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 한때 정의론이 유행처럼 크게 읽혀진 적이 있었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갈등의 폭이 심화됐기 때문이리라. 정의론의 정의는 여러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특히 센델의 정의론은 공동체의 도덕이 중요한 논제였다. 공동선인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의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렇듯 정의론은 항상 개인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공동체로 확장하며 귀속된다. 법적 정의 또한 마찬가지로 개인이 타인으로 피해받지 않을 권리를 원리로 한다.
정의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장동신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사회인지신경과학 박사과정의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이 위험한 이유'라는 기고문이다. 글의 요지는 세상사람들 대부분이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으며, 세상이 근본적으로 정의롭고 공평한 곳이라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세상은 정의롭지 않고, 공평하지 않으며, 늘 권선징악이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정의로운 세상을 믿는 이들은 쉽게 좌절하고 상처를 입는다. 이들은 정의 자체를 위해 자기 합리화를 한다. 정의롭지 못한 이유를 사회구조 보다는 피해당사자에게서 찾는다.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이 높은사람 일수록 굳이 정의로운 현재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한 것이다. 하지만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이 높을수록 아래와 같은 장점도 있다.
- 남들보다 법을 덜 어기고 모범적인 생활을 한다.
-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낮다.
-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거라 믿는 경향이 강하다.
푸코의 자기배려의 주체
왜 정의는 이렇게 자기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까? 이 지점에서 푸코 말년의 주체 해석학을 들여다보자. 푸코는 서양 전통의 주체의 역사를 두 갈래로 나눈다. 하나는 주체의 자기배려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의 자기 인식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로마까지 자기배려의 주체가 이어져 왔지만, 플라톤 이후의 철학과 기독교 종교 이후 자기인식의 주체가 지배해 왔다. 자기배려의 주체가 자기 실천과 실존의 기술을 위한 자기지배를 위한 주체이자, 타자를 받아들이는 지배의 주체였다면, 자기인식의 주체는 개인이 강조된 어떤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나르시스적 주체이다.
즉, 주체는 개인에게 철저히 맞춰져 있다. 이 개인은 항상 어떤 이상의 도덕에 맞춰야 한다. 여기서 주체가 타자의 권력을 지배하기 보다는, 외부의 권력에 지배 당하는 것이 인식의 주체이다. 서양 기독교는 신에게 자기 고백하고, 성경이라는 법전을 따르는 수동적 지배의 구조였다. 이런 자기인식의 주체는 근대 국가권력과 자본주의 욕망의 시대에 부합한다. 정의론은 평등에 기반하고, 이 평등은 사회계약론의 자유, 즉 상상의 공동체인 국가에 귀속된다. 결국 정의는 수동적 개인에서 비롯한 권력 구조의 공동체를 뛰어넘지 못한다. 공동체는 개인에서 시작한다. 가족, 친구, 부족, 종교의 전통적 공동체에서 주체는 어떤 유대와 함께 이 공동체에 소속한다. 인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시작된 공동체는 소속, 직장, 국가의 상징적 공동체로 전환됐다. 이 사회공동체는 개인에게 강제성을 부여한다. 바로 이 강제성의 기표가 권력 관계이다.
자기인식의 주체는 이 권력관계에 옭아매어진다. 푸코가 근대주체의 권력에 의한 지배를 계보학적으로 밝힌 것이 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성의 역사 제3장, 자기배려의 주체에서 서구권력을 통치기술을 벗어난 주체의 역사를 고대그리스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근대의 주체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테두리에 강제적으로 속박되었었다. 근대의 자유는 이 해방되지 못한 자유이다. 도덕도 마찬가지로 주체의 수동성의 지배를 위한 행동 강령이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국가라는 허구의, 도덕을 강제하고, 정의를 취한다. 그러나 실제로 권력의 주권을 위한 상상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배려의 주체는 근본적으로 참된 인식의 주체라기 보다는 곧은 행동의 주체이다. 문제는 자기의 진실을 발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참된 원칙을 갖추고 필요할 때 어느한도까지 그것을 감출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에 있다.”
자기배려는 고독의 요구가 아니라 진정한 사회적 실천, ‘사회적 관계의 강화제이다.’ 윤리적 주체의 윤리적 거리이다.
‘윤리적 통치성’ 자기배려, 자기실천, 실존기술에 대해 푸코는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동시에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문제는 개인을 국가와 그 제도제부터 해방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국가와 거기에 결부된 개인화 유형으로 해방시키는 문제이다. 자기실천은 개인적이지도 공동체적이지도 않고 관계적이며 횡단적이다.”
개인의 면면으로 보자면 모두 타인에게 정이 넘치고 도덕적이다. 이 개인은 나를 포함하여 부모와 가족, 친척들, 이웃, 친구들 등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실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며, 정이 넘치며, 항상 가까운 누군가의 복을 빌고, 그들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돼있다. 누구나가 미시적인 관점으로 보면 윤리적이다. 가깝게 볼수록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으로 주체의 단계를 적용해 보자.
