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09
Saint-Jean-Pied-de-Port ○----------● Roncesvalles (27km)
흐림, 맑음, 비, 비바람(폭풍우), 흐림
피레네를 넘던 5월 9일.
그 때를 생각하면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다.
내가 그 피레네를 넘었다는 것이 정말 어이없다. 미친 피레네.
생장의 아침
순례자로써의 첫 아침식사
첫 날이다. 나는 이 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비장한 얼굴과는 달리 우리 셋은 우리가 빠져나온 침낭을 어색한 손놀림으로 정리했다.
배낭에 짐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공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직은 어눌한 이 배낭싸기가 까미노가 끝날 때 즈음엔 익숙해져있을까.
짐을 챙겨서 나오니 테이블에 몇몇 순례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빵과 쨈은 테이블 위에 세팅되어 있었고 봉사자에게 가서 커피나 차를 받아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두 긴장한 것인지 서로 몇 마디 나누다가 조용히 식사를 한다.
비장한 분위기가 감돌지만 나는 빵이 너무 맛있어서 바구니를 싹쓸이 할 기세로 집어먹어버렸다.
평소 화장실을 자주 가는 편인데 긴장한 탓인지 계속 화장실이 가고싶었다.
아침을 먹고 한 번, 주섬주섬 장갑을 끼다가 또 한 번.
떨리는 마음 만큼 아침에 일어나서 문을 나서기까지 몇 번을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호기로운 출발
잘 할 수 있어!!!
를 속으로 외치며 알베르게를 나섰다. 우리같은 순례자들이 하나 둘 거리로 나와 피레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도 스틱을 짚고 한 발 한발 내딛으며, 생장의 구석구석을 눈으로 담았다.
마을을 빠져나오니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는 맡기 힘들었던 향긋한 풀냄새에 금새 기분이 좋아져서 주변 순례자들에게 여유있게 "웨얼 아 유 푸롬"
을 시작으로 "여기 처음이니?", "이름이 뭐니?", "혼자왔니?"
등등 호구조사를 했다. 그러면서 이정도면 걸을만 하다고 여겼다.
정말 나란 사람 한 치 앞도 모르는 사람...
그러던 중 생장에서 나고 자랐다는 한 아주머니와 걸으면서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에서 왔어요~ 생장에 사시면 까미노가 처음이 아니시겠네요. "
"사실 산티아고까지 가본적은 없어요. 항상 두 시간 정도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오죠. 이 길은 아마 수 천번 걸었을거예요"
"론세스바예스까지 가 보신적 없으세요?"
"전에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려고 새벽 2시에 출발했던 적이 있었어요. 깜깜한 길을 걸으려니 무서웠죠. 그 날 저는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어요."
피레네 앞까지 마실을 다니시는 분이라 역시 걸음걸이가 남달랐다.
점점 숨이 차오르는 나를 보며 그녀는 "부엔까미노"
하며 떠나갔다.
쉴새없이 이야기하며 걸어가던 언니들
길, 길 그리고 또 길
아직까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음에도 앞서 휘적휘적 걷던 나는 점점 사람들 사이에서 뒤쳐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어찌나 잘 걷는지 대화를 하면서 따라가기란 버거운 일이었다.
그래도 말도 안되게 예쁜 경치와 그 속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는 소와 양떼,
창공 위를 날아다니는 독수리들까지...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경치를 보며 감탄했다.
사실 까미노를 준비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있다면 바로 물집이다.
다른 곳이 다 멀쩡해도 발바닥에 물집 하나 생기면 그게 그렇게 불편하고 괴로울 수 없다는 까미노 선배들의 후기를 정독했기에 한두시간 걷다가도 바닥에 주저앉아 양말까지 벗고 발을 말리곤 했다.
걸을 때는 힘들었지만 그렇게 잠시 멈추어 말도안되는 풍경에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여길 오기 참 잘했구나 생각했다.
발을 말리며 경치 감상중
언덕을 하나 둘 올라가다보니 점점 더 숨이 가빠지고 몸이 물을 먹은 듯 무거워졌다.
스무 발자국 걷다가 스틱에 의지해 쉬고, 열 발자국 걷다가 쉬고,
그 열 걸음이 다섯 걸음으로 줄어드는 동안 배낭의 무게는 점점 더 나를 눌러 왔다.
열심히 걸어왔는데 오리손은 다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H는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고, J 또한 내가 지나온 길 어느 곳을 열심히 걸어오고 있을터였다.
걷다가 문득 나도 모자를 써야겠다 생각하고 목 뒤로 손을 넣었는데 세상에 모자가 없다!
분명 모자를 목에 걸어 뒤로 넘기고 출발했는데 나도 모르는 새에 모자를 흘린 것이었다.
심지어 내 모자도 아니고 이갱에게 빌려왔는데...!!!
까미노를 준비하면서 모자를 사야겠다고 했더니 이갱은 선뜻 자신의 모자를 빌려주었다.
왠지 잃어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긴 했지만 까미노를 시작한지 몇 일도 아니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없어질 줄이야...
