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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자전거 여행 #01 : 울산에서 서울까지 518.75km 포토 에세이(Bicycle Travel Photo Essay)
초보 여행자였던 저는 책을 넣고 다니던 가방을 메고 출발했습니다. 정말 불편했습니다. 준비없이 서둘러 출발한 탓에 짐은 계속 늘어만 갔고, 책가방만으로는 늘어나는 짐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육군3사관학교 앞에서 군용마트를 발견했습니다. 초보 여행자의 고민은 단돈 4만원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수납공간, 내구성, 착용감, 디자인(?)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따금씩 군인이냐고 물어보는 것이 흠이기는 합니다만) 단언컨대 최고의 여행용 배낭입니다.
2009년 4대강 사업이 시행되면서 낙동강, 섬진강, 한강 등 큰 강들을 따라 1,800km에 달하는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개통되었습니다. 울산에서 대구까지는 주로 위험한 국도를 이용했습니다만, 대구부터는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자전거길을 이용할 수 있어 훨씬 안전하게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여권처럼 생긴 인증수첩에다 주요지점의 스탬프를 모두 찍으면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인증서와 인증메달을 발급해줍니다. 인증수첩은 자전거길 곳곳에 위치한 인증센터에서 4,000원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국토종주 인증서를 받아볼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기념으로 인증수첩을 구매했습니다. 인증센터에 도착할 때마다 스탬프를 하나씩 찍어보니 그래도 뿌듯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아본 이후로는 칭찬도장을 받아본 일이 없는데, 마치 자신에게 찍어주는 칭찬도장 같았습니다.
상주로 향하는 자전거 길은 유독 험했습니다. 강을 잘 따라가다가 어느새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산만 보면 신물이 날 지경입니다. 땅만 보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걷다 보니 뜬금없이 조각공원 하나가 등장했습니다. 아니 왜 이런 산 속에 조각공원이? 대낮이었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조각공원에서 홀로 조각들을 감상하다보니 어느덧 '전설의 고향'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습니다.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만 같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조각공원을 빠져나왔습니다.
여행길에 잠시 모교에 들렀습니다. 수능을 치른 3학년들이 떠난 빈 교실입니다. 예전에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며 잊고 지냈던 기억을 실컷 떠올려 봅니다. 꿈, 열정, 사랑, 두려움, 불안함이 모두 그곳에 있었습니다. 소년은 참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그 소년이 저를 바라보며 묻습니다. "아직, 그대로지?"
저는 기타동아리에서 활동했습니다. 샤워실이었던 곳을 고쳐서 만든 동아리방입니다. 문을 열자 익숙했던 냄새가 코끝을 스칩니다. 기타동아리는 매년 축제 때 공연을 했습니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마지막 공연 연습을 소홀히 했던 것이 아직도 후회스럽습니다. 실수투성이였지요. 멋진 모습으로 마무리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무슨 일을 하든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결과가 어찌 됐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구미에서 상주로 향하는 길입니다. 지금껏 달려온 길이 모두 그랬듯, 길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제시간에 도착은 할 수 있는 건지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들지만, 한 발 한 발 묵묵히 페달을 밟다보면 어느새 목적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라고 하더라도 주어진 오늘 하루를 충실히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간절히 원하던 것들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전거 여행은 삶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선물합니다. 길은 곧 삶입니다.
문경새재를 눈앞에 두고 잠시 간이역에 들러 숨을 고릅니다. 문경 불정역은 석탄 수송을 위해 1954년 개통된 역입니다. 석탄 산업이 쇠락하면서 1993년 문을 닫았습니다. 강가의 돌을 외벽으로 쌓아올린 것이 특이합니다. 낮에도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산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간이역은 참 쓸쓸해 보입니다.
한때 광부들과 석탄을 바삐 실어날랐을 철길에는 펜션으로 개조된 열차만이 정지해있습니다. 내부를 보고 싶었지만 문이 굳게 잠겨있었습니다. 주변 경관이 워낙 빼어나 여름 휴가철이면 이곳을 찾는 피서객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국토 종주 자전거길 중 최악의 코스인 새재 자전거길입니다. 이름만 자전거길입니다. 이 길을 자전거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제 손에 장을 지지고 엉덩이로 이름을 쓰겠습니다. 조령산을 뱅글뱅글 돌면서 끝도 없는 등산로가 이어집니다. 자전거를 산 아래로 던져버리고 싶었습니다. 비교적 추운 날씨였음에도 땀으로 온몸을 적셨습니다. 아래 보이는 길은 문경시에서 충주시로 향하는 고속도로입니다.
