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딱 한 번 내 앞에서 이혼을 말했다.
고3 설날 때였다. 입시생이라고 주름잡을 시즌이라 친척네 놀러갈 형편이 못 됐다. 엄마도 동감. 유일하게 아빠만 버럭 화를 냈다. 그땐 어이없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계획을 너무 쉬이 거절했던 게 화근이었다.
아빠는 소심했다. 고1때였나. 자정까지 자습하고 집에 들어가려니 대문이 잠겨있었다. 이게 무슨 일. 곧 입구가 열리긴 했으나 아빠의 호통이 나를 막아섰다. 내가 그 시간까지 놀다 온 줄 알고 정수리까지 열이 뻗친 그였다.
오해는 다음 날 풀렸지만 사이는 안 풀렸다. 나는 굳이 말을 아꼈다. 이틀쯤 지났을까. 말없이 아침 밥을 먹는데 아빠가 뾰루퉁 성을 냈다. '언제까지 말 안 할거야!' 그렇게 말을 걸어버리면 말을 안 할 도리가 없었다(?!)
자상하지만 쫀심이 쎘던 아빠는 돌아가실 때쯤 꺾였다. 정확히는 대나무처럼 뻣뻣하게 버팅기다가 결국 접히고만 셈이다. 중환자실에 누운 그는 영락없이 약했고, 겨우 그를 보러왔더니 간호사가 면회 시간표를 가리켰다.
나가야 했다.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아빠의 흰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고맙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은 못 하고 나는 "그냥 갑자기 나가라니까 짜증나서 그래. 보고싶어서는 아니야" 따위의 말을 했다. 10대를 못 벗어난 스물이었다.
아빠는 이해한다는 듯 힘없이 웃었다. 그게 억울했다. 평소의 아빠라면 내심 서운해하고, 삐치고 볼멘소리도 하며 속좁게 굴었을텐데. 불완전한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나를 품어버리는 게 그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아마 그때부터 표현에 집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오늘이 늘 마지막날 같았다. 불완전한 상대방의 모습에도 결말이 있다는 게, 그마저 변한다는 게 나빴다. 내일이 있다고, 인생이 길다고 인정하기까지 먼 길을 건너왔다.
그래도 그 설움만은 여즉 마음에 남아 때론 신묘한 에너지를 뿜었다. 내 말과 태도가, 나의 하루가 마지막이어도 괜찮도록 힘이 돼줬다. 남의 표정을 유심히 보도록, 기억력이 나쁘더라도 그걸 잃지 않도록 기운을 북돋았다.
가끔 유서를 미리 써두는 사람들을 보며 떠올린다. 아, 소중한 사람을 잊기 전에 기록하는 것도 내가 남기는 유서일지 모른다고. 이젠 추억 속에서 입을 뻐끔대는 아빠를, 조금이나마 선명하게 적어야겠다고 느낀다.
많이 남기고, 많이 사랑하시라:)
clarekim I upvote you.i am not understand chine so next time post convert English .
this is not chinese. it's korean:) I'll try English anyway. thanks!
use US tag and you see English.
진중한 분위기의 글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유독 아시아인들을 '중국인'이라 호칭하는 버릇을 가진 스티미언들이 있네요.
ㅎㅎ 뭐.. 오프라인의 반영이겠죠;)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