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진의 워드비트] 동정심과 죄의식 | 정태춘·박은옥 - 서울역 이씨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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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비트(wordbeat)는 노랫말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비정기 업데이트.


대학에 가서야 정태춘·박은옥과 김민기의 음악을 들었다. 1994년이었다. 돌아보면 빠른 것도, 늦은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그때는 죄책감 같은 걸 느꼈다. 이런 노래를 여태까지 몰랐다니. 그러니까, 이상한 죄책감이었다. 하여 선배들이 애늙은이라 놀려도 그 노래들을 듣고 또 들었다.

2학기가 막 시작되었던, 따뜻한 햇살 틈 바람이 바늘 같던 9월의 어느날 교정에서 김민기의 “봉우리”를, 정태춘 박은옥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듣다 왈칵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쓸데없이 예민하고 하릴없이 서글펐던, 아니 그냥 그럴만한 나이였을 것이다. 덕분에 그들 목소리는 아마도 내가 보낸 가장 심심하고 난처했던 시절의 배경음악이었다.

요즘 나는 정태춘과 박은옥의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듣는다. 10년 만의 새 앨범이다. 특히 앨범의 첫 곡 “서울역 이씨”를 듣고 또 들었다. 무관한 생각들이 개연성도 없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심난한 가운데 반가웠고 복잡하면서도 고마웠다. 이 노래는 2006년 서울역 노숙자 추모제를 위해 만든 곡이다. 노래 중간에 “저 고속전철을 타고 천국으로 떠나간다 / 바코드도 없는 몸뚱이를 거기에다 두고”란 가사가 툭 튀어나와 목덜미를 잡아채고선 바닥으로 확 고꾸라진다. 직설이다.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부른다.

서울역 신관 유리 건물 아래
바람 메마른데
그 계단 아래 차가운 돌 벤치 위
종일 뒤척이다
저 고속 전철을 타고 천국으로 떠나간다
이름도 없는 몸뚱이를 거기에다 두고
예약도 티켓도 한 장 없이 떠날 수 있구나
마지막 객차 빈자리에 깊이 파묻혀
어느 봄날 누군가의 빗자루에 쓸려
소문도 없이 사라져 주듯이

동정심은 윤리로, 죄의식은 정치로 가서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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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누군가는 동정심을 자극받아 하염없이 슬플지 모른다. 마침 정태춘의 목소리도, 창법도, 멜로디도 구슬프다. 그러나 이 노래를 동정심을 자극하는 만가(輓歌)로 치환하는 건 아무래도 부적절하다. 특히 그것이 구별 짓기의 태도란 점에서, 요컨대 안전한 감각이란 점에서 그렇다. 우리는 불쌍하거나 소외당한 자들을 위해 가끔 지갑을 열지만 그들이 내 권리를, 시민의 권리를 나누길 요구할 때에도 기꺼이 그럴 수 있으리라 장담하긴 어렵다. 그러나 죄책감은, 이 무겁게 절그럭거리는 구속은 영혼의 자유를 위해 뭔가 결심하기를 요구한다. 요컨대 동정심이 가까스로 가 닿는 건 윤리학이겠지만 죄의식은 마침내 정치학에 머문다.

정태춘은 이 노래에 “지난 10년간 세상의 명랑함이 불편했던 마음을 담았다”라고 했다. “바닥까지 절망하지 않고는 세상을 잘 이해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첫 곡으로 넣었다.”고도했다. 앨범의 마지막은 새로 녹음한 “92년 장마, 종로에서”다. 여기엔 현장 활동가들, 불의에 맞서고 생존을 위해 싸우는 자들에 대한 부채감을 약간이나마 덜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이 부채의식은 죄의식이다. 노무현 정신, 김대중 정신, 진보정당이나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나꼼수니 뭐 그런 거시기한 거시기가 아니라, 온갖 말도 안 되는 현장에서 죽도록 개고생하는 활동가들에 대한 죄책감이다. 그래서 얼핏 촌스러운 이 노래의 무게가 새삼스럽다. 멀쩡하고 화려한 ‘메가시티’ 서울 한 복판에서 사람이 죽어나갔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중산층의 윤리가 아닌 정치다. 저 사람과 내가 마침내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각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죄의식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감각이기도 하다. 이 노래에 ‘심난한 가운데 반가웠고 복잡하면서도 고마웠던’ 건 그 때문이다. | 2012.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