지옥의 등산로를 오르니 드디어 이화령 터널이 눈앞에 보입니다. 이화령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가 되는 고개입니다. 한때 산세가 험한 문경새재를 우회하는 이 길을 통행하는 차량이 많았지만,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지금은 이 길을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 눈에는 이화령 터널이 천국으로 향하는 관문처럼 보였습니다. 터널 저편에는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산 중턱부터 비상식량이 모두 떨어졌지만, 이화령 휴게소 표지판만 바라보며 힘을 냈습니다. '휴게소에 가면 무얼 먹을까. 떡볶이? 순대? 튀김? 핫바? 감자? 옳거니, 떡튀순이 좋겠구나. 뜨끈한 커피도 한잔 해야지.' 죽을 맛이었지만, 휴게소 표지판에 표시된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절로 콧노래가 나왔습니다.
이화령 터널을 건너 휴게소를 발견하고서 정말로 두 팔을 뻗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냉큼 휴게소로 달려가니 불은 꺼져있고 문은 자물쇠로 잠겨있었습니다. 자판기도 하나 없었습니다. '이런 ㅆ.....'
불 꺼진 휴게소를 바라보며 허탈했던 마음은 휴게소 앞에 펼쳐진 거짓말 같은 풍경에 모두 녹아내렸습니다. 소설에서나 들어봤음직 한 '백두대간'의 위용을 직접 눈으로 보니 그 감동은 사진이나 글로는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괜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서둘러 산을 떠나야 했던 것이 참 아쉽습니다. 꼭 다시 와보고 싶은 곳입니다. 그때는 휴게소 문이 열려있기를.
문경새재를 건너, 신립 장군의 혼이 잠들어있는 탄금대를 지나, 어느덧 충주시에서 시작하는 한강 자전거길에 도착했습니다. 또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펼쳐졌지만, 더는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습니다. 조금씩 내딛는 한 발 한 발의 위대한 힘을 믿게 되었으니까요.
아, 한강! 우연히 길에서 옛 동창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서울이로구나! ...는 개뿔. 한강이 '남한강과 북한강을 포함하는 총 길이 514km의 국가 1급 하천'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잠시 방심했습니다. 남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자전거길은 총 132km로, 여주시, 양평군을 거쳐 팔당대교로 이어집니다. 중간에 여주시에서 또 하룻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남한강으로 이어지는 자전거 길은 '평화' 그 자체였습니다. 저녁 어스름, 살짝 안개 낀 남한강 변은 지친 여행자를 포근하게 품어줍니다. 한 폭의 수채화 속에 들어가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페달을 밟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다 올라왔어. 한눈에 들어온 나의 도시가 아름답구나. 방금 전까지 날 괴롭히던 그 미로 같던 두통 같던 그곳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저기 어디쯤인가 아직 거기 살고 있니. 모두들 안녕히 잘 계신지. 이렇게 넓은 세상에 우리 만난 건 그것만으로도 소중해. 여기서 보니 내가 겪은 일, 아주 조그만 일일 뿐이야. 수많은 불빛 그 속에 모두 사랑하고, 미워하고, 실망하고. 그 중에 내 것도 하나"
윤종신 11집 <동네 한 바퀴> 수록곡 '야경' 中
한강 변을 달리다 미칠 듯이 아름다운 야경을 보고 잠시 자전거를 세웠습니다. 홀로 벤치에 앉아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니 괜스레 코끝이 시큰했습니다. '정말 해냈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함께 벤치에 앉아 맥주 한잔 했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7일간의 자전거 여행은 끝났습니다.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똥자전거로 이곳저곳을 다니느라 죽도록 고생했지만, 어린 시절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서 마음대로 동네 여기저기를 쏘다니던 때처럼 즐거웠습니다. 다시 소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새로운 위시리스트도 생겼습니다. 바로, '유럽 자전거 일주'. 유럽은 산지가 적고, 자전거 도로가 잘 갖춰져 있어서 국토 종주보다는 수월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닥친 일들을 모두 해결하고 나면 꼭 도전해보고싶습니다. 그때는 실시간으로 스팀잇에 여행기를 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참, 7일간 함께 했던 자전거는 얼마 전에 도둑맞았습니다. 건물 CCTV로 용의자의 인상착의까지 확인했는데, 워낙 '똥자전거'다 보니 (중고나라에서 같은 제품을 5만원에 팔더군요) 동네 파출소에서 찾는 시늉만 하고 더는 연락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다음 유럽 일주 때 새로 사야 할 것 같습니다.
