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정치·사람 성명서 ] 결과의 불평등을 제어할 연대와 책임의 윤리를 -- 조국 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

in #kr5 years ago (edited)
  1. 조국을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조국 사태의 한 국면이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번 조국 사태는 너무나 많은 쟁점과 문제점들을 남겨놓았으며, 그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조국 사태는 이제야말로 시작이다. 쟁점이 워낙 여러 층위에 걸쳐있기에, 각 층위마다 숱한 논의가 있어야 할 사안들이지만 층위 각각을 구분하면서도 전체적인 조망을 해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에 우리를 각 층위별 사안들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함께, 각 사안을 관통하는 지점에 대한 우리의 입장 또한 밝히고자 한다.

  2. 일단 개인적 층위에서는, 현재 검찰의 수사에 무슨 배후의 의도가 있건 수사 그 자체는 어떠한 외압도 없이 독립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 결과 법적인 책임을 질 사람이 있으면 법적 절차에 따라 책임지면 될 일이다. 다만 그것이 조 법무장관 본인의 책임이 아닌 한 연좌제는 타당하지 않다. 잘못이 있더라도 가족의 잘못은 가족의 잘못일 뿐이며, 적어도 형사 절차에 관한 한 연좌제에 근거한 책임 추궁은 옳지 않다. 또한 단지 조 법무장관만이 아니라 그간 각종 의혹이 제기되어 온 여야 국회의원 등 모든 고위 공직자에 대해서도 해당 의혹을 철저히 조사할 것을 촉구한다.

  3. 본인의 책임이 아닌 한 조 법무장관은 법무장관으로서의 소임 특히 그간 그렇게 강조해온 검찰개혁 등을 어떠한 타협도 없이 완수해야 할 것이다. 공수처 설치만이 아니라, 검찰의 특수수사권을 제한하고 (가령 특수수사 그 자체는 경찰에 넘기고 검찰은 수사지휘만 하는 방식 등), 검찰고위직에 대한 외부 개방 등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또한 법무장관의 업무가 검찰업무만 있는 것이 아닌 만큼, 비검찰업무 영역에서 보다 전향적인 법무행정이 이루어지기를 요구한다. 특히 군대내 성소수자 문제나 미성년자 의제강간 문제 등의 사안에서 조 법무장관이 보여준 모습은 진보적 인권 및 성평등의 가치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이는 만큼 이에 대해 보다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줄 것을 촉구한다.

  4. 이제 좀 더 본질적인 층위를 이야기해보자.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개인적 층위의 문제, 검찰개혁 등 이른바 민주개혁의 문제는 이번 사태의 본질이 아니다. 사태의 본질은 한국 사회의 불공정 및 불평등 구조와 그 구조의 혜택을 입어온 기득권자들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특히 그간 진보와 정의를 독점한 듯이 주장해 왔던 인물 내지는 세대의 위선적 모습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더욱 참담한 일이다.

  5. 많은 한계가 있을지라도 일단은 입시의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다. 실상은 별로 그렇지 않지만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입시는 계층상승 내지는 신분유지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기에 입시에서의 불공정은 특히나 계층상승 내지 신분유지의 욕망이 강한 이들에게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이 문제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 이를 방관할 수는 없다. 학종의 공정성을 높이는 방안이 필요하다. 가령 여전히 부모의 인맥 등 외부 조건이 크게 작용하는 봉사활동 기록 등은 폐지되어야 한다. 특목고나 자사고 등 그 자체로 특권적인 네트워크로 작용하는 학교들은 폐지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애초에 조건 그 자체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불이익을 완화하기 위한 역차별로서의 지역별, 계층별 할당제가 대폭 강화되어야 한다.

  6. 그러나 입시제도 개선은 문제의 표면일 뿐이다. 입시가 그렇게 중요해진 이유는 결국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이후 결과에서의 격차를 크게 좌우하는 현재의 학벌체제 때문이다. 대학서열화와 학벌체제 자체를 타파해야 한다. 국공립대 통합학위제도 도입, 공영형 사립대 도입 등 대학서열화를 대폭 완화시킬 고등교육 개혁이 필요하다. 학력차별금지법 등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여전히 대학 자체를 가지 못하거나 가봐야 의미없는 이들에 대해 바닥 그 자체를 높이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고 어떤 의미에선 훨씬 더 중요하다. 특성화고에 대해 학비만이 아니라 생활비까지 지원하고 직업훈련의 질을 대폭 높이는 것,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직장에서 일하다가 필요할 경우 대학을 진학할 수 있게 하는 고급직업훈련 위주의 평생교육체제의 강화 등이 보다 강력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7. 하지만 학벌체제 타파조차도 문제의 진정한 본질은 아니다. 대학서열화와 학벌체제가 완화되면 이제 의사나 법조인 등 전문직이나 공무원 및 대기업 취업 등 상위서열 직업을 갖기 위한 전쟁으로 그 장소가 옮겨질 것이다. 전문직 자격증을 따거나 좋은 일자리에 취업하는 등 직업의 출발을 어디서 하는가에 따라 평생소득 등 결과의 격차가 너무나 큰 현재의 한국 사회체제가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다. 결과의 불평등과 직결된 노동의 불평등이 문제의 본질이며 이를 완화시키지 않는 한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다. 계층상승이나 신분유지의 사다리만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계급간 불평등 그 자체를 문제삼아야 하지 않는가.

