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아 연재 1장 마무리 / 자연법과 섭리 / @jin90g / 만성피로
안녕하세요. @jin90g 입니다.
어쩌다보니 정치경제학 예기는 안하고 맨날 자연법이니 종교니 섭리니 이런 이야기를 하네요.
사실 모든 학문과 이론은 그 바닥에 딛고 선 기초 개념과 기초 원리가 중요하고.
그것들이 어떤 사실을 바탕으로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져있는지를 잘 분석할 수 있어야
좀더 쉽게 단순하게 이론을 서로 갖고 놀 수가 있어서
이렇게 지루한 작업을 정성들입니다.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 (특별편 포함하면 특별편이 마지막!!!)
이거 빨리 처리하고 우리의 핫한 이슈 정부주도의 경제와 자유로운 상거래에 대해서 논해보는 기회를 가져봅시다.
그럼 스타트!!!
우리는 앞서 바스티아의 자연법 공리를 설명했다. 세계에 각기 다른 실재들과 그것들 사이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저마다 생존·번영의 원리를, 인간은 사유 능력과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 자연 상태란 그런 능력을 잘 사용해 생육·번성하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이다.
우리고 우리는 바스티아와 루소의 자연법이 인간 이성과 추상적 사유능력의 유무로 갈린다는 것을 밝혔다. 루소는 인간의 언어능력과 추상적 사유라는 것이 인간 본성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얻어진 어떤 불순물이라고 봤고, 그래서 바스티아가 자연적 조직이라고 본 사회-교환 체계를, 루소는 인간 타락의 상태이자 서로가 서로를 약탈하기 위해 만든 노예제 자체라고 봤다.
이에 대비해서 바스티아의 자연법은 루소의 반대, 존 로크와 닮았고, 로스바드에 비하면 신에게 자연법의 위대함을 돌린다. 그런데 바로 이 신 드립, 당시 사람들이 능히 썼을 이 ‘신의 섭리’라는 말로 인해 현대 몇몇 학자들이 그를 비판하는 내용을 남겼다.
필자는 이를 비판해서 바스티아의 자연법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하고, 그 토대에 반석을 세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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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법과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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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beddu와 Masala는 바스티아가 가톨릭적 세계관을 정치경제학에 적용했다고 주장한다. 앞서 말했듯이 바스티아는 자연법 대신 신의 섭리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하며, 자연법에 대한 영광을 신에게 돌린다. Cubeddud와 Masala는 이러한 표현들을 근거로, 바스티아의 자연법을 신성한 계시를 통해 드러난 신의 계획으로 해석했다. 그들은 바스티아의 자연적 조화 개념을 점진적 발전을 통한 유토피아의 도래로, 종말론적 역사진행으로 해석한다. 인류의 발전방향이 숙명적으로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스티아의 자유개념을 신의 합리적 허용으로 해석했다.
만약 이들의 비판이 타당하다면, 바스티아의 경제적 조화이론은 신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한 집산주의(集産主義) 계획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바스티아는 자신이 루소를 비판한 방식 그대로 자신을 비판하게 된다. 결국 그도 “폭력 없이 끌어갈 수 있고 증명하지 않고도 설득할 수 있는 다른 범주의 권위”, 다시 말해 “하늘의 중재”에 호소하고 있는 꼴이니까.
(영화 [천사와 악마] 의 한 장면 / 글 내용과 상관없음)
하이에크 『노예의 길』 中 / “현대의 계획가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일계획에 따라 어떤 자원들이, 어떤 목적들에 봉사하기 위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쓰여야 하는지 ‘의식적으로 지시하는’, 즉 모든 경제활동이 통제되는 중앙지시체제이다.”
물론 바스티아가 가톨릭적 세계관을 적용했을 수도 있다. 실로 그는 교황의 주목을 받았던 열렬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다. 이론과 상관없이 바스티아를 변호하자면, 그는 프랑스 제2공화국의 정치가였다. 그는 풍자와 비유를 통해 사람들을 설득했다. 프랑스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가톨릭 신자였으며, 교육받은 엘리트부터 교육받지 못한 농민과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자유지선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Baugus는 바스티아가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기간에는 분명히 종교적 색채를 띠는 말을 평론에 사용했으며, 그 이유는 바스티아가 처한 시대적 상황이었다고 주장한다.
필자 또한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론적 측면에서도, 바스티아가 가톨릭적인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제적 조화』에서 가톨릭적 세계관에 상반되는 개념 사용을 쉽게 볼 수 있고, 또한 바스티아가 정치경제학과 종교 사이에 거리를 주려했던 노력 또한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종말론적 역사진행에 대한 반대 근거를 살펴보자. 만약 바스티아가 유토피아의 도래를 주장했다면, 그는 부(富)의 증대와 인류 발전이 정체할 거라는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종말론적 세계관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변화의 종료 시점을 함축한다. 유토피아의 도래를 변화의 종료 시점으로 가정한다면, 인류의 부(富)는 유토피아의 도래와 함께 더 이상 증가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증가분이 앞선 시대의 부족분을 그리고 불완전함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스티아는 인류 발전이 정체할 거라는 주장에 반대한다.
