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 (15) - 결혼승낙
완연한 봄이었다. 이사를 한 후 문희는 차츰 안정되어 갔고 문희 어머니도 건강이 호전되어 가까운 거리는 산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문석이 죽은 후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어머니를 문희는 정성껏 간호를 해 주었고 태식은 일요일이면 문희의 머머니를 차에 모시고 문희와 함께 근교 대북산으로 소풍을 나가기도 했다. 이렇듯 태식과 문희의 노력으로 문희 어머니는 건강은 물론 마음적인 안정도 빨리 찾을 수 있었다. 사실 문석이 죽은 후로 마음의 상처는 어느 것 못지않게 컸지만 문희와 문희 어머니도 문석의 죽음 이후 육체적으로나 마음 적으로 많은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즈음 문희 어머니는 태식이 문희와 결혼할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저 문희씨와 결혼하겠습니다.”
태식이 처음으로 부모님께 문희와의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도 문석이 죽은 이듬해 봄 3월이었다. 일요일 저녁, 일본현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큰형 태민을 제외하고는 모든 식구가 모인 셈이었다.
“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냐? 더욱이 네 형도 아직 결혼하지 않았는데.”
저녁을 먹은 후 거실에 둘러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식구들은 갑작스러운 태식의 말에 한동안 태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전 상관없어요. 사실 문희씨네 사정을 봐서라도 태식이 결혼이 급한 건 사실이에요. 꼭 형이 결혼하고 동생이 결혼해야 한다는 법도 없잖아요.”
태근이 형은 태식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이놈아! 무슨 결혼이 얘들 장난이냐? 아직 문희라는 아가씨도 우리 집에 한 번밖에 오지 않았고 또 서로의 집안 내력도 알아봐야 할 것 아니냐.”
“아버지 요즘 세상에 무슨 집안 내력이 필요해요? 그냥 자기들 좋으면 그걸로 끝나는 거죠?”
태근이 형이 다시 아버지의 말에 대꾸했다.
“그래도 그게 아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야.”
“문희씨 오빠가 죽고, 장례 치르고, 이사하고 그래서 경황이 없어서 문희씨도 저희 집에 자주 오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게 중요하지는 안잖아요. 다행히 문희 어머니도 많이 건강이 호전되고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가 허락해 주신다면 결혼을 서두르고 싶어요,”
태식의 부모님은 아직 문석이 뇌성마비 장애인이 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계셨다. 그리고 이사한 것도 태식의 적금을 털어서 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계셨다. 굳이 태식은 부모님께 그러한 내용을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장례를 치르면서 문희 오빠가 과로사로 사망했다는 것만 부모님께 말씀드린 터였다.
장례비용을 비롯한 병원비 또한 태근이 형의 도움이 컸다. 태근이 형은 태식을 통하여 이미 문희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석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상심해 있는 태식을 위로하며 병원까지 직접 찾아와 병원비와 장례비는 자신이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었다.
“그렇지만 결혼 문제가 네 아버지 말대로 그리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고 일단 문희 어머니부터 만나 보는 것이 순서 일 것 같다.”
태식은 뛸 듯이 기뻤다. 그것은 반승낙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문희의 집이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태식이 문희 어머님을 부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의 반응이 그리 부정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가씨 아버님은 어떻게 돌아 가셨다냐?”
태식의 아버지가 물었다. 태식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부모님께 모든 것을 다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문희의 어머니와 태식의 부모님이 만난다면 어차피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폐결핵으로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
“뭐? 폐결핵?”
어머니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크게 뜬 채 태식을 올려다보았다.
“그랬구나. 하기야 옛날에는 못 먹고 못 입고, 했으니 결핵환자도 많았지 요즘이야 워낙 살기 좋은 세상이라 그런 병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니, 당신은 어떻게 그리 쉽게 이야기해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반문하였다.
“결핵이면 유전될 수도 있는데…”
“거 참, 당신은 재수 없는 소리 말아요.”
어머니의 말에 태식의 아버지는 질책하듯 말을 했다.
