 돌려보내고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눈이 길 위에 마주쳤던 그때, 마음 속에 떠오른 감정은 깊은 믿음과 따뜻한 감정이었다.
비구름이 가져온 선물
월요일부터 일기 예보에 비구름이 그려져 있었는데 월요일 화요일을 건너 뛰더니 드디어 오늘! 비가 내리고 있다. 새벽 다섯 시에 날씨를 확인하자마자 쾌재를 부르고는 노트북을 가져와 이 글을 쓰고 있다. 일기 예보를 확인하니 점심 때까지 비올 확률이 90퍼센트였다. 오후에도 일을 시작할 것 같지는 않다. 월요일부터 비 언제 와...?
를 외치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단비다. 하늘이 적절한 때에 거짓말처럼 비를 뿌려 쉬는 날을 만들어주니 이 일이 더욱 할만하게 느껴진다. 법이 일일이 강제 휴무일을 만들 수 없을 때에 이렇게 하늘이 돕는다. 지출을 아끼기 위해 외출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영화 한 편을 보고 각자의 공부를 이어가기로 한다.
단비같은 단비군요!! 덕분에 리리님 글도 오랜만에 읽을 수 있구요. :) 꿈은 알 수 없는 무의식 아래의 것 까지 끌어올려 꼬아내어 주니 참 요상한 존재인 것 같아요.
몽상가p님 오랜만이에요...!! :) 중간에 일을 끝내고 또 지역을 옮겨서 한동안 접속을 못하다가 이제 돌아왔습니다 ㅎㅎㅎ 꿈은 기억하려고 노력할수록 꿈을 꾼 사람에게 더욱 생생하게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가끔은 기억이 남아 있을 때 꿈에서 보았던 것이나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기록해놓는답니다 ㅎㅎㅎㅎ
어쩌면 영화는 꿈을 현실화시킨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에서 삶에 대한 단단함이 느껴지네요 외국에서 맞는 비는 어떤 기분일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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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단단함'이라 표현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삶을 돌아보게 되네요. :) 가끔 햇볕이 쨍쨍한데 비가 내리는 경우가 있어요. 그때가 가장 기분 좋은 비랍니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