라캉의 정신분석, 정의와 폭력
라캉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상징계이다. 이 상징계라는 용어는 기표와 연관이 있다. 기표는 유아가 어머니와 관계를 맺는 단계(상상계)에서 아버지가 진입하는 기호이다. 아버지 부권이 개입하며 유아는 처음으로 사회라는 통제의 경험을 한다. 즉, 상징계는 개인을 통제하는 언어, 제도, 규율, 도덕, 법률을 통해 주체가 처음으로 사회로 진입하는 기표의 장이다. 앞에서 언급한 개개인은 인간의 모든 성질을 지녔다면, 상징계를 매개로 사회에 소속한다. 이 상징계는 개개의 주체가 권력 관계를 맺는 정체의 장이다. 그렇다면 상징계는 주어진 것인가? 사회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근대 국가 이후부터다. 물론 근대 이전의 봉건제도와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며 주권이라는 권력관계가 있었다. 근대의 사회계약론에 의한 개인의 탄생은 이 국가공동체의 운명과 함께하는 전제로 자유가 보장됐다.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강제로 국가공동체에 편입하면서, 개인은 자율적이든 타율적이든 권력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후기 라캉의 중요한 단계인 실재(또는 실재계)가 있다. 이 실재는 Reality, 말그대로 실재적인 현실이다. 상징계와 실재의 차이는 상징계가 인간의 삶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어떤 기표들에 의한 세계라고 한다면, 실재는 이를 거둬낸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이다. 인간은 인간만의 관념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 본다면, 실재는 이를 거둬낸 진짜 세계이다.
라캉은 실재를 빛의 세계, 진리의 세계라고 했다. 인간이 상징계의 기표를 거두고 이 실재의 빛을 바라보면 눈이 멀거나 미치고 말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스스로 상징계를 만들어내고, 상징계의 서계에 머물러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언어의 사용이다. 한개인은 태어나면서 강제적으로 상징계의 사회라는 경계에 편입된다. 여기서 가장 거시적인 경계는 국가이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게는 가족에 편입하고, 크게는 국가에 소속한다. 이 강제성은 일방적인 폭력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주체는 자라면서 사회의 기표 속에서 성장하고 언어을 도구삼아 교육을 받는다. 가장 기본적인 사회의 통념 속에 하나의 주체로 거듭난다. 여기서 주체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징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벗어날 수 있는 방법론이 서양 전통의 철학적 주체론일 것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비본래적인 삶이 바로 상징계에 살고 있는 인간 존재였다.
폭력은 권력관계에서 나온다.
상징계 사회에서 살고있는 주체는 권력관계를 맺는다. 만약 주체가 상징계를 벗어나 실제 현실과 마주치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면, 길을 걷다 사회적 분류에서 약자의 범주로 분류하는 장애인을 만났을 때, 심하게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왜냐면 그의 세계에서 약자는 항상 비존재라는 선입견이 주입됐기 때문이다. 가장 민감한 문장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사회적 구성원 인식의 현실이다. 개인의 삶에서 소속은 이런 비본래적인 선입관을 주입받는다. 이런 형태의 구조가 바로 계급화, 또는 습속 아비투스이다. 계급화에서 불평등이 발생하여 모순은 극대화 된다. 출발의 불평등은 교육에서 더욱 공고화 중이다. 폭력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나보다 약자인, 보이지 않는, 비존재의 우위에서 서있는 주체는 힘의 평형의 우위를 느낀다. 그래서 무의식적인 상징계의 질서 관념으로 부터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결국 폭력은 힘의 불평형, 상징계 안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구조화된 권력관계이다. 구조적 폭력은 언어와 연관이 있다. 약자는 언제나 약자고, 이런 상황에서 폭력은 다층적으로 구조화 되면서 권력의 수직화가 이뤄진다. 그리고 각 구조의 집단공동체에 속한 개인은 자기합리화를 위해 상징화된 폭력을 행사한다. 나중에 글을 쓰겠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이 바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허용선이다. 정의를 내세우는 주류들은 그들만의 법칙을 위해 정치적 허용선을 PC라며 부정적 의미로 변절시킨다.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맹목적 믿음은 세계의 틀에 박힌, 상징화의 붕괴를 두려워하는 믿음이며, 그 도구는 폭력이다. 권력화의 국가체제와 사회계약에 형성된 '자유'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도구이며 폭력의 아포리아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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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당연하다고 넘겨 집던 생각들이 누군가를 골똘히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있네요, 저도 그저 당연하다 넘겨 집는 것을 골똘히 생각할수 있는 호기심과 관심을 만들어야겠어요!
그저 세상에선 '권력만있으면 뭐든 가능하다. 불법이고 폭력이라할지라도..'라는 생각이 뿌리박혀있고 지금 바로잡기엔 늦다고 하더라도 지금부터라도 바로 잡아야 힘의 불균형을 더 늦기전에 바로 잡을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고 나부터 조금씩 실천해야겠다고 느끼는 글이였어요! 생각의 전환 감사합니다🙇🏻♀️@cyber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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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감사합니다. 실천하기 위해 노력중으로 독서를 하고 평상시 생각하던 것들을 간추려 글로 쓰는 중입니다.
쉽게 판단하기 보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 더 인간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믿음이 높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능력이 부족해 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흥미로운 글입니다! 그래서 이해하고 싶네요~내일 또 읽으러 올게요~ @cyberrn
저도 글쓰기 능력이 부족해 글을 잘 풀어서 쓰지 못합니다. 계속 고민 중인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