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은숙이 갑자기 엄마를 불렀다.
그 소리가 쨍! 하고 커서 영길은 덜컥 얼어붙는데
“왜 그래?!”
은숙의 엄마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화들짝. 총 맞은 것 처럼 영길은 부엌문짝에서 떨어졌고
“밖에 누가 있나봐. 숨소리가 다 들려!”
은숙이 다시 소리를 지르고
은숙 엄마가 부엌으로 튀어 나오고
영길이 뛰기 시작한 게 동시 다발로 일어났다.
영길은 앞 마당으로 달려 나왔는데
등 뒤에서 어떤 놈이야! 은숙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뒤따라 나오는 듯한 발소리 마저 들려오자
영길은 도저히 방으로 복귀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면 마루를 쿵쾅거리며 뛰어 올라야 하고
방문을 재빨리 열고 닫고 이불 속으로 몸을 날려야 했을 텐데
그랬다간 엄마와 아버지를 다 깨웠을 것이고
그 다음엔 흙투성이인 양말이 적발되었을 것이고
그 다음엔 내가 은숙이를 훔쳐보았어요 자백해야 할 것이다.
참 이럴 땐 기민하게도 이 모든 계산이 직감적으로 왔고
그래서 영길은 곧장 대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빗장을 젖히고 대문을 박차고 나갈 때
도둑이야-! 외치는 은숙 엄마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챌 듯 날아오다가
쾅-! 닫히는 대문 소리에 단절 되었다.
영길은 달렸다. 냅다 직진으로 전속으로.
양말만 신은 발로.
뒤따라 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어쩌면 어떤 쪽팔림이 그를 채찍질 했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은숙의 눈부시게 하얀 등 때문에
후끈해진 청춘의 박동이 또한
엔진이 되어 그의 두 다리를 힘차게 운동시켰으리라..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던 영길의 질주는
철규의 집에 다다라서야 끝이 났다.
심야에 양말만 신은 채 달려와서
죽을 것 처럼 숨을 헐떡이는 영길이
철규의 입장에선 참으로 희안했을 것이다.
영길이 한참 동안 숨을 고르고 나서는
피우지도 못 하는 담배를 달라 했고
철규가 담배를 건네고 불을 붙여주자
연기를 잘못 삼켜 켈렉켈렉 목울대가 벌겋도록 기침을 했고
그 연기가 눈을 찔러 찔끔찔끔 눈물을 훔쳐냈고
그러면서도 히죽히죽 웃었는데
그걸 내내 가자미 눈으로 흘겨보던 철규는
이거 병원에 데리고 가야 되나? 고민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영길은 철규에게 은숙이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이은숙은 영길에게 소중했던 것이다.
이은숙의 차갑고도 하얀 얼굴과
하얀 얼굴 속의 그 까만 눈동자와
도도할 정도로 꼿꼿한 걸음걸이와
옆을 지나갈 때 파장되는 공기에 실려오는 아찔한 비누내음..
가끔 벽을 넘어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
그런 은숙이
영길과 한지붕 아래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은숙을
문영길은 한철규나 개밥통 같이 덜 떨어진 놈들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혼자만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튼 문영길씨는 그렇게 해서 그 때 부터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고 한다..
영길이 학교를 파하고 아버지의 이발관을 찾아 갔을 때
제일 먼저 저 1면 기사가 영길을 맞이했다.
아버지가 신문을 펼쳐들고 머리를 파묻은 채 탐독하고 있었던 것.
영길은 이발소 거울 앞에 서서 신성일처럼 표정과 몸짓을 지어 보았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이 <삼거리 이발관>은 영길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아버지가 사장이며 직원이고 전속 이발사인 삼거리 이발관은
그 오랜 역사와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일관된 내외부의 모습으로
동네의 한 풍경으로 자리잡았고
가끔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노릇도 했다.
영길도 동네 사람들에게 이름보단 이발관 아들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머 이런 느낌 되시겠다)
다른 건 몰라도 영길은 이발관에 있는 커다란 거울이 참 좋았다.
