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 국회에서 제헌 헌법이 만들어 진 후 이승만 정권 하에서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이 이어졌고, 4.19 이후 또 다시 두 차례의 개헌이 이뤄졌음을 살펴봤습니다. 그렇다면 다섯번 째 개헌은 과연 언제였을까요?
많은 분들이 쉽게 예상하셨겠지만 바로 5.16 쿠데타 이후에 이뤄집니다. 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통치에 나서면서, 국회를 해산합니다. 다음 해에, 국가재건최고위원회가 헌법개정특별심의위원회를 구성하고 개헌안을 마련하는데,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 중심제, 국회의 단원제,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 전략 등입니다. 경제성장과 개발을 하겠다는 명분으로 쿠데타 세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다시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형태로 돌아간 것이죠.
국회를 해산한 상황에서, 개헌은 국민투표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이 5차 개헌안의 특징 중 하나는 전문에 3.1 운동, 4.19 혁명과 더불어 '5.16 혁명'이 들어갔다는 점입니다-_-; 또 재미있는 특징이 있다면, 헌법에서 국회의원 후보의 자격을 "소속정당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해 놓았기 때문에 무소속인 사람은 국회의원 후보가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임기 중 당적을 이탈하거나 변경한 때, 소속 정당이 해산될 때 의원 자격이 상실"된다는 내용이 헌법에 있어서, 국회의원이 자유롭게 당적을 바꾸기도 어렵게 해놨죠. 좋게 말하자면 정당정치를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고, 그 의도를 따지자면 의원들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방식으로 개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이미 대권을 노리고 있었던 김종필(a.k.a JP)과 양보할 마음은 한 치도 없었던 박정희
7년 후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6차 개헌에 나섭니다. 이른바 '삼선개헌'입니다. 이미 두 차례 선거를 거쳐 연임 대통령을 하고 있던 박정희는 노골적으로 장기 집권의 야욕을 드러냅니다. 박정희의 측근이었던 김종필이 차기 대권을 노리면서 삼선개헌에 반대했다가, 박정희에게 철퇴를 얻어 맞았던 것 역시 유명한 일화죠.
박정희가 개헌에 나서자, 야당과 재야 인사,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납니다. 이승만을 겪어봤으니까요. 반대 운동이 강하게 일어나자 박정희는 승부수를 던지는데, "개헌 문제를 통해 나와 이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입니다. 한마디로, 개헌 반대하면 난 그만 둬버리겠다는 협박이며, 삼선개헌에 반대하는건 박정희에 대한 반대라고 프레임을 짠 것입니다. 마치 과거 이승만이 "대통령제 안하면 은퇴해버린다!" 고 했던 그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삼선 개헌은 새벽 2시 30분에 개헌 찬성파 의원들을 국회에 모아놓고 야밤 날치기로 처리해버리는데요, 날치기 개헌안에 항의하는 시위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크게 벌어지지만, 박정희 정권은 38개 대학에 휴교령을 내려버리면서 이를 봉쇄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은 국민투표에서 67.5%의 찬성으로 통과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1971년 세번째 대통령 선거에 나선 박정희... 그 상대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야당인 신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는 이변을 일으킨 김대중이었습니다. 대선 과정에서 김대중은 "이번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가 시행될 것"이라며, 미래에 있을 10월 유신을 예견하기도 했습니다.
71년 대선은 중앙정보부의 조직적 부정선거가 아니었으면 김대중이 당선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을 정도로 아슬아슬했습니다. 김대중은 불과 8퍼센트 차이로 대선에서 패배합니다.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이듬 해인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합니다. 이른바 '유신 헌법', 헌법의 일곱번째 개정이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활동을 중지시키고, 헌법의 효력마저 정지시킨 후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헌법을 의결합니다. 비상계엄령이 내린 삼엄한 상황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투표율 91.9퍼센트, 찬성률 91.5%의 압도적인 결과로 유신 헌법을 통과시키죠. 당연히 그 과정에서 별별 부정 투표가 다 이뤄졌는데, 전국민에게 투표 참여를 강권했을 뿐더러 서울의 한 투표소에서는 선거관리위원이 투표 전에 무더기 찬성표를 발견해 위에 보고했더니, 도리어 사직 압력을 받고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당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 유신 헌법의 초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김기춘'이 등장하는데요, 당시 젊은 검사였던 김기춘은 유럽 등지에서 '강력한 대통령 국가긴급권'과 관련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유신헌법 초안을 마련하는 과정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박정희와 그때 그 김기춘.... 그리고 박근혜...
그야말로 총통제를 방불케 하는 유신 헌법 치하에서 따로 개헌 이야기가 나올 일은 없었겠죠.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12.12 쿠데타와 5.17 비상계엄으로 신군부가 득세하면서야 다시 개헌이 이뤄집니다. 대통령 7년 단임제, 그리고 대통령 간접 선거를 골자로 하는 개헌이 이뤄지고,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신군부의 시대가 열립니다. JP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종필은 5.17 비상계엄 이후 내란 혐의로 보안사로 끌려갔는데, 끌려가면서 5.16 때 내가 했던 수법 그대로 당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