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THE DAY 41

in #kr6 years ago

피켓과 플래카드를 든 수백 명의 시위대들이 백악관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시위는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고, 마치 디즈니랜드에 놀러온 것처럼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고 껌을 씹고 아이들을 목마 태웠다. 몇몇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며 여기저기서 잡담을 해댔다. 시위라기보다는 마치 산책을 나온 사람들 같았다.

오직 시위대의 피켓과 플래카드만이 이들이 시위대임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시위대의 피켓과 플래카드에는 ‘사인을 규명하라’, ‘진실을 은폐하지 마라’, ‘우리는 섹스를 즐길 권리가 있다’, 등등의 글귀가 잔뜩 쓰여 있었다.

‘동성연애를 전면 허용하라.’

‘동물의 모피를 입을 바엔 인간의 모피인 알몸으로 다니자!’

정작 시위의 목적과는 상관없는 플래카드와 구호들도 난무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마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으니, 음악을 틀어놓고 자신들의 랩과 춤 솜씨를 선보이는 젊은이까지 있었다. 다들 태평한 분위기였다

파견 나온 경찰들도 도넛과 커피를 마시며 방관할 뿐이었다. 경찰들은 이런 평화로운 시위를 질서 있게 유도하며 군데군데 자리 잡고 서서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시위는 늘 있어 왔고, 폭력사태로 번진 적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다만 시위대 사이를 누비는 일단의 청년들이 일사분란하게 종이 -런던 지하철역에서 나눠주던 바로 그 종이다-를 나눠주고 바람같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청년들은 벌떼처럼 몰려와 순식간에 일을 마치고 자리를 떴다. 청년들이 머문 시간은 채 30초도 안 되었다.

청년들이 사라지자, 제법 몸집이 있는 장년의 사내들과 여자들 –전날 밤 런던 근교의 별장에서 카엘의 주도하에 끈적끈적한 혼교를 치렀던 남녀들이었다-이 시위대 속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잡았다. 이들 역시 종이를 나눠주던 청년들처럼 무표정한 모습으로 여자들과 팔짱을 끼고 있는 장년의 사내들 손에는 종이 뭉치 대신 묵직한 손가방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백악관은 진실을 밝혀라!”

주동자의 선창에 따라 시위대들도 따라서 구호를 외치며 주먹을 쥔 팔을 높이 추켜올렸다. 팔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구쳤다.

“진실을 밝혀라! 진실을 밝혀라!”

그와 동시에 건장한 장년의 사내들이 추켜올린 팔에서 손가방이 높이 던져졌다. 수십 개의 가방은 비상하는 새떼처럼 동시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던져진 손가방은 앞에 있는 백악관을 향해 힘차게 날았다. 가방은 높이 솟구쳤다가 일시에 백악관 뜰로 흩어져 떨어졌다.

“꽝!”

“꽝!”

“꽝!”

엄청난 폭음 소리와 함께 건물과 땅이 와르르 흔들렸다. 폭발의 여파로 백악관의 뜰과 건물 일부가 부서지면서 불이 붙었고, 놀란 시위대가 허둥대는 사이 또 다시 수십 개의 손가방이 백악관을 향해 투척되었다.

“꽝!”

폭음이 작렬하며 위태롭게 서 있던 나무 하나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넘어졌고, 넘어지던 나무는 담을 내리쳤다. 그 충격으로 담 한 쪽이 아르르 무너져 내렸다. 담이 무너지며 담벼락에 세워 놓은 차 위로 파편은 마구 떨어졌다.

놀란 경찰들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물대포와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고, 예기치 않은 사태에 당황한 시위대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흩어지는 시위대에 묻혀 폭탄을 던진 사내들과 함께 있던 여자들도 재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잘 하고 있어.”

시위대 틈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카엘은 만족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자기의 생각대로 잘 전개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먼지가 뽀얗게 이는 시위현장을 유령처럼 태연하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