이 거울 앞에 서면 자신이 영화의 스크린 속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처럼 손님이 없는 날은 더욱 그랬다.
아버지는 신문에서 고개를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통령이 죽은 뒤로 신문의 머리글자가 자꾸 커지는 요즘이었다.
배우 놀이를 하던 영길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용건을 끄집어냈다.
“아버지. 저 돈 좀 주세요.”
아버지는 신문의 다른 면을 또 펼치면서 목소리로만 물었다.
“뭐 할라고?”
“학원 등록 할라구요.”
기사를 마저 읽느라 뜸을 들인 아버지가 또 목소리로만 물었다.
“맘 잡았냐?”
“맘이야 벌써 잡았죠. 저야 배우 될 운명을 타고 났잖아요?”
그제서야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빤히 영길을 쳐다 보았다.
아무런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아니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 한 사람 같았다.
“아버지…”
영길은 최대한 사랑스러운 아들의 표정을 만들며 애원조로 아버지를 불렀는데..
눈을 꿈벅하던 아버지가 이해했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배우학원?”
영길은 이 때다 싶어 더욱 공세적으로 아버지에게 다가섰다.
“아버지. 신성일 좋아 하시잖아요. 신성일.”
그러면서 영길은 신성일 처럼 약간 어깨를 치켜 올리며 살짝 냉소적인 미소를 머금고 조금은 허무한 듯한 눈빛을 만들고는 목소리도 살짝 긁으며
“영이. 널 사랑하는 내 마음은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고 싶지만.. 콜록콜록.. 내 몸은 지금 정상이 아니야..”
아버지는 여전히 눈을 꿈벅였고
“어때요 아버지?”
영길은 이번엔 허리를 곧추 세우고 냉혈한의 눈빛을 하였으며 목소리는 저음으로 깔고 손가락을 권총처럼 만들고는 아버지를 겨눴다.
“배신자. 넌 사랑과 우정을 몽땅 내게서 앗아갔다.”
아버지는 손가락을 겨누고 선 영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벽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저 사람이야.”
아버지를 따라 벽을 올려다본 영길은 그제사 패착을 놓았음을 느꼈다.
거기엔 신성일이 아닌 아버지의 다른 아이돌 사진이 액자 속에 걸려 있었는데..
바로 이 분이었다...
(허장강 배우이시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 눈이었는지 아닌지는 기억 못 하지만
소리 없이 부드럽게 소복소복 아름답게 내리는 눈이었다(고 했다).
실제로 그랬는지 그 날 이은숙을 기다리던 영길의 마음이 그랬는지 모르지만..
문영길은 눈을 맞으며 대문 앞에서 이은숙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아무래도 마음을 전해야 할 것 같았다.
전하고 싶었다.
전하고 싶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눈덩이 처럼 커졌고
마음이 커져가니 초조감이 들어 다른 건 생각할 수가 없었다.
덫에 걸린 것 처럼 그 생각에 그 생각이 쌓이다 보니
늑골 아래에 이상한 통증이 자꾸 느껴졌다.
결국 견디다 못 해 대문 앞에 서 있게 된 것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마음을 전하는가, 였는데..
영길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배우였던 것이다.
스스로..
“하얀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구나. 우리도 이렇게 눈처럼 하얗고 깨끗한 인생을 살아 가는 거야. 우리. 은숙이 너와 나. 아름답지? 인생이란 무엇일까. 인생이란 말이야..”
영길은 스스로 작성한 대사를 계속해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최대한 부드럽고 로맨틱한 톤을 내려 했고
어디에서 끊어주고 호흡을 섞어야 좋은지 다양하게 구사해 보고 점검했다.
얼마나 서 있었나?
손가락과 발가락이 시려오고 칼날 같은 추위가 목을 파고 들어
아 시.. 내일 하까? 의지가 희박해지려 할 즈음에...
은숙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인 채 종종 걸음으로 걸어오는 은숙의 모습이..
가로등 아래 밝음 속으로
은숙이가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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