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량이라는 우상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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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의 목적과 맥락을 두 가지 성격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 성격이다. 형벌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규칙이나 계약을 위반한 것에 대한 응징이고, 정당하게 보장된 타인의 몫(생명, 재산, 성…)을 침해한 것에 대한 보복이며, 이런 위반과 침해가 또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본보기다. 이는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로 인식하고 또한 요구하는 성격이다. 사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 자체가 이런 원리로 조직되어 있고 그것을 유비적으로 투영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또다른 하나는 사회적 성격이다. 여기서 사회라는 단어는 전통적인 공동체나 개개인의 계약 관계의 합과는 구분되는, 인간을 전통이나 개인과는 다른 차원에서 해석하고 조직하는 의미·가치의 망이다. 「그의 범죄는 단순한 개인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모순의 결과다」라고 흔히들 말할 때의 그 사회다. 여기서 인간은 도덕·규칙을 지키고 전승해야 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전통적 인간이 아니다. 또한 오로지 자기 이성에 따라서 자유롭게 행위하고 그 행위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으로 가정되는 개인도 아니다. 인간은 복잡한 사회적 맥락에 의해 규정되고, 사회적 의미망의 매개를 통해 그 자신과 사회를 역동적으로 바꾸어가는 존재로 나타난다.

형벌의 사회적 성격은 대표적으로 교화 정책에서 나타난다. 교화는 좁은 의미의 교화 프로그램일 뿐 아니라, 범죄자 개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지양하고 이를 교육 및 사회 복귀로 대체하려는 방향성이기도 하다. 이는 우선 범죄자에 대한 다른 관점 때문이다. 즉 범죄자는 마땅히 지켜야 할 전통에서 엇나간 일탈자나, 계약을 어김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저버리고 개인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자로 취급되지 않는다. 그는 사회적인 결과물이다. 따라서 사회가 교화 대신 가혹한 처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범죄의 공동 책임자인 사회의 역할을 방기하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된다. 또한 사회는 전통적 공동체나 개인들의 계약 관계와는 달리 누군가를 배제할 수 없다. 전통적 공동체에서의 일탈자나 계약 관계에서의 위반자와 같은 자격 상실자의 범주가 사회에는 있을 수 없다. 어떤 것도 사회적인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는 절대적인 내용을 가지지 않고 끊임없이 변할 뿐인 생산이며, 따라서 고정된 내용을 가진 전통적 공동체나 계약 관계처럼 누군가를 배제하면서 온전히 작동할 수 있는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단어를 온전히 유지하고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가장 반인간적으로 보이는 악당에게서도 인간성을 발견하고 테이블로 끌어들여야 하는 역설과 마찬가지다. 범죄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논하고 사회 안으로 복귀할 수 있게 하는 방향만이, 사회적 관점에서 형벌이 정당화되는 근거가 된다.

더 나아가 형벌에 대한 사회적 관점은, 형벌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며 형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들은 형벌로 모든 것을 끝내려는 전통적 경향을 비판한다. 응징, 복수, 본보기 등의 성격을 가지는 전통적 경향은 공통적으로 모든 문제를 형벌로 매듭지으려 한다. 일탈 행위로 인해 생긴 균열을 그에 마땅한 응징과 보복으로 메우고, 적법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하나의 복수를 통해 복수의 악순환 및 모든 논란을 끊으며, 섬뜩한 본보기를 통해 이런 일탈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이는 범죄의 사회적 맥락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심지어 범죄자 개인에 대한 화려한 형벌 퍼포먼스를 통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사회적 모순을 은폐한다. 형벌이라는 퇴마 의식을 통해 사회가 평화롭고 정상적인 것으로 복귀하는 것마냥 연출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애초에 사회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범죄자에 대한 가혹한 형벌에는 기만적인 측면이 있다. 심지어 전통적 이유 중 가장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본보기로서의 성격이 수많은 논란에 휩싸여 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가혹한 형벌이 사실 범죄율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없다면, 그리고 언제나 보수적 담론이 범죄의 사회적 맥락을 외면하는 방편으로 엄벌주의를 통한 본보기 효과를 내세우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혹형의 기만성이라는 문제는 가볍게 넘길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은 언제나 누가 얼마나 가혹한 벌을 받는지에 관심이 있지, 그 사회적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다수의 심리 자체가 범죄를 개인적인 것으로(심지어 흥미로운 구경거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사회적 관점에서 범죄는 하나의 증상이다. 거기서 더 중요한 것은 증상을 유발하는 근본적인 질병, 즉 사회적 모순이고 그에 대한 논쟁이다. 사회를 진정으로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에 대한 가혹한 형벌에만 집중되는 담론 구조, 사회적 균열의 몫까지 범죄자 개인의 형량으로 몰아버리는 대중 및 정책 모두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형량은 범죄를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범죄의 끔찍한 결과와 그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응징, 복수, 본보기, 정의라는 형태로 범죄자 개인이라는 편리한 형상에 집중된다. 범죄자 개인은 죄의 끔찍한 대가를 혼자 짊어져야 하는 것으로 암암리에 전제된다. 범죄에서 사회적 모순이 차지하는 비중, 범죄자의 교화 및 원활한 사회 복귀를 위한 적절한 정도 따위는 애초에 고려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분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런 불균형한 형량 논의는 사회적 관점에서 지극히 불의하며 또한 형벌 체계 전체를 교란할 위험성이 있다. 개별 범죄의 형량 문제는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범죄와의 균형 문제를 야기하고 형벌의 전체적인 기조 문제까지 이어진다. 형벌의 엄벌주의 기조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형벌의 목적 및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다수의 문제를 야기한다. 형량은 분노한 만큼 써갈기면 되는 숫자가 아니다.