- 바스티아 『경제적 조화』 中 / “한 지역이나 한 시대의 행복이 다른 지역이나 다른 시대의 인내로 구매되는 것은 어째서 무한한 선과 정의의 설계 속에 들어왔는가? 경쟁이 하나의 신비로운 측면일 뿐인, 이 위대하고 부정할 수 없는 연대의 법칙, 그 아래 숨겨진 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인간의 학문은 그것을 모른다. 학문이 알고 있는 것은 선(goodness)이 계속해서 확대되고, 악이 끝없이 축소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발전의 임계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류 안에 존재하는 악이 끝없이 줄어들 수는 있어도, 결코 완전히 제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오류가능성을 내포한다. 용서하는 것이 신이면, 실수하는 것은 인간이다. 게다가 인간은 이성과 자유만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욕구와 정념 또한 갖고 태어난다. 인간은 실수할 수 있고, 착각할 수 있고, 격정에 휘말려 스스로 파멸로 향할 수도 있다.
더불어 다채로운 욕구는 언제나 인간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우리의 취향은 변덕스러워서 어떻게 변모할지 모른다.
- 바스티아 (같은책) / “한 시대에 희귀했던 음식도 다른 시대에선 흔한 것이 되고, 나폴리의 빈민들에게 만족스러운 정치체제는 네덜란드인들을 고문 속에다 내던질 것이다. 또한 이 욕구,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투박하고, 그리고 다라서 모두에게 가장 동일한 이 욕구 또한, 세대, 성별, 기질, 풍토, 그리고 습관에 따라 변화한다.”
여기서 자유가 섭리의 허락이라는 해석이 반박된다. 인간 사회는 결코 숙명적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고정된 방향성 또한 갖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는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말하지, 운명의 허락을 뜻하지 않는다.
마지막을 신의 집산주의 설계에 대한 반박 근거를 살펴보자. Cubeddu와 Massala는 신이 편애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신의 섭리를 근거로 하는 바스티아의 조화이론이 현실속의 불평등을 인정할 수 없을 거라고 주장했다. 물론 바스티아는 자연적 요소에서 인간의 능력에 이르기까지, 세계가 불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불평등한 세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신의 집산주의 설계라는 해석을 확실하게 반박하지는 못한다. 그것보다 우리는 신의 설계라는 해석이 ‘창조’를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신이 무슨 목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왜 세계를 창조했느냐를 문제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스티아는 비록 자연법을 신의 영광으로 돌릴지언정, 창조의 문제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는다.
- 바스티아 『경제적 조화』 / “욕구는 실재한다. 그건 사실이다. 욕구가 있는 것이 없는 것 보다 더 가치 있는지 아닌지 그리고 어재서 신께서 우리를 거기에다 예속했는지를 탐구하는 것은 어른답지 않을 것이다.”
바스티아가 자연법을 신의 영광으로 돌리며 우리에게 강조하는 점은 ‘신의 창조’가 아니라, 신의 창조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교한 법칙’이 자연에 ‘실재’한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나 보다 온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연법칙이 그냥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존재 이전에 대한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지 학문의 문제가 아니다.
(갈릴레오 갈리레이 / "아니, 그러니까 지동설 천동설하고 가톨릭 교리하고 아무 상관 없다고 하는데 그러시네, 님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 말 안 믿음? 그리고 이렇게 나올 꺼면 처음부터 지동설 연구에 후원금은 왜 줬음?")
따라서 철저한 학문적 태도를 문제 삼는다면, 비판받아야 할 사람은 바스티아가 아니라 Cubeddu와 Masala 이다. 그들은 창조를 끌어들여 바스티아를 비판하는데, 이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과학을 멸시할 거라는 편견에 근거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실로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과 종교의 조화 가능성을 시사한다. 근대물리학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진 갈릴레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여 지동설과 기독교 사이에 모순이 없음을 설명하려고 했다. / 현우식 「아우구스티누스의 수학 신학」 『한국조직신학논총』) 따라서 우리는 바스티아는 가톨릭 개념을 자신의 자연법 이론에 점목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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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jin90g 의 바스티아 연재 1부 / 자연법과 교환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장인 [교환 대 고립] 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번 주제는 학술계에서 언제나 핫 한 종교 VS 과학 구도였으니...
최근에 제가 초벌 번역해둔 바스티아의 미출판 유고
『경제적 조화 2』의 마지막 미완성 장
「정치경제학과 도덕, 입법, 종교」
초벌 번역을 다음 주 내로 다듬어서 올릴까 합니다.
너무 어려운 부분은 약간 의역으로 넘어갈 생각이고....
당시 공감대나 비유들이 있는데, 조금 오역 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요즘 비유나 아니면 게임 좋아하는 제 또래 비유를 좀 들어가면서
좀 급진적으로 옮겨올까 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초벌번역 올리기가 끝나면, 다음 당 [교환 대 고립]을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우리나라 대중들 사이에서 흔히들 논란을 빚고 있는
최대한 자유로운 시장경제와 정부 주도 경제의 대립이 다뤄질 것입니다.
엔터를 많이 쓰고싶으실 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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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적어보십시오 :D감사합니다. 표기법 때문에 스트레스를 참 많이 받았었는데..
아주 심오한 이야기네요..
시리즈로 올라오니 처음부터 정주행 해봐야 겠습니다^^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재 주기가 규칙적이지 않아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기대하시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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