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보산 사건과 화교 학살사건 ”

in #kr6 years ago

37271729_1481968435242902_136717360311566336_n.jpg

나는 역사가의 현실참여를 매우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아카데믹한 역사연구자들의 사회현실의 제반문제에 대한 발언은 매우 드문 편이거나, 비주류가 주류에 대한 도전으로 정치권력과의 결탁이 고작이다. 그래서 역사가라는 타이틀로 ‘모 선생’의 발언은 신선했다. 그러나 가끔은 그분의 자유주의적인 한계를 노정하는 것에 안타깝다.

가령 그 분의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의를 ‘자영업자 대 알바’의 대립 문제로 몰아가려는 ‘사상 공작이다’ ”라는 주장은 엄밀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타당한 측면이 분명 있다. 그러나 난데없이 그 갈등을 1931년 조선인과 중국인이 대립한 만주에서의 ‘만보산 사건’과 조선에서의 ‘화교학살사건’에 비유하는 것은 억측이자 비약이다. 김동인의 ‘붉은 산’에 연유하여 1931년 만주에서의 ‘만보산 사건’이 조선에서의 ‘화교학살사건’을 연속되는 과정으로 평가하며 일제 지배 권력이 통치전략에 따라 조선인과 중국인간의 갈등과 대립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승전-일제라는 논리는 참 뿌리 깊은 사고임에도 이미 시한부 인생을 다한 ‘역사적인 태도’가 아니다.

첫째, 만보산 사건의 만주라는 공간과 화교학살 사건의 조선이라는 공간은 차별적이다. 이것은 일제의 지배전략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만보산 사건의 배경과 화교학살사건의 배경은 전혀 다르다. 특히 만주를 중심으로 한 각 민족의 이해관계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요소가 있다. 그걸 조선에 단순 대입하는 건 곤란하다.

둘째, 만보산 사건에 대한 당시 국내언론 특히, 조선일보의 오보문제다. 만보산 사건은 사건이라고 하기에는 큰 충돌 없이 마무리됐다. 그러나 조선일보 장춘 지국장 ‘김이삼’이라는 자가 조선의 중국 경찰이 조선농민을 살상했다고 급전을 때리고 오보하는 바람에 조선에서 화교박해 폭동이 대규모로 일어났다. 국제연맹이 조사한 '리튼(Lytton)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평양과 인천 등지에서 反중국 폭동으로 화교 127명 학살되고, 393명이 부상당했으며, 재산피해액이 250만원 달했다고 한다.

문제는 김이삼이 일제의 사주를 받았다는 주장이고 모 선생님도 ‘확인된 사실’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김이삼이 일제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아직까지 반론들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김이삼은 곧 처형되었는데 누구에 죽임을 당했는지도 논란이 있다.

셋째, 별 문제없이 끝난 만보산 사건이 왜 조선에서는 화교학살과 배척운동으로 나타났는지 당시 조선의 정세와 관련하여 살펴볼 문제라는 것이다. 가령 오보를 낸 ‘조선일보’는 당시 ‘비타협민족주의’들이 주도하였고, 이를 뒤따라 오보를 낸 ‘동아일보’는 민족개량주의 계열이었다.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으로 출범했던 ‘신간회’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대립 속에 만보산 사건과 화교 학살사건이 발생한 1931년 7월 직전인 1931년 5월 해소를 결정했다. 다시 말해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치열한 노선투쟁이 벌어졌다는 점이며 ‘민족주의’를 극대화하는 방향에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오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제시기에 모든 책임 근본적으로 일제에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통치라는 건 단지 통치전략이 이러했지만 통치의 대상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하느냐의 ‘총체성’속에서 미세한 부분까지 추적해야할 문제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듯 일방적인 일제 지배 권력의 일방적인 통치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일제통치 전 시기에 걸쳐 동북아 시공간의 각각의 변별과 분석이 요구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모 선생의 주장은 오늘날 현실의 문제를 과거의 문제와 단순 대입하는 우를 범했다는 생각이다. 또한 ‘사실’이라고 확정해버렸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도 사실이 곧 진실이 아니며 사실의 배후에는 다양한 담론들이 숨겨져 있다. 역사가의 사회현실의 제반문제에 대한 발언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발언에는 그 전제로 하나로 줄 세울 수 없는 다양한 관계와 삶이 내포되어있음을 드러내고 그것을 인식 못하는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가의 임무다. 즉 확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질문과 고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모 선생의 발언은 아쉽다.

1931년 조선인의 화교에 대한 학살과 폭동으로 파괴된 평양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