어떤 범죄 뉴스가 나오고 세상이 시끄러워질 때마다 사람들은 처벌 강화, 형량 증가를 외치곤 한다. 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반응은, 그러나 생각해보면 기이한 일이다. 처벌이 약하기에 범죄자들이 겁을 먹지 않고 범죄를 일으켰다는 생각이 어떠한 의심도 고찰도 없이 당연하게 전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와 형벌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목소리는 「불우하다고 다 범죄를 일으키냐」 등의 돼먹지 못한 동문서답에 묻힌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주된 여론이 되고 공식적인 담론과 정책에 영향을 미친다.

지극히 실리적 관점에서만 따져도, 앞서 언급했듯 처벌 강화와 범죄율 감소의 관계에는 논란이 많다. 그런데 이런 인과 관계에 대한 논란과 여론 사이의 괴리는 어찌된 일일까? 합리적 고찰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처벌이 강하면 겁이 나서 죄를 안 저지를 거야」라고 생각하는 단세포적 뇌거나, 범죄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 및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범죄율 감소라는 그럴 듯한 기표를 빌려 포장하는 것. 진짜 이유는 비합리적이라도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인 근거를 내세워야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형벌 문제를 합리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는 더더욱 접근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대다수의 인간은 감정 이입 혹은 공감을 통해 도덕적 견해를 형성한다. 당연히 대부분은 피해자 혹은 피해자 가족에 이입하고, 그 결과는 극단적 분노와 강력한 복수의 요구다. 이는 분명 인간의 자연스럽고 피하기 어려운 조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문제의식이나 비판도 없이 통용되며 사회적 여론 형성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부시가 듀카키스에게 가했던 비열한 질문을 인간적으로 당연한 것이라고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올바른 주권자로서의 태도라고는 더더욱 할 수 없듯이.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의 주권자는 부시와 듀카키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다. 모든 시민은 자신의 본능과 감정을 적절하게 제어하고 이성을 통해 최선의 선택을 내릴 의무가 있는 합리적 주권자다. 동시에 사회를 최선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원리들의 보호자기도 하다. 단순히 민주주의에의 참여 권리만을 운운할 것이 아니라, 참여의 성숙한 수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반성해야 한다.

사람들은 범죄자에 대해서는 위험할 정도로 모든 상식과 원칙을 내팽개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경건하게 읊조리곤 하는 천부인권이 범죄자에 대해서는 철저히 부정된다. 범죄자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도 박탈될 수 없다는 것이 천부인권의 작동 조건이 아니던가? 설마 평생 차갑고 더러운 감옥에서 콩밥 먹다 죽는 것을 인간으로서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존엄이라고 보는 건 아닐 테고 말이다. 이 원칙을 지킨다는 데서 사회 체제 및 형벌의 정당성도 유래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원칙 유기는 결국 자기파괴적이다. 뭐, 애초에 복수라는 형식이 가장 치명적으로 훼손시키는 것은 언제나 복수자 자신이니까 말이다. 근래 한국 사회에서는 복수라는 아이템에 대해 호의적이고 심지어 열광하는 경향이 있는데(사이다!), 이는 다음에 볼 문제와도 연결된다.