숙소에 도착해서 H와 J에게 이야기했더니 내 뒤에 오던 J가 그 모자를 봤다고 한다.
어디서 본듯한 모자가 반듯하게 울타리에 걸쳐있어 사진을 찍었다
는데 알고보니 내 모자ㅋㅋㅋㅋㅋ
미안한 마음에 모자 주인에게 사진을 보내주며
'너의 모자가 순례자들을 맞이할거야.'
라고 했더니 어이없어한다. 귀국하면 새 모자 하나 사줘야지.
(혹시 지나가다 모자 보신 분 계시면 근황 좀 알려주시길~)
안녕 내 모자
Orisson 오리손
생장과 피레네 사이 유일한 쉼터 오리손.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오리손까지 와서 하루 머물고 가기도 하는데 사실 오리손부터 론세스바예스까지 본격적으로 멀고 험난한 길이 시작되기에 대부분 잠시 쉬어간다.
먼저 도착한 H가 야외 테이블에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
바에 들어가 오랑지나 한 병을 사고 드디어 오리손까지 왔지만 아직까지 갈 길이 구만리.
어제 도시락으로 사둔 쪼리초 보카디요와 방울토마토를 꺼냈다.
날씨는 흐렸지만 바람이 부는 산 언저리에서 땀을 말리며 먹다 보니 잠시나마 피로가 풀리는 듯 했다.
내 도시락
다른 사람들은 바에서 음식을 주문해서 먹고 있었는데
어리석은 나는 사진속 내 도시락 만으로도 양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맛있어서 신나게 마셨던 오랑지나는 미래의 나에게 재앙을 선사했다.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나.
오리손에서 순례자들은 잠시나마 여유를 갖는다
오리손을 지나고 나면 론세스바예스까지 쉴 수 있는 곳도, 화장실도 없다. 무조건 피레네를 넘어야 한다.
따라서 오리손에 도착하면 배를 채우고 화장실을 꼭! 들렀다 갈 것을 권한다.
물 500ml 2유로
오랑지나 2.2유로
Refuge Orisson
Orisson, 64220 Uhart-Cize, 프랑스
https://goo.gl/maps/u6ho3t1QJ1N2
비아꼬레 성모자상
오리손을 지나 약 한 시간 가량 올라가다보면 저 멀리 작은 성모상 하나가 보인다.
영화 'The Way'에서도 주인공이 아들의 유해를 가지고 피레네에 올라가서 성모상 앞에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에서 본 그대로다.
성모자상은 길에서 조금 떨어져있는데, 아픈 다리와 무거운 가방을 메고 도저히 갈 자신이 없어서 풀밭에 가방을 벗어던지고 가까이 다가갔다.
간이 작은 나는 괜시리 누군가 내 배낭을 가져가지는 않을까 마음졸이며 뒤를 계속 힐끔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거운 이딴 가방 누가 들고 튀나 싶다. 여기서 숨을 곳도 없는데. ㅋㅋㅋ
루이스와 순례자들
오르고 또 오르고 계속 오르고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배낭을 멨다. 정말 멜때마다 어찌나 깊은 한숨을 푹푹 쉬게 되는지...
밥을 먹어 기운이 샘솟기에 걸으며 몇몇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바로 위 사진 속 친구도 이날 잠시 대화를 했었던 사실이 글을 쓰는 이제야 생각이 났다.
저 친구는 네덜란드에서 왔는데 왜 왔는지 물어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참 신기한 것은 저 친구와 계속 마주쳤고, 심지어 산티아고에도 같은 날 입성했으며, 피스테라에서도 만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첫 날에도 우리 만났었네 ㅋㅋㅋㅋㅋ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도 인연인데 피스테라에서 만났을 때 이름이랑 페이스북을 물어볼껄 그랬다 싶다.
파노라마로도 담기 어려운 뷰
올라가면 갈수록 걷다 쉬는 횟수가 많아졌다.
가방의 무게가 너무나도 정직하게 느껴졌고 그 반대로 발바닥에는 감각이 사라졌다.
하지만 고개만 들면 마치 윈도우 바탕화면 속에 들어온듯 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비현실적인 풍경에 마음을 가다듬고 올라가게 된다.
루이스와 엘리샤. 보고싶다 둘다
스페인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는 두 사람.
저 둘과도 이후에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피레네의 경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아름답다.
내가 사진을 이정도밖에 찍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플 지경이었다.
정말 말이 필요 없다.
피레네가 너무나 힘들어서 피레네를 넘는 것은 인생에 한 번이면 충분
하다고 친구들과 이야기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까미노를 끝내고난 지금 우리는 까미노를 다시 간다면 이번에도 역시 피레네를 넘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애증의 피레네
피레네의 푸드트럭
계산하는 루이스. 은근 루이스 자주 찍혔네
생각치도 못한 곳에 푸드트럭이라니!
아까 먹은 음식 양이 너무 작아서 허기가졌는데 잘 만났다.