  8. 노동의 불평등을 완화시키기 위한 대책들이 가장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층위가 있다. 전문직 등 상위엘리트층의 지나친 특권을 제어하는 것과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등 중하위계층 및 노인 등 빈곤층의 참담한 현실을 개선함으로써 바닥을 높이는 것 둘 모두가 필요하다. 의사나 법조인 등 전문직의 문호를 대폭 넓혀야 한다. 1프로의 엘리트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모두가 거기 진입하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1프로를 2,3프로로 만드는 것이 낫다. 또한 그 2,3프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1,20프로를 차지하는 경제적 수혜층들은 자신의 혜택을 그 아래 계층과 나누어야 한다. 공무원이나 공기업, 대기업 종사자 등 상층노동시장 참가자들에게 더 유리한 연공급이나 사회보험제도를 개혁하고 조세 기반 복지제도로 전환해야 하며 이를 위해 중산층까지의 증세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확보된 재원의 대부분은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및 노인 등 중하위계층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쓰여야 한다. 대기업이나 공무원, 공기업 등의 지대수탈적 행위를 근절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누군가가 많이 가졌다면 그 상당수는 사실은 함께 노동해 온 타인의 몫을 가져간 것이다. 설사 그게 합법이라고 해도 혜택을 입은 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가 조국에게 가장 분노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 아니던가.

  9. 이 모든 층위의 문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만 일정하게 구분해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진행과정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여러 층위의 문제들이 서로 뒤섞이면서, 각자는 진영논리에 따라 각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다른 층위의 문제들을 끌어왔다. 사회개혁을 이야기하면 검찰개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방어하고, 공정성을 따지려고 하면 학벌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면서 방어하고, 세대 간의 기득권 구조를 공격하면 세대 내의 계급을 핑계로 방어하는 식이다. 물론 워낙 다양한 층위의 문제들이 제기되었기에 다들 자기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할 말 많은 이들이 지금 방어를 위해 가져다 쓴 다른 층위의 문제들에 평소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가라는 것이다. 다들 자신보다 위쪽만 욕하면서 자기와 비슷한 계층이 지닌 문제들에는 관대했고 아래쪽의 문제에는 무관심했던 것 아니었던가. 1프로 엘리트층은 0.1프로 최고권력기관의 문제해결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1프로 내의 관행에는 둔감했고 10프로의 공정성에 대한 분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며 하위 80프로에 대해선 아예 관심도 없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이제 와서 80프로를 이야기하면서 10프로를 공격한다는 건 우스운 일 아닌가. 물론 이는 선을 넘은 검찰이나 야당 국회의원 및 보수언론 등도 당연히 마찬가지이고, 하위 80프로에 무관심한 10프로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들 자기 입장에서 하고 싶은 말만 강변하고 있을 뿐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조차 없다.

  10. 결국 이번 사태에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것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는 각자도생에 기반한 개인의 입장과 진영논리만 있을 뿐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가 없다는 사실이다.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선이 무엇인지 그 자체가 합의되지 않았기에 모두들 선을 넘나들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내세운다. 우리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위쪽과 자기 주변만 바라보면서 자신보다 아래쪽의 문제에 무관심한 사회는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보다 아래쪽에 대한 사회적 연대와 그에 따른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결과 즉 노동의 불평등이라는 문제의 진정한 본질을 해결할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다.

  11. 결과의 불평등을 제어할 연대와 책임의 윤리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인 것’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진정한 계급도 형성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사회와 계급의 힘으로 기득권과 자본의 폭주를 제어할 때만이 기후위기 등 우리에게 다가올 더 큰 문제 또한 해결해 나갈 수 있다. ‘사회적인 것’을 만들어내고 진정한 계급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조 법무장관조차 인정한 사회주의의 실질적인 기반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 함께 하면서 최종적으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 노동·정치·사람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1. 9

노동·정치·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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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