둘째, 한국 사회는 사회가 상실된 사회다. 즉 사람들은 세계를 개인, 개인 간의 계약, 계약을 중재하고 감시하는 기관의 총합으로만 본다. 이런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사회적 차원은 온전히 작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믿어지지도 욕망되지도 않는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겪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사회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회적 모순의 결과라는 의미기도 하고 동시에 사회적으로 해석되고 해결될 수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사회적 모순에 의해 고통을 받아도 그것을 사회적으로 유효하게 해석하고 사회적인 대안을 그릴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 문제는 사회적 해석과 대안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어려움에 대해서 개인이 알아서 준비하고 알아서 겪어내다 알아서 죽어야 한다. 사람들은 피곤하고 무기력하며 이따금 터져나오는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다. 물론 그 분노는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저항으로 나아가지는 못하는 일시적인 폭발이고 차라리 발작적 소비다. 사회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협받는 고슴도치로 표상하고, 타인을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또한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며, 그렇게 타자와의 관계는 경계 보존의 문제가 된다. 나와 타인은 사회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으며 이해하거나 연대할 수 있는 형제가 아니다. 다만 계약으로만 묶여 있는 고슴도치들일 뿐이다. 고슴도치의 사회에서 사회적 문제는 계약을 어기고 경계를 부당하게 침범한 개인에 대한 분노로 환원된다. 분노해야 할 대상은 오직 그 혐오스런 개인뿐이다. 사회적 균열? 사회적 이해? 사회적 해결? 사회적 대안? 하, 그런 게 어디 있는데? 경계 침범자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노이로제)와 분노와 증오, 사회에서 영원히 묻어버리겠다는 매장 심리가 어디에나 넘쳐난다. 그리고 그것만이 넘쳐난다. 그렇게 사이다는 잠깐 속을 시원하게 해준다. 설령 그것이 전혀 해결책은 아니며 심지어 사태를 악화시킨다 해도. 사회 대신 경계와 배제. 사회적 전망과 욕망의 부재.

개인화된 사회는 교화에 냉소하고 복수만을 믿는다. 그러나 복수가 인간 사회의 문제 이해와 해결 원리에서 하급 단계에 속한다는 것, 지극히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은 시대와 문화를 넘어 끊임없이 확인되어왔다. 복수라는 원리는 이성적으로든 경험적으로든 당사자에게나 사회 전체에게나 저열하고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형벌이 모든 복수를 끝내기 위한 적절한 복수 정도를 넘어 아예 들끓는 복수심을 모두 대변해주려는 것으로 변질된다면, 이는 그 '현대' 사회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복수가 정의와 동의어이고 그 전부인 양 히트 아이템으로 소비되고 인간의 당연한 본능으로서 긍정되며 이성적 목소리가 위선이라고 거부되는 풍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 복수심, 분노와 증오는 언제고 존재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에는 그것의 자리가 있다. 복수심이 사회적 논의와 문제 해결의 자리를 대신해버릴 때, 기존의 주인들을 위선이고 선비짓이라고 일축할 때,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

여기서 형벌은 소비된다. 그 사회적 목적성과 원칙에 따라 신중하게 설계되는 것이 아닌, 사회적 분노와 불안의 직접적인 투사물이 된다. 자극적인 형량 올리기는 일시적인 만족감을 주며 문제에 대한 만능 해결책이자 유일한 해결책이 된다. 즉 형벌은 사회적 균열을 덮는 퇴마 의식으로 전락한다. 그렇게 형벌의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이 교란될 때, 결국 피해를 입는 것은 사회 전체다.

문제는 끊임없이 사회적 논쟁과 사유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이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당장 이어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강박이야말로 사유와 가장 거리가 먼 짓이며 또한 오늘날의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다. 제대로 된 행위가 떠오를 때까지 행위를 미룬 채 더 제대로, 더 철저하게 논쟁하고 사유해야 하지 않는가? 심지어 당장은 어찌할 도리가 없으며 일단은 이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그나마 차악이라고 당당하게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더 합리적이고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닌가? 당장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빠져 또다른 악을 생산하고 문제를 더 꼬아버리는 것, 그런 줄도 모르고 알량한 쾌감에 도취되어 있는 것보다는 말이다. 이 강박, 이 쾌감이야말로 사회(미래)가 상실된 시대의 아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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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관심이 많으신가보네요~ 근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