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월 19일 최초의 드라마와 이순재
초치기라는 말이 있다. 주로 공부 못하는 이들이 하는 공부 스타일로서 평소에 예습 복습 준비함이 없이 시험 기간 앞두고 날밤을 새면서 닥치는 대로 머리에 집어넣는 ‘오빤 삽질 스타일’의 형태가 되겠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방송을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한국방송 KBS의 출범도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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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창사기념일은 1961년 12월 31일인 바,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스타트를 끊겠다는 의지의 충만함을 엿볼 수 있다. 초치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그 해 5.16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섰고 그들이 국영 텔레비전 방송사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 8월의 일이었다. “새로워지는 나라와 겨레의 모습을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이것을 눈으로 보고 그들의 생활로 삼게 하기 위해서, 혁명정부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삼고 싶어서” (공보부 장관 오재경)
이 ‘크리스마스 선물’은 그야말로 초치기를 통해 국민들에게 배달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19일 뒤인 1962년 1월 19일 또 하나의 ‘초치기’ 선물이 뒤를 따랐다. 그것은 최초의 TV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였다. ‘금요무대’의 첫회분으로 극본 유치진 연출 이기하의 한국 드라마의 시조였다. 내용은 “반공을 제 1의 국시로” 하던 시절답게 반공극. 80년대 중학교를 다닌 분들은 교과서에 실린 반공 희곡의 일부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를 기억하실 것이다. 한때 대한민국 희곡의 길을 개척했던 유치진의 솜씨라고는 말하기 싫을만큼 닭살 돋았던 작품이었다. 그것보다 좀 낫다는 평을 듣는 <나도 인간이 되련다>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공산당원이던 백석봉은 남한 출신의 애인의 존재와 한국계 소련 2세 나타샤의 연정을 거부한 죄로 궁지에 몰리고 그 와중에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기이한 결심을 한다. “당이 인간에게 속하지 않고 인간이 당에 속하여 내가 그 괴뢰가 되었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된 거다. 나도 인간이 되어야겠어. 인간이 되어 인간을 말살하려는 공산주의의 쇠사슬을 끊어야겠어.” 그러니까 인간이 되련다는 죽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백석봉은 그의 죽음을 막으려는, 즉 인간 되기를 막으려는 공산당원들의 방해를 뚫고 인간이 된다. 즉 죽는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드라마 제작 환경은 더더욱 말할 것이 못되었다. “녹화기는 둘째치고 카메라도 달랑 2대에 불과했다. 카메라조작을 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었기 때문에 카메라 대신 의자를 카메라로 설정해 실습을 해야만 했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방송으로 드라마를 제작해야 했으니 드라마 촬영은 긴장의 연속일 수 밖에 없었다. 생방송인 관계로 가장 큰 문제는 NG였다.” (김환표의 TV 드라마, 역사를 만나다 제6회 중)
들어나봤나 드라마 생방송이라고. 오늘날 우리가 연예 프로그램에서 만나는 NG장면의 그 자유발랄함은 꿈도 못꿀 일이었고 모든 NG는 방송 펑크와 바로 연결됐다. 그 가운데 기가 막힌 예를 하나만 들어 둔다. “스튜디오 바닥이 마루장이어서 힐을 신은 여자 연기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장면에서 마루장 구멍에 힐이 박혀 꼼짝을 못 하자, 난데없이 “엄마야!” 하고 소리친 적도 있었다” (위 김환표의 글 중)
이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들은 주로 연극 배우들이었다. 대학 때부터 연극으로 단련된 배우들을 데려다 썼던 것이다. 탈렌트 공채 1기생으로 태현실, 정혜선 김혜자 등이 등장하기도 전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 출연진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은 우리가 기억해 둘 만하다. 이순재. 이후 52년 동안 한국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망라하는 배우로서 활약해 온 그 할아버지다. 그 세월 내내 이순재가 일군 기록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언뜻만 살펴 봐도 그가 바로 TBC로 옮겨 작업한 <눈이 나리는데>는 최초의 일일 연속극이었고, <보통 사람들>은 무려 3년 동안 진행된 최장수 일인연속극이었으며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는 아예 고유명사가 됐다.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일일연속극은 역시 이순재가 중심을 잡았던 <보고 또 보고>였고 제자 허준 (전광렬)을 호령 하나로 기죽이던 명의 유의태 역의 이순재는 드라마 <허준>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사극으로 끌어올려 놨다. 그의 배우로서의 역사는 곧 한국 드라마의 효시와 궤도,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영조, 대원군 등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와 야동순재같은 얼뜬 표정에 이르기까지, 일일연속극부터 시트콤까지 그의 발자취는 곧 우리 TV드라마의 역사였던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이순재의 연기는 김세윤이 형사로 출연했던 드라마 <형사> 납량특집에서였다. 친구의 아내 장미희를 사모하게 되는 이순재는 최면술을 걸어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 1주일에 한 번씩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만나러 오게 만들어 밀회를 거듭한다. 그런데 어느 날 이순재를 만나러 오던 장미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데 그때부터 그의 아파트에는 또각 또각 구두 소리만 내면서 “안아 주세요.”를 부르짖는 ‘목없는 미녀’가 출몰한다.
먼 훗날 김혜수와 김태우 두 배우로 리바이벌됐던 그 드라마에서 그는 정말 누군가를 미치도록 좋아하고 그로 인해 한 사람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공포에 젖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참으로 실감나게 구현했었다. 최면을 걸며 이순재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나를 열렬히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외치던 모습은 주름살 그득한 지금의 모습 위에도 종종 오버랩되곤 한다. (그런 최면술 어디 배울데 없나 쩝)
51년 전의 1월 19일 한국 TV 드라마의 효시가 쏘아올려졌다. 그 화살은 지금도 날고 있다. 이순재의 정치적 선택이나 입지를 떠나서 그렇게 우리의 한 분야의 산 증인이 여직도 활약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 행운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순재 자신이다. 2008년 7월30일, 연극 〈라이프 인 더 시어터〉 공연장에서 이순재가 등장하리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순재가 출연하고 있었지만 그날 새벽 이순재의 노모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하지만 이순재는 무대 위에 나타났다. “연극은 관객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공연을 한 뒤 빈소를 지키겠다” 두 번의 공연을 마친 뒤에야 그는 노모가 기다리는 병원으로 향했다. 이 일화에서 우리는 그가 왜 아직도 현역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대단하신분 ㅎㅎ 잘 읽었습니다
대단하신 분 맞습니다.... 대가..라는 표현도 어울릴 듯 합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존경 받아 마땅한 분이지. 정치적 입장이야 뭐 그 세대에게서 많을 걸 바라면 좀 그런거고....
뭐 정치적 입장 따질 ..... 수도 없지 뭐