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언론에다 대고 사과하기에 바쁘다.
그들이 당사자에게는 사과를 했을까?
"가해자가 최근에 종교에 귀의를 해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된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그들이 당사자에게 사과했다면 서지현 검사가 이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식에게 잘못해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반복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사과'가 죽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관찰해 왔다.
▲ 여성 단원 성폭력 의혹을 받고 있는 이윤택 연출가의 기자회견에 등장한 피켓. 사진=오마이뉴스.
어린 아이 중에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죽는 줄 아는 이가 적지 않다.
아이들에게는 사과하는 게 죽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사과의 기술을 따로 교육해야 한다.
부모가 기꺼이 사과의 습관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른 중에서는 당사자에게 사과를 하지 않고 힘 센 사람에게 사과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 많다.
일본은 여태까지 우리에게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지만, 미국에게는 지겨울 정도로 사과를 반복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 입장에서 우리는 만만하고, 미국은 강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내적 수련을 통해서 키워야 하는 덕목으로서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고 한다. 《맹자》에 나온다. 맹자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로 이 마음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을 비난하고 있다. 수오지심은 '의로운 마음'이다.
이 마음에 대한 동양인의 탐구는 집요하다. 《중용》이라는 또 하나의 경서에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을 용기라고 한다"고 적혀 있다.
결국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제대로 배우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노려하지 않는 사람은 당사자에게 사과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왜 당사자에게 사과하지 않느냐고 비난할 수는 있지만, 기대할 수는 없다.
약한 사람에게 사과하는 것은 용기의 상징이고,
강한 사람에게 사과하는 것은 기회주의의 상징이다.
'사과하는 용기'는 미투 캠페인에서 드러난 가해자들을 판단하는 또 다른 기준이 될 수 있다.
용기가 없기때문입니다.
공적인 공간일수록 용기가 사라진 비겁한 사회가 되어버렸네요. 특히 불이익을 감수하는 도덕적 용기가...
사과한다면서 피해자를 괴롭히기도 하죠...
맞아요. 현실은 그렇게 전개되는 경우가 99.9%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