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0월 2일 '항명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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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은 강준만 <현대사 산책>에서 많이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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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사의 어느 해가 조용했을까마는 1971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미도 특수대원들이 청와대 앞으로 돌진했던 것도 71년이었고 오늘날의 성남시에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터져나왔던 '광주 대단지 폭동'도 71년이었다. 또 판사들이 외압에 저항한 초유의 '사법 파동'도 일어났다. 이외에도 기타등등 나라가 요동치는 가운데 야당은 행정부에 책임을 묻는 펀치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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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법무, 그리고 경제기획원 장관에 대한 해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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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당연히 공화당에 이를 부결시키라고 '지시'했다. 협의가 아닌 지시였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 관한한 공화당 의원들도 대충 이견이 없었지만 내무부 장관 오치성에 관한한 사정이 달랐다. 육사 8기 출신으로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그는 당시 공화당의 실세라 할 4인방 (백남억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등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취임 후 4인방이 장악하고 있던 내무 관료들, 즉 경찰서장들과 일선 군수들을 싹 물갈이해버린 그의 행보는 4인방의 경계를 샀던 것이다. 오치성의 행동은 물론 각하의 뜻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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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임안 개표 결과 입이 딱 벌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오치성 장관 해임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각하의 하명을 어긴 반란표가 무려 20표를 넘는 것으로 추정됐다. 야당 쪽에도 사쿠라가 있었을 테니 반란표는 정확히 셈하기조차 어려웠다. 각하는 격노한다. 원래 자신의 3선 개헌을 위해 전면에 내세웠던 4인체제는 그 진노의 직격탄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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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키워주다 짓밟고 나무에 올려놓고는 도끼로 찍어 버리는 용인술은 각하의 전매특허였음에도 4인방은 설마 우리같은 공로자를 어떻게 하랴 배들을 내밀었던 것 같다. "우리 빼고 누구랑 정치할 거야? "라는 말을 자주 했다니 각하 보시기에 배 밖으로 간덩어리가 덜렁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배는 처참하게 찢어지고 만다.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에게 명을 내려 국회의원 23명을 남산으로 끌고 가서 혹독하게 심문한다. 입법부의 독립이고 나발이고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이고 무엇이고 아무 소용 없었다. "반쯤 죽여 버린 뒤 공화당에서 내쫓아라."고 하교하시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끌려갔던 공화당 의원들이 당한 풍경을 보면 그 전설은 아무래도 사실인성 싶다. 일찌기 남조선 노동당 자금부장이었고 각하처럼 전향하여 당시에는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성곤은 멋들어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 수염을 들이뽑히는 곤욕을 치른다. 길재호는 하도 두들겨 맞아 지팡이를 짚는 신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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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아프리카 국가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자임하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나라를 쥐락펴락한다고 자부하던 4인체제는 공화국 헌법과 법률 따위는 아예 사천왕 악마 짓밟듯 즈려밟고 섰던 대통령에 의해 박살이 났고 개인 개인 헌법 기관이라는 국회의원들은 남산으로 끌려가 생똥을 쌀만큼 두들겨 맞고 몸을 망가뜨리고 수염을 뽑혔다.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당하던 시대, 과연 장삼이사 남녀노소는 어떤 취급을 받았을까. 어떤 페친 담벼락에서 "그 시절 나나 내 친구는 불편한 것 하나도 없었다!"라고 기염을 토하는 걸 봤다. 과연 그는 박정희에게 소중한 국민이었을까. 건드릴 가치도 없는 조약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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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무서운 얘기는 박정희가 '진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는 설이다. 즉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4인방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를 막기보다는 내버려 둔 후 일이 터진 뒤에 그를 빌미로 마음껏 때려잡았다는 것이다. 실제 김성곤은 10년 전 북한에서 옛 제자를 찾아 내려온 황태성처럼 이런 소리를 내질렀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정희가 나에게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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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존경한 선생님이 북의 특사로 왔는데 목을 매달아 버린 사람에게 남로당 시절부터의 사귐 정도야 아무런 거리낌이 못되었겠지만 그래도 김성곤은 떨어져나간 콧수염을 매만지며 울먹였을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 원래 '초인'은 '범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법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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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이 읊은 만인보 중 김성곤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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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서글서글
코 아래 수염 서글서글
마음속 휑뎅그렁하다
아이들이 돈 10원 달라 하면 듬뿍 2백원 준다
해방직후
대구의 어느 해 10월
박상희 황태성과 함께
그 가을의 항쟁을 주도한 재정부장이었다
그 뒤 사변 지나
두 마리 용으로 이름 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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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양통신
그 두꺼운 손바닥
그 깊숙한 주머니 항상 두둑했다
궂은 날 질퍽질퍽한 인심
70년대 초
정계에 발 들여놓아
여당 공화당을 손아귀에 쥐었는데
항명 파동으로
그 수염 몽땅 뽑혔다 온몸 짓이겨졌다
남산 지하실에서
'이 새/끼 이 빨/갱이 새/끼 제 버릇 못 버리고!'
그곳에서 나와
정치도
사업도
그리고 삶도 허허벌판
떠도는 구름이 차리리 옳았다
그렇게 구름이 되어 불현듯 떠나갔다
명을 어긴 국회의원 수십명을 남산으로 끌고 가서 반쯤 죽여 내쫒다니...
저런시절이 있었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