“그래,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니 태식이 네가 문희 어머니와 상의해서 날짜를 잡아봐라 그래도 네 어머니라도 문희 어머니를 먼저 만나 봐야 할 것 아니야?”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
모든 일이 태식의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 달 정도 지나자 문희 어머니는 혼자서도 산책하고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는 호전되었다. 아들에 대한 모든 아픔과 고통을 씻어 낸 것처럼 얼굴도 많이 밝아지고 있었다. 태식은 먼저 문희 어머니에게 자신의 부모님과 상면 날짜를 상의 하기 전에 문희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하고 싶었다.
회사에서 퇴근하는 길에 때마침 꽃집에 한창 나오고 있는 수선화를 한 아름 사서 차 뒷좌석에 실었다.
그리고 집 금은방에 들러 빨간색 조그만 루비가 박힌 14K 금반지를 사서 예쁘게 포장해 자신의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시계를 보았다. 반지를 고르느라 시간을 지체했던지 시간은 벌써 저녁 7시를 넘고 있었다. 이때쯤이면 문희가 돌아 올 시간이었다. 문희가 어머님의 저녁 식사를 차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일단 태식은 자신의 집에 들러 저녁식사를 하고 난 후 문희에게 전화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저녁 9시가 넘은 시간 태식은 문희 집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미연동으로 서둘러 차를 몰아 문희의 집 앞으로 차를 세웠다. 문희는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 집 앞에서 만나자는 태식의 전화에 문희는 잠깐 얼굴만 보는 것으로 알았던지 파란색 티셔츠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태식이 차를 세우자 문희가 창문에 대고 뽀뽀를 하듯 입술을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태식은 차에서 내렸다.
“잠깐만…”
태식은 차의 뒷문을 열어 등 뒤에 선 문희에게 보이지 않게 최대한 차 문과 몸으로 가리며 수선화 다발을 들었다.
“문희야! 나랑 결혼해줘!”
태식은 하얀 꽃들이 활짝 피어있는 수선화 다발을 문희에게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태식의 행동에 문희는 수선화 다발을 받아들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태식씨…”
문희의 눈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눈물이 고였다.
“부모님께 말씀 드렸어. 문희와 결혼할 거라고…”
문희는 말없이 태식에게 다가가 한 손에 든 수선화 다발을 태식의 등 뒤로 가져가더니 태식을 껴안았다. 그러자 태식은 문희의 허리를 잡아 힘껏 끌어 당겼다.
“태식씨… 사랑해…”
그녀의 볼이 태식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태식의 귓가에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녀의 입술이 태식의 입술에 포개어 졌고 수선화 다발이 올라와 문희와 태식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입술은 뜨겁고 감미로웠다. 눈을 감았다. 온통 지금 이 느낌으로 채우려는 듯 태식의 머릿속이 텅 비워지며 몸이 나른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새벽안개가 가물거리며 피어나는 강물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순간 무언가 태식의 입으로 들어섰다. 태식은 눈을 감은 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아 주었다.
“집 앞에서 뭐하는 거요?”
빌라 입구로 들어서 던 한 아주머니가 현관을 가로막고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중얼거리자 그때서야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떨어졌다. 문희 얼굴을 바알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태식도 문희의 얼굴을 보기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수선화 꽃말이 뭔 줄 알아?”
한참동안 말없이 손을 잡고 있다 태식이 말을 꺼내었다.
“글쎄요. 수선화의 꽃은 백합을 닮았고 잎은 난초를 닮았죠. 백합처럼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단정하고 가지런한 잎이 너무 좋아 수선화를 좋아해요. 꼭 별님 같잖아요. 사랑스러운 별님, 그런데 꽃말은 아직…”
“치, 꽃말도 모르면서… ‘짝사랑’이야!”
“짝사랑?”
“그래, 수선화 좋아하는 건 좋지만 날 짝사랑하게 만들면 안 돼! 알았지?”
“그건 말이 안돼요! 나도 태식씨를 벌써 사랑하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짝사랑이 되겠어요?”
“그런가?”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가로등 불빛 아래 나지막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