허접하고도 기나긴 첫 여행기를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모두 평안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와 철자전거로 저 길을 ..! 동고동락을 함께한 자전거를 훔쳐간 녀석은 벌 받을겁니다
자전거 훔쳐가신 분은 사고 나실듯 합니다.
CCTV로 보니 멀끔하게 생긴 청년이던데. 도둑맞고 나니 한동안 동네에 있는 자전거들이 다 제 것처럼 보이더라구요 흑흑. 잘 관리못한 제 탓이지요.
헉. 대단하십니다! 멋지십니다~
감사합니다!^^
자전거를 도둑맞다니, 전우를 잃어버린 기분이시겠어요.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나중에 유럽 자전거 일주도 응원하겠습니다. 그때는 멋진 자전거에 스티밋 깃발 꽂고 다니셔도 좋을 듯. ^^
오 정말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유럽 자전거 일주를 하게 되면 꼭 스팀잇 깃발 준비해서 가겠습니다^^
사진 필터가 브라운계통인가 보네요.
4만원짜리 배낭은 그렇다 치고, 5만원짜리 자전거로 다니셨다니 놀랍습니다. ㅎㅎ
저도 언젠간 자전거 타고 며칠간 여행해보는게 소원입니다.
충주까지 2박3일 정도로 다녀오시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한번 도전해보세요!
문경새재쪽 힘드셨을텐데 제가 동네 근처가 고향이라 잘알죠. 자동차도 빡세게 올라가는 길인데 예전길은 ㅎ ㅎ 자전거 도난은 아쉽네요
문경새재 쪽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경사가 얼마나 가파른지 내려올 때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감당이 안되더라구요. 이제 자동차들은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많이 이용하는 것 같아요. 이화령 고갯길은 드라이브하기에 제격인 것 같습니다.
Well done post thanks for sharing
th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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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울산에서 서울까지 ㅎㅎ 정말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예전에 목포까지 갔다가 제주도를 돌고 온 적이 있는데, 앞으로 또 언제 해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ㅎㅎ
오 저도 스물하나 때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서 자전거 일주를 했었습니다. 제주도도 많이 변했을텐데 또 가보고싶네요.. 살다보면 또 기회가 있겠지요^^
책 한권 보는 기분이네요~
와... 스팀잇 하면서 가장 좋은점은 다양한 삶을 볼 수 있다는겁니다..
여행이 주는 즐거움을 이 글을 보면서 제대로 느끼고 가네요~
저도 한번쯤은 꿈꿨던 자전거 여행... 현실은 꿈으로만..남았지만 말이죠 ㅎㅎ 이곳와서 제대로 힐링하고 갑니다^^ 팔로.보팅 안할수가 없네요^^
자주 놀러올게요~ 다음 여행도 기대가 됩니다
놀러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꿈들을 한번 적어보세요. 언젠가는 정말 하게 되더라구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와 정말 대단하세요 끝없는 길을 찍으신 사진을 보니 왜 이리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드는걸까요 한강을 보고 안도하셨을 로맨스님과 거기가 또다른 시작이었다니 허무한 웃음이 났어요 정말 재미난 책한권을 본듯한 느낌입니다~ 유럽여행기도 빨리 꿈을 이루시기를 바래볼게요~ :)
특급칭찬 감사합니다!^^ 유럽여행기를 스팀잇에
올릴 수 있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네요~!
우와... 한발한발의 위대한 힘... 감동적이에요ㅠ ㅠ
등장인물 하나없는 고즈넉한 풍경들을 보고있자니 괜히 제 마음이 다 울큰하고 다리가 뻐근해지는것같아요ㅎㅎㅎ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