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라잉 게임 (The Crying Game)’ ”
1990년대 초반은 변혁의 시대였다. 세계사의 거대한 파고에 소련 등 사회주의권은 몰락했으며, 한국사회에서도 비합법투쟁을 벌이던 정치조직들이 공개, 합법투쟁을 선언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젠 그간 거대담론에 갇혔던 환경, 여성, 성소수자 등 일상의 모순과 소소한 이야기들의 미시담론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닐 조던’ 감독의 <(The Crying Game, 1992>은 이런 시대성을 반영한 ‘기념비적 영화’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나는 시대의 질곡에 아픈 비주류들인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기에 이 영화 ‘역사영화’, 거대담론은 향한 ‘저항의 영화’로 감히 분류한다.
‘크라잉 게임’...
눈물은 단지 상처를 표현하는 방법일 뿐 아픔을 치료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울어도 사라진 것은 돌아오지 않는데 눈물은 왜 자꾸 나오는 것일까. 이미 ‘바보 같은 게임’에 말려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가 벌써 언제쯤일까. 1992년 아니면 93년. 엊그제 같다만 벌써 까마득히 먼 시절이다. 이 영화에서 그렇게도 여성스럽고 사랑스럽게 그려지는, 사람들이 감쪽같이 속았던 여주인공(?) ‘딜’이 남성 심볼을 드러내는 그 쇼킹한 장면은 극장에서는 삭제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혁명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했다. 분명 변화가 몰려오고 있었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때는 그저 흘러 가는대로 내 자신을 내 맡길 뿐, 그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우울을 만끽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에 도취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침잠의 그늘처럼 진득한 우울을 바꿀 수 있는 그런 영화가 아니었잖은가. 오히려 정체성의 카오스로 끌고 갔다.
영국의 지배하에 있는 북아일랜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던 그 악명 높은(?) IRA(아일랜드공화군)소속의 테러리스트와 ‘트랜스젠더’의 사랑이라니. 영화가 개봉되었을 무렵에는 트랜스젠더라는 말조차 생소한 시절이 아니던가. 다들 철저한 국외자(局外者)인 그저 변태성애환자로 치부했을 뿐이었다. IRA에 납치당한 시종 음울한 눈빛을 보내던 영국군 병사 ‘죠디’도 흑인이었다. 영국사회에서 흑인은 좀 처우가 다른가. 그를 납치한 IRA 테러리스트 ‘훠거스’는 또 어떻고. ‘난 우울한 사람’이라고 써놓은 듯한 침침하고 차가운 분위기에, 그것도 모자라 납치한 인질에 연민을 느끼며, 삶의 교감을 나누다니. 철의 규율과 정치적 신념이 지고의 가치인 테러조직에서 어디 적법한 일인가. 그러니 조직을 끝내 떠나 숨어버린다.
예전엔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오늘날 다시 본 훠거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이 자꾸 오버랩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하나하나 인물면면들이 온통 비주류들 투성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있을 수 없는 비주류들의 게임은 어차피 ‘Crying Game’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 영화는 애초부터 절망을 배태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여자주인공(?) 딜이 노래하는 ‘The Crying Game’은 또 어떤가. 결코 내 우울과 절망을 위로해줄 부드러운 곡들이 아니잖은가. 가라앉는 무거운 사운드. 눈물조차 흘릴 수 없을 것 같은 스산한 가을바람 속에 있는 슬픔.
그런데 이상하지. 영화에 빠져들수록 결코 우울하지도 절망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막다른 상황에 처해있는 그들의 영혼에서 오히려 슬픔 뒤에 찾아오는 소박한 햇살과 같은 희망의 포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바로 오늘을 위해 살기 때문일까.
“Live For Today !!!”...“Live For Today !!!”...“Live For Today !!!”...
어두운 방에 드리워진 두꺼운 커튼 앞으로 그녀가 다가간다. 나는 그녀의 움직임만을 겨우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녀가 커튼에 손을 대고 천천히 커튼을 열기 시작한다. 햇살이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한다.
“Live For Today !!!”
무려 세 가지 버전으로 잔잔하게 또 어떤 때는 애절하게 메아리치는 “Live For Today”가 진정 이 험난하고 고통의 ‘The Crying Game’에서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울고 있지 말라는 위안처럼 들리는 것은 지나친 착각일까. 아니면 크라잉게임에서 현명하게 이길 수 있는 힌트일까.
눈물은 단지 상처를 표현하는 방법일 뿐 아픔을 치료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울어도 사라진 것은 돌아오지 않지만 눈물을 흘린 후에야 “Live For Today”가 얼마나 소중한 위안인지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흑인병사 죠디는 테러리스트 훠거스에게 이런 조크를 던진다.
“인간은 두 가지야, 훠거스.
전갈과 개구리처럼.
그 얘기 아나?
전갈이 강을 건너고 싶지만 수영을 못해서
개구리를 찾아가서 부탁을 했어.
개구리는 전갈이 찌를지 모른다며 거절을 했지.
그러자 전갈이 말하길, ‘그럼 둘 다 빠져 죽어’ 그랬지.
그래서 안 찌른다고 했어.
생각하던 개구리는 전갈을 건네주기로 하고, 전갈을 등에 태웠어.
그런데 중간쯤 갔을때 물결이 거칠어지자,
겁이 난 전갈은 개구리를 찔러 버렸어.
결국 둘 다 죽게 되고만 거야.
그래서 개구리가 화가 나서 물었대.
뻔히 죽을 줄 알면서 왜 찔렀냐고.
개구리랑 같이 죽어 가면서 전갈이 대답했지.
‘나도 어쩔 수 없어. 이게 천성인걸.’...”
인간은 ‘타고난’대로 ‘천성’대로 살아 갈 뿐이다.
그 ‘천성’ 때문에 그 어떠한 억압도 받아선 안 된다.
그래서 “Crying Game”은 늘 다시 시작된다.
후일담이지만 여주인공 ‘딜 역’을 맡았던 실제는 남성배우 ‘제이 데이비슨’은 보수적인 칸영화제에서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여우주연상’ 후보까지 올랐다.
처음 들어본 영화인데 울림이 클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인상적인 느낌을 남겨준 영화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