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소설 <채식주의자>를 통해 본 폭력의 역사

in #kr7 years ago (edited)

안녕하세요, GoYou입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첫 포스트 자기과잉(Big Me)의 시대를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에 이은 두번째 [읽다] 입니다.

오늘 같이 읽을 책은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입니다. 이 소설은 한국 최초의 영국 맨부커상(Man Booker International Award) 수상작으로 유명세를 치뤘던 소설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의 평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소설이기도 한데요,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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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지은이) / 창비 / 2007년

채식주의자란?

[명사] 고기류를 피하고 주로 채소, 과일, 해초 따위의 식물성 음식 위주로 식생활을 하는 사람 (네이버 국어사전)

<채식주의자>를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채식주의자의 정의부터 찾아봤습니다. 문학 전공자로서 갖게 된 오랜 습관 중 하나. 바로 어떤 단어를 접하든 간에 사전적 정의부터 정리하는 것입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채식주의자는 '식물성 음식 위주로 식생활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채식주의자'란 제목을 택했고, 실제로 소설 속 주인공 영혜는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을까요? (아니, 적어도 그렇게 독자들의 눈에 보였을까요?)

스스로를 '-주의자(-ist)'라 정의하는 것


잠깐 책을 떠나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한때 제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말이 있습니다. 바로 스스로를 '-주의자(-ist)'로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육식주의자' 같은 싱거운 농담부터, '먹고사니스트' 같은 짠내 나는 자조에 이르기까지. '-주의자'의 세계는 넓고 깊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당시 저와 제 친구들은 그 순간의 정체성을 담아, 스스로를 '-주의자'로 정의내리고, 또 불리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우리들의 싱거운 장난과 달리 '-주의자'가 생각보다 무서운 단어란 사실을요.

내가 어떤 인간으로 정의되는 순간이 늘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가까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 사람은 참 부지런한 친구야' 같은 인물평 역시 특정한 틀에 한 사람을 규정 짓는 말입니다. 좀 더 깊게 들어가 볼까요? '이 사람은 친북좌파입니다' 단순한 정의 또는 사실처럼 말하지만, 그 문장이 사용되는 사회적 맥락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부정적인 평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종류의 정의 내리기는 필연적으로 나와 / 그 밖의 사람들로 보이지 않는 경계를 만들게 됩니다.

경계(border) 와 질서(order)


나를 제외한 타자를 특정한 틀에 맞춰 정의내리는 순간, 나와 타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한국처럼 사회적 동류 집단 압력이 거센 곳에서 나와 다른 사람간의 경계(border)는 곧 바로 잡아야 할 질서(order)가 되기 마련입니다.

내가 스스로 질서가 되는 순간, 나를 제외한 타자들에게 스스로가 부여한 질서를 알게 모르게 강요하는 일이 생기기 십상입니다. 이미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이 같은 장면은 끊임없이 목격한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치독일의 인종청소가 그랬습니다. 게르만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위대한 국가사업은 그 외 민족을 학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누군가에게 폭력의 역사는 곧 또 다른 누군가에게 질서의 역사였습니다. 그 질서의 역사는 바로 나와 다른 무언가: 곧 경계(border)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정상과 비정상, 비채식주의자와 채식주의자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소설 속 주인공인 영혜가 <채식주의자>란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총 3편의 연작소설을 끝까지 읽어보면, 영혜는 채식주의자라기 보다 일체의 먹는 행위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생태주의자처럼 보입니다)

제가 읽은 소설 <채식주의자>는 아래와 같은 틀을 갖습니다.

인간이 한 생명체로서 갖는 기본적인 '먹는' 행위를 '정상 / 비정상''비채식주의자 / 채식주의자' 로 대립시킵니다. 그 대립항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용인되는 정상과 그렇지 못한 비정상간의 폭력적인 경계짓기를 드러냅니다.

가령, 소설 속 영혜의 남편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버린 듯한' 아내를 원망합니다. 그녀를 원래대로, 아니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려고 합니다. 애초 그가 영혜를 단 한순간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제외하구요.

또 영혜의 가족들은 어떤가요? 영혜의 유년시절 완전한 분노와 공포의 추체험을 하게 만든 폭력적인 아버지의 모습. 또 그녀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용하려는 형부의 태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영혜 한 사람에게 가한 폭력의 원인은 그녀가 채식주의자여서가 아닐 겁니다. 그녀가 '우리와 다른 무언가'란 의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와 전혀 다른 누군가, 아니 무언가. 경계를 곧 질서가 되고, 질서는 곧 폭력이 됩니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내가 믿는 건 내 가슴 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책 <채식주의자> 중)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한때 평범했던 여자가 알 수 없는 꿈을 꾼 뒤, 먹는 행위의 변화에서 시작되어 결국에는 모든 관계를 파탄으로 맞이하는 일종의 수난극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이 빛나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내재된 일상적 폭력의 징후를 스스로를 식물로 여긴 - 종국에 식물인간과 다를 바 없게 되는 - 한 여자를 통해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이 출몰하는 빈도수가 부쩍 잦아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뒤에 꼭 따라붙는 '니가 내 편인지 아님 다른 편인지' 경계 짓기의 사고 과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비단 정치적 당파성뿐만 아니라,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회적 규범의 폭이 보다 넉넉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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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좋은글 잘읽고갑니당. 무언가의 정체성을 쉽게 단정할수록 그 사회의 다양성이 줄어드는것 같습니다. 마지막 말씀이 인상깊네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뉴비입니다 잘 부탁드릴게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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