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4차 산업혁명'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④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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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7년 봄에 작성한 것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 담론의 장(場)

4차 산업혁명 논의가 대량생산되고 있는 현재(2016-2017년) 국내 상황은 1980년대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과 다니엘 벨의 『탈산업사회의 도래』가 신문기사 곳곳에서 인용되며 1990년대의 지식정보화 담론을 형성해갔던 30여 년 전의 상황과도 꽤 닮아있습니다. 당시에도 다수의 정책입안자와 지식인들이 미래학과 경영학 분야의 책 구절을 인용하면서, 고도화된 서비스업에 종사할 지식노동자를 양성할 수 있도록 교육을 개편하여 정보사회 혹은 탈공업사회를 위한 준비를 서두를 것을 촉구했었지요. 당시 한국이 처해있던 정치경제적 상황과 맞물려 이 같은 주장을 담은 신문 기사와 정책 논의가 1980년대 초·중반에 눈에 띄게 증가했고,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신교육 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과 같은 주요 정책에 핵심 아이디어로 수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거에 비추어 볼 때, 신문기사, TV뉴스, 책, 학술논문 등을 통해 형성될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아이디어 역시 앞으로 도입될 교육 정책, 연구개발 정책, 노동 정책 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4차 산업혁명 논의 완전히 획일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임춘성 연세대 정보산업공학과 교수는 세계경제포럼의 회장인 슈밥이 설파하는 4차 산업혁명이 단지 “독일이 자국 제조업 경쟁력을 보호하고 고용력을 개선하기 위해 국가전략으로 채택한 ‘인더스트리 4.0’”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이것이 또 하나의 산업혁명이라고 명명하려면, “산업으로 촉발된 인간의 생활과 사회의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말 그대로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매일경제, 2016년 9월 13일자). 이미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임춘성 교수 역시 4차 산업혁명 담론이 한국사회에서 지난 20여 년간 계속되어온 노동 유연화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더욱 강화할 뿐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4차 산업혁명이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아니라, 선진국들이 해외로 내보냈던 제조업 생산을 다시 불러들이는 축적전략의 변화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현실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의 경우는 어떤지 볼까요? 그는 클라우스 슈밥 을 “4차 산업혁명의 최고 장사꾼”이라고 비꼬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그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세계 어느 곳보다 한국이 가장 잘 먹힐 곳이란 걸 간파라도 한 듯이. 그는 한국은 4차 산업혁명 준비가 안 됐다며 겁부터 주었다. (…) 지금 한국엔 이런 장사꾼이 넘쳐난다. 그런데 이상하다. 자기들이 무슨 용한 점쟁이도 아닐 텐데 무슨 기술이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고, 무슨 일이 앞으로 벌어질 것이며, 어떻게 하면 성공할지 조목조목 내다본다는 게 말이다. (…) 장사꾼들은 한술 더 떠 4차 산업혁명이 오면 한국은 중국 기업에 모조리 먹힐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안현실, 한국경제, 2016년 11월 18일자).

슈밥의 주장을 그저 '장사꾼'의 말로 단정지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안현실 논설위원은 4차 산업혁명을 빌미로 대중에게 겁을 주는 필자/논자들이 장사꾼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많은 논자들이 4차 산업혁명의 파고로 인해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우리나라가 외국보다 뒤처지면 큰일이라고 겁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이렇게 위기감을 조성하는 필자들은 짐짓 합리적인 태도를 취하며 독자로 하여금 ‘문제해결능력’과 ‘창의력’을 기르도록 권유하거나, 노동 유연화와 규제 완화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했지요.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들 중 대다수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자신의 일자리가 위협받고(76.5%) 빈부격차를 심화시킬 것(85.3%)이라는 불안감을 나타냈다고 합니다(최민재, 2017: 6). 대개는 이처럼 신문기사를 읽고 불안감을 느끼겠지만, 위의 글처럼 4차 산업혁명 논자들의 말을 ‘장사꾼’의 말이라며 진지하게 여기지 않을 독자들 또한 존재하는 것입니다.

전범수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처럼 4차 산업혁명의 사회가 지니게 될 ‘그림자’를 기계와 인간의 대립 구도가 아닌 ‘불평등’과 ‘독점’의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사람도 드물게나마 있기는 합니다.

4차 산업혁명의 사회에서 물리적 부의 총량은 늘어나겠지만 한편으로 개인이나 기업들 간에 부의 불평등 폭은 더욱 커질 수 있다. 개인 또는 기업들 간에 새로운 기술을 소유하거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수의 소프트웨어 기획자들이 운영하는 로봇이나 시스템에 의한 인간 노동 대체가 심화되면서 고용 창출보다는 고용 축소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 특정 집단으로의 기술 독점 사회는 필연적으로 공동체 약화와 사회적 긴장감을 높일 수도 있다(전범수, 서울신문, 2017년 2월 21일자).

대부분의 필자들이 기계와 노동자의 대립구도에 입각하여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적 대상이 인간의 노동을 밀어낸다고 주장했지만, 전범수는 인공지능 기술을 운영하는 실제 행위자인 ‘소수의 소프트웨어 기획자들’을 지적합니다. 그는 또한 소수의 프로그래머들을 제외한 개인과 기업이 신기술에 동등하게 접근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불평등의 문제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특정 집단으로의 기술 독점 사회”라는 표현은 모든 국가와 기업, 개인에게 기술 경쟁만을 주문하던 앞선 논의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러한 ‘비주류’적 시각에 주목해보면, 앞서 분석한 ‘주류’ 논의가 사회적 불평등, 기술 독점 등의 요소를 배제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인용문헌>

안현실. (2016. 11. 17). “4차 산업혁명을 파는 장사꾼들”. 한국경제신문.
임춘성. (2016. 9. 13). “4차 산업혁명이 아니다”. 매일경제신문.
전범수. (2017. 2. 21). “제4차 산업혁명, 대안인가 신화인가”. 서울신문.
최민재(2017. 4. 27).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 Media Issue 3권 4호.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