차 주변으로 먼저 도착한 H를 포함한 몇몇 순례자들이 돌바닥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마지막 프랑스 도장'을 받을 수 있다고 입간판을 보고 끄레덴샬을 꺼내 아저씨에게 수줍게 내밀었다.
좌판엔 계란과 바나나, 사과와 같은 간단한 먹거리와 음료수들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론세스바예스까지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감이 없었던 나는 어리석게도 바나나 한 개와 계란 한 개만 먹었다.
H는 잠시 앉았다 가려고 했다가 내가 '지금 뭔가 먹어둬야하지 않을까?'
했더니 그게 좋을 것 같다며 아저씨에게서 계란을 샀다.
(H는 이 때 내 말을 듣고 계란이라도 사먹은게 천만 다행이었다고 한다.)
바나나 2개 2유로
계란 1개 1유로
미안해요 까미노
사실 푸드트럭에 오기 전부터 화장실이 너무 가고싶었다.
아까 오리손에서 먹은 오랑지나가 문제였을까... 마음이 급해졌다.
푸드트럭 아저씨한테 여기 화장실 있냐고 물었더니 이 아저씨가 여기 전체가 화장실
이라는 망언을...!
가방을 메고 일어서 주위를 둘러봤는데 내가 온 길과 내가 갈 길 모두 나무 한 그루 없는 풀밭 그 자체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이런 곳에 간이 화장실 정도는 하나 있을텐데...
여기는 프랑스고 더구나 해발 1,100미터 지점이다.
지도를 보니 론세스바예스까지는 아직도 까마득히 멀었다.
멘붕
개멘붕
경치는 끝내주는데 화장실과 같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줄 수 있는 시설은 둘째치고 이 한몸 가려 줄 곳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렇다고 론세스바예스까지 참을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이대로 가다가 힘이 풀려버리면 자칫 피레네 오줌싸개 꼬레아나가 될지도 모른다.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아름다운 대지에 흔적을 남겨야만 했다.
두리번거리다가 앞 뒤로 사람이 오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나지막한 언덕 뒤에서 그렇게 ....
허둥지둥 정리하고 일어나 아닌척 다시 길을 걸어갔다.
너무나 부끄러웠지만 만약 이 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후에 더 큰 재앙이 닥쳤을 것이라 생각했다.
미안해요 까미노...
조난이냐 생존이냐 feat.서러움 1
미안해요 까미노 이후부터는 급경사로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올라오기만 했는데 왜 또 올라가야 하는지 돌무더기 오르막 앞에서 일단 한숨부터 내쉬었다. 멀리서 보면 사람들이 마치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 처럼 보일 정도로 경사가 가파랐다.
이때부터는 사진이 없다.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미친 오르막과 내리막때문에 힘들기도했고, 날씨가 미쳐서 비바람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여기서 살아 나가느냐 조난당하느냐의 문제로 심각했기에 사진을 찍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피레네의 날씨는 정말 변화무쌍하다고 익히 알고 있었는데 이정도일줄은 몰랐다.
5월이었음에도 길 한 켠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조금씩 오던 비가 어느 새 하얗게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몰아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비를 맞고 갈 생각이었는데 우비를 입지 않으면 비바람과 추위에 탈이 날 것 같았다.
급경사를 올라 완만한 숲길을 지나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어둑어둑하고 몰아치는 비바람을 뚫고 홀로 걷는 시간이 많아졌다.
길을 따라 조난되었을 때 자신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는 번호 막대기들이 꽂혀있는 것으로 보아 그런 일을 겪는 일이 종종 있는듯 싶었다.
실제로 피레네의 날씨가 좋지 않는 날에는 순례자의 출입을 제한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큰 벌금을 내야 한다고 한다.
피레네를 오르면서 여기서 생을 달리한 순례자들을 추모하는 추모비들을 많이 보았다.
처음에는 왜 여기서 사람이 죽는지 의문이었는데, 이제 알 것 같다.
나도 저들 중 하나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빗물때문에 이미 등산화 속은 워터파크가 개장했고, 우비를 입었지만 옷이 모두 젖어버렸다.
거기다 배까지 고팠는데 가방 윗주머니에 초코바와 바나나가 있었지만 여기서 가방을 내려놓고 그것들을 꺼낼 수 는 없었다.
순간 가방 허리띠에 넣어둔 M&M 초콜릿이 생각났다.
샤르드골 공항에서 기다리기 심심해 먹으려고 샀던건데 이게 나를 구할 줄이야.
주섬주섬 손을 집어넣어 초콜릿 몇 알을 꺼냈다.
이미 비에 젖은 손 탓에 초콜릿이 물에 녹아 얼룩덜룩해졌지만 그건 생각할 바 아니었다.
빗물 젖은 초콜릿을 씹어먹으며 순간 서러워졌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길 왔을까.
혼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0.나는 왜 걸었을까
1.산티아고 순례길 D-1 바욘역에서 기차를 타고 생장으로
2.산티아고 순례길 D-1 까미노 출발지, 생장피드포르에서 순례자 등록까지
짱짱맨 호출에 출동했습니다!!
우앙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